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행복한 새벽왕국, 태국 수코타이
태국은 동남아시아의 중심부다. 이 지역에서 유일하게 식민지를 경험하지 않고 독립을 지켜왔다.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 말레이시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최고의 날씨, 지정학적으로 좋은 위치에 음식 맛있고 후한 인심으로 소문난 나라다. 여기에 우리나라 5배 정도의 광활하고 비옥한 영토는 물론 7천만 인구까지 갖췄으니 축복받은 곳이다.
며칠 동안 방콕에 머물다가 아침 일찍 공항에 나가 경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태국의 과거를 보고 싶어서였다. 1시간 여 만에 태국 중부 동화마을 같은 수코타이 공항에 내려 옛 성터를 찾았다. 화려했던 도읍지는 고요했다. 동서와 남북으로 2킬로미터 정도 정사각형 형태로 조성된 역사 유적지에는 사원의 일부와 불상 몇 개, 반쯤 잘려나간 돌기둥들이 남아있었다. 방어의 벽은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건너지 못하게 설계된 물길의 이중배치가 인상적이었다.
5킬로미터 둘레 안쪽의 왕궁과 사원의 돌계단에 발걸음을 남기면서 아쉬움을 달랬다. 자전거를 빌려 타고 옛 터 사이를 느린 속도로 돌았다. 남아있는 흔적들이 푸른 하늘과 대칭을 이루며 정적 속에 묻혀있었다. 한때 화려했던 왕도는 세월에 풍화되어버린 잔해들 사이로 바람만이 오가고 있었다. 거친 질감으로 뜯겨지고 부서진 돌기둥 틈새로 사암의 굵은 모래입자들이 선명했다.
태국 선조들이 처음 인도차이나 반도에 들어온 것은 13세기 초였다. 중국 윈난에서 다이족들이 남쪽으로 밀려 내려오면서 정착했다. 북부 중심도시 치앙마이를 거쳐 수코타이와 중부지방에서 번성하다가 지금의 수도 방콕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당시 동남아의 강자인 크메르 영토에 자리를 잡고 역사를 다시 썼다. 수코타이 독립왕국(1238)은 이때 세워졌다.
거대한 사찰 터와 화려한 불교유적들이 산재한 것은 불심으로 나라를 지탱하려 했던 당대 사람들의 유산이다. 절에서 수도하는 삶을 최고의 시간으로 여기고 섬기는 문화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영토가 넓은 태국은 그 만큼 종교나 문화의 깊이도 다양하게 발전되었다.
수코타이 역사유산은 대부분 화려한 전성기를 구가했던 람캄행 대왕(제위. 1279-1298)의 치적이다. 오래된 힌두교 세력을 몰아내고 테라바다 불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타이문자도 창제했다. 수코타이 왕국으로 현대 태국의 기초를 만든 주인공이 되었다. 140년간 타이제국의 수도로 주변을 다스렸다. 수코타이 이전에는 '무앙' 이라는 작은 지역 세력들이 군웅할거 했다. 일대를 제압하고 국가 형태를 갖춘 왕국의 첫 출발점이었다.
세월에 스러진 200여개의 절터는 발굴되었거나 부분적으로 복원되었다. 방콕과 치앙마이 중간쯤 위치한 지리적 안정성과 풍부한 자연이 번영의 바탕이었다. 전성기 수코타이는 "물에는 물고기가, 들판에는 쌀이 가득하고, 누구나 자유로이 교역을 하러 다녔다" 고 기록될 정도로 번성했다. 상인들을 유인하기 위해 세금을 없애고 육로 교역을 장려했다.
몽골과 원나라의 관계도 만들었다. 동남아 최초로 도자기 기술이 수입되기도 했다. 넓은 사원 터와 엄청난 불상들의 자취는 수코타이의 지나간 영화를 짐작하게 했다. 이도시가 사라진 것은 아유타야와 란나 왕국과의 전쟁 때문이었다. 내륙의 분쟁까지 20년(1456-1476)의 세월은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근처에서 세력을 키운 아유타야 왕국에 흡수되면서 15세기 후반부터 독자적인 왕조는 무너졌다. 연이어 터진 버마족의 융성은 역사를 바꿔놓았다. 불교의 이상향 도시는 폐허가 되고 말았다.
수코타이에 이어 아유타야, 톤부리, 지금의 짜끄리 왕조로 태국의 권력은 이어졌다. 현재 최고의 통치자인 라마10세 국왕의 사진은 수코타이 시내에서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유적지 복원에는 태국정부의 오랜 노력이 뒷받침된 결과다. 그렇게 유네스코가 인정하는 지금의 역사공원이 되었다.
왕궁 터의 중심지 '왓 마하탓' 사원은 비교적 옛 모습을 잘 지키고 있었다. 전형적인 태국식 대형 불상이 중앙에 자리 잡고 주변을 벽돌 파고다들이 감싸는 구조였다. 불상의 몸은 흰 석회가 발라져 있고 머리위로는 불꽃이 치솟는 모양이다. 불꽃은 부처의 지혜를 상징한다. 바깥 연못과 어우러져 묘한 신비감을 드러냈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어느 유적지 못지않은 경이로움이 숨겨져 있었다.
'왓' 은 태국어로 사원이다. 수코타이 최대 사원 '왓 마하탓' 은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다. 수많은 불탑은 거의 없어지고 복원된 일부가 전성기의 영광을 지키고 있었다. 왕실 최대사원의 위용만 성터 곳곳에 남아있었다. 기둥 위 사라진 건물들은 지나간 시간을 그려내야 하는 상상의 영역이다. 백색 부처의 독특함은 사원의 자랑이다. 미소 가득한 석불에 위로받고자 하는 이들의 발길이 연중 이어지고 있다.
옛 성터의 대표 건축물은 '왓 시사와이' 다. 분위기가 힌두교 풍이다. 옥수수처럼 생긴 트리플 주탑이 눈길을 끌었다. 힌두교의 브라흐마와 비슈뉴, 시바에게 봉헌된 것이 오랜 세월을 거쳐 불교 화 되었다. 입구에서 걸쳐 보이는 파고다 건축은 인도의 전형적인 시바여신 사원을 연상하게 했다.
연못을 경계로 오른쪽 방향에 세워진 스리랑카 식 남방불교 사원과 첨탑도 일품이었다. 종모양의 육중한 지상 유선형 사원에서 솟아오른 첨탑이 허공을 향한 구조다. 방콕의 에메랄드 왕궁처럼 수코타이 옛 성터에도 불교와 힌두교, 스리랑카풍의 소승불교 사원이 사이좋게 공존하고 있었다. 포용과 너그러움이 베어난 바탕을 짐작하게 한다.
수코타이는 타이족의 이상적인 불교 정토로 만들어졌다. 이 공간에 다양한 종교와 문화가 포용되었다. 그들은 생명수인 짜오프라야 강물을 관개시설로 끌어 들여 미리 파놓은 호수에 저장시키는 방법으로 성읍의 발전을 도모했다. 땅은 해자로 연결되고 사각과 원형으로 어우러져 흘러나가는 독특한 지형을 만들어 냈다. 낙원을 함께 꿈꾼 동남아 중세인 들의 거점이었다.
수코타이 사원에 그려진 만다라가 내 시선을 유혹했다. 만다라는 원(圓)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만달라(Mandala)' 를 소리대로 번역한 것이다. 본질을 의미하는 '만달(Mandal)' 과 소유를 뜻하는 '라(La)' 가 결합된 말이다. 힌두교에서 생겨났지만 불교 쪽이 더 많이 사용했다. 불가의 수행을 상징하는 만다라는 명상을 통해 수행자가 우주와 합일하고자 하는 깨달음의 안내도다. 세상을 등진 수행자들의 마음상태이기도 했을 것이다.
왓 마하탓 은 대형 불탑을 중앙으로 주변 8개의 아담한 탑이 배치되어 부처의 세계로 갈수 있는 만다라 형상의 재현이었다. 번뇌와 갈등에서 벗어나는 걸 반복하는 만다라 속에서 '나' 에 대한 집착도 자연스럽게 내려놓았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산다는 것은 고단함이고 벗어 던져야 하는 숙명의 짐이었다. 절터에 산재한 체디(불탑)와 비한(법당)의 연결 조합은 신비한 불성을 자극했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다양한 불교 양식이 혼합되어 수코타이의 역사 속에 녹아든 현장이었다.
'왓 사시' 는 아름답고 유연한 자태로 걸어가는 부처를 표현했다. 태국 예술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국제적으로 수많은 탐방객들이 찾는 걸작이다. 옛사람들도 삶에 지쳐있을 때마다 이곳에서 서방정토 극락세계로 향하는 깨달음을 생각했을 것이다. 세월에 스러져 내린 돌기둥과 이끼도 말라버린 불상들이 마음을 흔들었다. 호수는 하늘이 지나는 시간에 맞춰 매순간 황홀한 이상향을 그려내고 있었다.
수코타이는 '붓다의 행복한 새벽'을 의미한다. 최초 의도대로 당대 사람들은 부처가 행한 깨달음을 통해 누구나 피안의 세계를 꿈꿀 수 있도록 동시대인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했을 것이다. 장자의 말처럼 "인생은 잘 놀다 가는 것" 일 텐데 이곳을 걷고 있는 모든 이들이 그런 생을 실천하는지는 의문이다. 불교의 너그러움과 여유를 아는 태국인들은 항상 잔잔한 미소 속에 두 손을 모으고 정겨운 표정들이다.
태국의 세계적인 불교지도자 아잔 차(1918-1992) 스님은 번뇌에 빠진 이들을 조건 없이 건져내주는 현인이었다. 미얀마 태생으로 인도를 거쳐 태국북부 밀림지역에서 참선하고 출가 후 위대한 스승이 되었다. 아잔 차에게도 수코타이는 생전에 자주 찾던 수행지였다. 불가의 과거와 현재의 연결고리를 찾아낸 선승에게 태국인들은 변함없는 존경을 보내고 있다.
아잔 차의 '위빠사나' 수행법은 단순하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다. 아무것도 붙잡지 말고, 심지어 깨달으려고도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집착도 거부도 아닌 중도(中道)를 걸으라고 한다. 세상의 일시적인 일들(무상)은 불만족(고통)스럽다. 자아가 없음(무아)을 알아차리고 모두 놓아버려야 한다. 불교 명상에 관한 그의 간결하고 명쾌한 법문들은 거침이 없다. 선승의 유머와 통찰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수코타이에 머무는 동안 나는 마음속에 아잔 차의 수행법을 떠올리며 만다라를 그렸다. 완전하지 않고 방황했던 과거의 내 흔적들이 모여 현재의 나를 이룬 것이라면 이것은 인생의 영원한 굴레일 것이다. 고요한 사원에서 만난 만다라의 끝 어디쯤에 열반의 세계가 숨겨져 있지 않을까. 침묵 속에 깊이 잠겨있는 수코타이의 모습을 수채화로 마음속에 그려 넣으며 오후의 햇볕을 넉넉하게 떠나보냈다. 금강경의 만트라(기도주문)를 떠올리며 텅 비어서 더 깊어진 과거의 땅을 걷고 또 걸었다.
"아제 아제 바라 아제. 바라승 아제 모지 사바하 "
(가자 가자 건너가자. 저 피안의 세계로 가자)
여러분께 보내드리는 인문칼럼은
베스트셀러
'인문여행자, 도시를 걷다'에
모두 담겨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