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치첸이사 피라미드의 제단. 멕시코 칸쿤
"피라미드는 동이 틀 때 분홍빛 광채를 내는 원추 같지만 석양에는 불타는 듯한 하늘위의 검은 삼각형으로 보인다". 불멸의 파라호 람세스를 소설로 그려낸 프랑스 작가 크리스티앙 자크(1947-)의 피라미드 미학이다. 카이로 기자에서 보았던 피라미드가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조금은 다른 아담한 모습으로 천년의 세월을 지켜내고 있었다.
마야 후기(900-1152)의 유적지 치첸이사(Chichen Itza)는 유카탄 반도의 세계적인 휴양지 칸쿤에서 멀지 않은 거리였다. LA에서 비행기로 6시간 만에 칸쿤에 도착해 피로를 풀고 다음날 아침 일찍 치첸이사를 찾았다. 일대의 유적지는 유네스코에 오른 세계 7대 불가사의다. 석조 신전과 버려진 폐허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벌판으로 매년 200만 명이 찾아오고 있다. 그 시대에 어떻게 이런 도시가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다.
유카탄 반도에는 기원전 고대부터 사람이 거주했다. 6-7세기쯤 전성기를 이룬 마야문명은 천문학, 건축학, 수학, 의학 등이 매우 발달했다. 마야의 신전들은 미적인 아름다움이 가득했다. 빛의 방향과 돌의 배치, 층계의 숫자 등이 천문학과 수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비밀을 풀어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려야 했다.
치첸이사는 유카탄 반도에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던 초기 마야인 '이사' 족(族)의 우물 입구를 의미한다. 하늘의 그림자를 담아내는 신성한 우물을 중심으로 문명이 펼쳐졌다. 자연 연못 '세노테' 는 성스러운 샘이었다. 기우제 때 15세 소녀를 산 채로 우물에 던져 인신공양을 하던 장소다. 세노테의 수직 동굴은 유카탄 반도 전역에 산재해 있다. 마야인들이 절대자에게 제물을 바치던 신성한 곳이었다.
고대 왕국 마야는 서기 750년과 900년에 걸쳐 치첸이사에서 토대를 닦았다. 인근의 악스나와 코바를 복속시키면서 900년 이후 빠르게 발전해 11세기 중반에는 강대한 세력을 형성했다. 그러나 번영은 영원할 수 없다는 역사의 이치를 이들도 비껴가지 못했다. 체첸이사는 쇠퇴기를 맞았다. 13세기에 떠올라 지금의 멕시코 북부를 평정한 마야판에게 정복당했다. 왕족들은 사로잡혀 모두 세노테에 던져졌다. 간직했던 보물들은 전리품으로 남김없이 약탈되었다.
잊혀 진 마야 영토에 서양정복자들이 들어 온 것은 16세기 들어서다. 프란시스코 데 몬테호가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에게 탄원(1526)을 넣어 유카탄 반도 탐험권을 얻어낸 것이 시작이었다. 대항해시대 초기 몬테호의 1차 원정(1527)은 신통치 않았다. 칸쿤 인근에 조그만 요새를 하나 만든 것이 소득이었다. 1531년 두 번째 원정을 떠났고 캄페체 지역을 본부로 탐험은 지속되었다.
한참 뒤 몬테호의 아들이 치첸이사를 찾아냈다. 처음에는 원주민들이 적대적이지 않았으나 희생자가 늘어나자 스페인 정복자들을 습격해 쫓아냈다. 유적 속에 갇힌 채로 150여 명의 병사들이 죽고 후퇴를 결정해야만 했다. 몬테호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본국에서 대규모의 용병과 병사들을 수송해 결국 유카탄 반도 전체를 장악했다.
탐험대가 치첸이사 유적을 처음 발견했을 때 일부 원주민들이 마야 유적에 살고 있었다. 이들이 대대로 살아온 마야 부족이었을 가능성은 낮았다. 대부분은 부족들끼리의 살육전과 이합집산으로 멕시코나 남미로 생존의 방랑길에 올랐다. 지역을 벗어나지 못한 일부가 오랜 세월 정글을 떠돌다가 폐허를 발견하고 다시 터를 잡았을 것으로 고고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치첸이사 유적은 한때 소 방목장으로 버려져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다가 19세기 들어서 재조명되었다. 외교관이자 고고학자였던 존 로이드 스티븐스(1805-1852)의 여행기 '중앙아메리카 치아빠스와 유카탄 여행에서 있었던 일' 이 출판되면서 부터였다. 훗날 유카탄 반도의 미국 영사 에드워드 허버트 톰슨(1857-1935)이 30년 동안 유적을 발굴했다.
톰슨은 임기를 마치고도 유카탄 반도의 최대 도시 메리다에 40년 동안 살면서 스페인어와 유카테크 마야어를 익혔다. 그의 노력으로 고대 신전과 무덤들이 공개되었다. 세노테의 물속에 잠겨있던 옥과 황금, 많은 유골들이 발굴되었다. 건져 낸 귀중한 것들은 하버드대 피바디 박물관으로 실어 보냈다.
20세기 들어 카네기재단이 멕시코 정부의 허락을 받아 10년 동안 정밀 발굴 작업을 진행했다. 파견된 고고학자들은 수풀 속에 묻혀있던 전사들의 신전과 카라콜 등을 복원해 현재의 모습으로 정리해 나갔다. 멕시코 정부는 1930년대까지 흙 속에 묻혀 있던 많은 유적지를 찾아내 국제사회에 개방했다.
치첸이사는 엘 카스티요(El Castillo, 쿠쿨칸 피라밋 신전)가 중심이다. 쿠쿨칸은 '마야의 깃털이 달린 뱀신'이다. 카스티요가 웅장한 모습의 성채 같아서 붙인 이름이다. 계단식 피라미드는 30m 높이에 9개 층 테라스로 건축되었다. 4면에 91개 계단을 모두 합한 숫자에 피라미드 꼭대기 신전 1을 더해 365가 된다. 태양의 움직임을 관찰해 1년을 정했고 20진법을 사용했다. 숫자 0의 개념을 최초로 이해한 부족은 아랍 원주민이 아닌 마야인 들이었다.
피라미드의 가파른 층계를 힘겹게 올라 꼭대기에 섰다. 전사의 신전은 태양신에게 재앙을 막아달라며 인간의 심장과 피를 제물로 바치던 제단이다. 살아있는 제물을 직접 바치는 것은 신들을 기쁘게 하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이 때문에 식지 않은 인간의 피가 필요했다. 전쟁에서 잡혀온 상대측 장수나 귀족, 왕족들의 심장을 도려내 제물로 올렸다. 신성한 가치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목숨을 건진 병졸 포로들은 노예가 되었다.
피라미드를 중심으로 사면이 탁 트인 지형은 모든 것들을 한 눈에 넣기에 충분했다. 평원은 과거 속에 갇혀 지난날들의 영광을 반추하는 듯했다. 깨진 돌조각 몇 개가 아직도 풀밭에 남아있고 그 사이로 오후의 햇빛이 강렬하게 스며들었다. 미지의 세계였던 천기를 관찰하고 동서남북에서 다가오는 적들의 공격을 미리 파악하기에는 최고의 포인트였을 것이다. 나는 피라미드 위에서 한동안 마야의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촘판틀리(Tzompantli)는 신에게 바친 이들의 모습을 그려놓은 '해골 제단' 이다. 마야의 전통명칭보다 정복자 스페인의 언어가 덧칠해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이었다. 오사리오 (묘지. Osario)와 카사 콜로라다 (붉은 집. Casa Colorada)는 보존상태가 좋았다. 내부의 방 하나에는 복잡한 상형문자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곳을 다스렸던 군주들의 이름이 먼 곳에서 찾아온 나그네를 맞이하고 있었다.
돔을 올린 중앙 탑의 원형 디자인과 나선형 계단은 '엘 카라콜(달팽이. El Caracol)'로 이름 지어졌다. 마야인들은 별을 보고 추수할 시간과 제사 일정을 정했다. 햇살의 각도가 출입문에 부딪혀 드리워지는 그림자로 동지와 하지를 알아냈다. 완전히 다른 대륙에 살았던 우리의 해시계나 물시계 원리와 비슷하다. 인류는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태양에 순응하는 지혜로운 삶을 선택했다는 증거다.
잉카를 능가했다고도 알려진 마야문명은 이제 시간 속으로 스러져가고 있었다. 세월을 감당하기에 역사는 너무나 짧고 허무하다. 매콤한 멕시코 미식 타코 샐러드를 맛있게 말아주던 식당주인의 눈빛은 살아있었다. "체첸이사는 멕시코의 뱅크다. 이곳이 무너지면 이 나라 경제가 문제된다. 너무나 고마운 관광보물이다".
칸쿤의 태양은 뜨거웠다. 해안으로 멕시코만이 곡선을 그리는 푸른 바닷가 눈부신 백사장에는 언제나 한여름의 축제 열기로 가득하다. 중미 최고의 휴양지인 이곳은 미국과 유럽 부호들의 단골방문지다. 나는 며칠 동안 칸쿤에 머물렀다. 칸쿤은 마야어로 '뱀 소굴' 이다. 우리식으로 뱀골인 셈이다. 100여 명의 어부들이 살던 작은 해안은 멕시코의 휴양지 마스터플랜(1970)으로 연간 350만 명이 찾는 지구촌 최대의 명소가 되었다. 150개의 호텔과 400여개의 레스토랑에서 행사와 축제가 연중 계속된다. 멕시코 국내총생산(GDP)의 8%가 이곳의 관광수입이다.
밤의 유카탄반도는 거짓말 같은 어둠속으로 완전히 잠겼다. 적막한 고요 속 바닷가 창공에는 별빛이 가득했다. 마야인들이 신성처럼 받들었던 샛별도 보였다. 메소아메리카의 중심지 마야는 샛별문화였다(정혜주 책. 마야문명에서 샛별의 의미). 치첸이사 피라미드 관찰 대상 중에는 샛별이 항상 우선이었다. 부족들은 찬란한 샛별처럼 용감한 장수가 되고자 했다.
마야인들은 이른 아침 해를 맞이하는 제단에서 예를 갖추고 하루를 시작했다. 피라미드를 따라 내려오는 태양의 그림자를 주시했다. 마치 뱀을 닮은 그림자 '쿠쿨칸' 을 왕들의 문양과 전통으로 삼았다. 6000만 년 전 어느 날 지름 10킬로미터의 소행성이 이곳 유카탄 반도에 충돌했다. 이때 공룡이 멸종하고 백악기가 종말을 고했다. 이후 세상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어쩌면 지구의 운명점을 따라 마야인들의 문명이 피었다가 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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