[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상하이와 홍콩의 유대인들

2025-05-26     김경한 대표기자

바그다드가 출발점이었다. 인류의 찬란한 문명 발상지였던 중동에서도 이라크 바그다드는 특별했다. 지금의 팔레스타인 땅을 점령한 바빌로니아 제국은 수많은 유대인 포로들을 당시의 중심지 바그다드로 끌고 갔다. 역사가들이 '바빌론 유수' 로 이름붙인 그 시기다. 유대인 디아스포라(이산)는 이때부터 중동을 거쳐 오랜 세월동안 유럽대륙으로 퍼져나갔다.

상하이의 유대인 진출은 세계사의 흥미로운 대목이다. 중세이후 제국들의 식민지 정책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영국 식민지 시절 인도에 진출해 이미 부를 쌓은 유대인들은 아편을 들고 상하이를 찾았다. 인도 아편은 이 시기 최고의 현금장사였다. 바그바드에서 유럽으로, 중동으로, 인도를 거쳐 미지의 땅 아시아 상하이에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상하이 와이탄(外灘)을 방문할 때마다 경이로운 역사에 놀라곤 한다. 1842년 난징조약이 체결되기 이전 상하이는 변방의 작은 어항이었다. 이후 불과 50여 년 만에 런던 수준의 시내 전차 체계와 가스 공급 망을 갖췄다. 청나라 말기 피폐했던 바닷가에 어떻게 이런 도시가 건설되었는지 늘 궁금했었다. 황푸강 하상에 들어선 서양거리 와이탄은 별천지였다. 호화롭게 지어진 호텔 건물과 양식 레스토랑, 중세풍의 유럽식 거리가 펼쳐졌다.

풍요롭고 예술적 흥취가 넘쳐나는 밤 문화는 전통 상하이의 낯선 풍경을 녹여냈다. 외국인 거주지 '조계' 를 중심으로 19세기 중국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1930년대에는 시카고 비슷한 마천루와 스카이라인을 내보이며 세계 4대 도시로 올라섰다. 상하이는 '중국의 뉴욕'으로 변신하며 산업과 금융 중심지가 되었다.

 

▲상하이

서순(Sassoon)가와 커두리(Kadoorie), 두 유대인 가문은 바그다드가 뿌리지만 성장 과정은 달랐다. 바그다드 유대인 지배계층이었던 서순가의 데이비드 서순은 권력 다툼에 밀려 인도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가문의 배경을 업고 사업에 성공한 뒤 아편을 팔기 위해 중국으로 눈을 돌렸다.

엘리 커두리에게는 서순가와 같은 배경이 없었다. 서순가의 먼 친척이긴 했지만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그는 데이비드 서순이 인도에 세운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홍콩 서순가 회사에서 일을 시작했다. 엘리는 고무회사 투자로 백만장자가 되었다. 상하이 회사 지분을 사들이며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두 가문은 1949년 중국 공산당 집권 이후 서로 다른 정치적 선택을 하면서 엇갈린 운명을 맞았다. 모두 상하이에서 몰락했지만 커두리 가문은 홍콩에서 살아남았다. 아직도 페닌슐라 호텔 체인과 홍콩 최대 전력회사인 CLP 홀딩스를 경영하고 있다.

서순가의 데이비드는 상하이의 미래에 주목했다. 아편은 정치적 사건으로 결말이 났지만 이때 축적된 재력은 오래 동안 지역경제권을 장악하는 열쇠가 되었다. 아편전쟁 패배로 청나라는 상하이 조계지역과 홍콩 섬을 영국에 넘겼다. 소유자들이 달라진 중국 땅에는 생소한 외국인 기업과 투자가 활발히 이뤄져 근대 도시로 급속한 발전을 이뤄냈다.

서순가는 상하이에 케세이 호텔을 지었다. 마르코 폴로식 중국이름을 딴 호화호텔이다. 식민지 봄베이의 타지마할 호텔과 파리의 조지 5세 호텔, 런던의 클래리지에 필적할만한 작품을 만들려고 했다. 황푸강변 아르데코 우주선처럼 솟아오른 호텔은 오랫동안 상하이의 명물이었다. 모자이크 천장 아래 로비 아케이드는 파리에서 가져온 최신 유행 모자와 란제리, 옥 손잡이가 달린 은제품 상점들이 20개나 들어섰다. 아시아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풍경이었다.

빅터 서순은 타지마할 호텔에서 케세이 호텔 지배인을 스카웃했고 런던에서 총지배인을 데려왔다. 베를린에서 나이트클럽 지배인을 모셔와 바이마르 풍미와 데카당스 분위기를 연출했다. 배의 이물처럼 와이탄 너머로 튀어나온 스위트룸은 항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을 연출했다. 케세이의 성공은 상하이의 건설 붐으로 이어졌다.

 

▲상하이

메트로폴 호텔과 아파트, 오피스 빌딩들은 모두 영어 이름이 붙여졌다. 그로브너 하우스, 에뱅크먼드 하우스, 케세이 맨션, 해밀턴 하우스에는 에어컨이 딸린 공간들이 즐비했다. 조계에 살고 있는 100만 명의 중국인들을 사실상 외국인들이 통치했던 셈이다.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빈을 공격(1938)했을 때 유럽의 유대인들은 죽음을 피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독일과의 관계 때문에 대부분의 국가에서 난민을 거부했으나 상하이는 예외였다. 빈의 중국공사 허펑산의 역할이 컸다. 그는 2천명의 유대인에게 비자를 발급했다. 당시 상황으로는 엄청난 일이었다. 이 덕분에 국외탈출을 시도한 유대인들이 상하이로 향했다.

아시아 홀로코스트 의인으로 평가받는 허펑산의 도움으로 상하이 유대인촌은 급격히 늘어났다. 시너고그(유대인 예배당)가 만들어지고 거주지가 지정되었다. 먼저 와있던 빅터 서순은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죽음을 피해 떠나온 6천여 명의 유대인 난민들은 상하이에 리틀 비엔나를 만들었다. 홍커우 게토에는 한때 18천명의 유대인이 무국적자 지정구역에서 생활했다. 이들은 동아시아 지정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본은 유대인 채권으로 차관을 들여다가 무기를 마련해 발틱 함대를 무찌르고 러일전쟁(1904)을 승리로 이끌었다.

서순 패밀리가 상하이에 배팅하는 동안 커두리는 홍콩으로 눈을 돌렸다. 보잘 것 없는 섬 홍콩이었지만 그곳은 영국 행정관이 통치하고 영국 병사들의 보호를 받는 엄연한 대영제국 지역이었다. 기반을 닦은 커두리는 홍콩 섬 리펄스베이와 가우룽 항구에 페닌슐라 호텔을 구입했다(1920). 이들이 만든 빅토리아 피크 수직전차는 아시아 토목공학의 경이로운 역사였다.

커두리의 성공 거점이었던 홍콩 페닌슐라 호텔은 한때 일본군 점령지 사령부였다. 중화전력공사를 인수해 전기사업을 장악하고 성공여세를 몰아 가우룽 북쪽 신계에 휴양지를 개발했다. 커두리 마크가 찍힌 돼지고기와 신선한 닭고기는 육류를 선호하는 이 지역 상권을 장악했다. 홍콩 해저터널은 커두리의 아이디어로 탄생했다. 영국 반환 전까지 홍콩의 소득은 중국 본토의 10배였다.

커두리가 출자한 홍콩상하이은행(HSBC)은 현재까지 중화권 금융의 중심축이다. 그는 홍콩최초의 억만장자였다. 세월이 흘러 홍콩에 커두리 에비뉴가 복원(1950) 되었다. 후손들은 아직도 홍콩에서 중국 본토에 전기를 공급한다. 커두리의 무덤은 문화혁명 때 파괴된 상하이 유대인 거주지 근처 외국인 공동묘지에 마련되었다.

 

▲홍콩

상하이 와이탄 북쪽 와이바이두 대교 건너편은 서순과 커두리가 유대인들을 보호했던 홍커우 지구다. 아직도 유대인 게토의 흔적이 남아있다. 난민 박물관과 상점들은 유대 풍 디즈니랜드로 꾸며졌다. 역사적으로 보면 중국에는 천 년 전 허난성 카이펑(開封)에 유대인이 정착했다. 마르코 폴로와 마테오 리치의 기록에도 등장한다. 중국인과 동화되었지만 일부 후손들이 텐진과 하얼빈에 남아있다.

유대인 박물관에는 난민시절 가져온 여행가방과 애장품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주인을 기다리는 핸드백( A Handbag Awaitng Its Ower)" 코너에서 나는 한참을 머물렀다. 한 유대인 부부가 아이의 병 때문에 쌀과 밀가루를 파는 중국인 상점주에게 핸드백을 맡기고 돈을 빌렸다. 다시 찾으러 오겠다고 했지만 만날 수 없이 세월이 흘렀고 상점 주인은 손녀에게 핸드백을 물려주었다. 손녀는 그 핸드백을 박물관에 기증했다.

유대인 칼(Carl)이 중국인에게 맡긴 서적 수 백 권의 사연도 애잔했다. 70년을 기다렸지만 그가 돌아오지 않자 후손들에 의해 이곳에 맡겨졌다. 가슴 아픈 역사의 단면들이다. 유대 카페에 들러 지친 발걸음을 내려놓고 창밖을 응시했다. 난민 유대인 루돌프 부부가 문은 열었던 근대 찻집이다.

내부에는 공교롭게도 가끔 즐겨 듣는 'Cafe 1930'(아르헨티나 작곡가 피아졸라 곡)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 시절 남미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정서와 상하이의 상황이 만나고 있었다. 역사의 우연과 필연이 이렇게 교차하는가 싶다. 얼마 전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전 세계 언론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상하이

서순가의 성공을 이끌었던 빅터(Victor)는 공산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5억 달러 규모의 재산을 버리고 바하마로 떠났다. 인생의 꿈과 희망 모두를 상하이에 묻은 셈이다. 온화한 기후에 세금이 없는 바하마 낫소는 지친 인생을 맡기기에 적지였다. 5층짜리 건물 '서순하우스'에서 상하이를 그리워했다. 금발의 간병인 애벌린 반스와 살다가 텍사스의 집이 완공되기 전 세상을 떠났다(1961).

빅터 서순은 죽기 전 변호사를 통해 아들에게 유언장을 남겼다. 첫째,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마라. 둘째, 금방 부자로 만들어준다는 거래는 절대 하지 마라. 셋째, 중국에는 절대로 가지 않겠다고 약속해 다오.

월스트리트 저널 지국장으로 30년 동안 중국을 관찰한 저널리스트 조너선 카우프만은 탁월한 저서 'The Last Kings of Shanghai' 를 통해 두 가문의 스토리를 흥미진진하게 그려냈다. 아시아의 로스차일드가 된 유대인 이야기는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훗날 서순가의 후손 제임스 서순은 영국 재무부의 고위직이 되어 루지웨이 중국 재무부장과 베이징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상하이 근대 역사를 수놓은 서순 패밀리 에피소드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제임스 서순은 중국도 동유럽처럼 이전 소유주들이 귀환하여 재산을 돌려받도록 해야 하지 않느냐고 넌지시 말했다. 루지웨이는 미소 머금은 얼굴로 일어서면서 낮은 목소리의 영어로 속삭였다.

'지난 일은 지난 일로 묻어 둡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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