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의 파도
그때나 지금이나 희망은 모두의 기원이었다. 일상이 고단했던 사람들과 당대 세계가 그렸을 이상향의 신기원은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지구에 대한 지식이 제한적이었던 시절 탐험은 단순한 용기 이상의 엄청난 도전이었다. 망망대해에서 방향을 잡고 하늘의 별자리에 의지하면서 대양으로 향했던 중세 사람들의 용기에 무한한 존경과 감탄을 보낸다.
대륙의 두 꼭짓점이 있다. 남아메리카 끝단 푼타 아레나스와 함께 아프리카 대륙의 가장 남쪽 땅 희망봉이다. 희망을 담아 떠나고 절망 속에 돌아오던 교차점이었다. 희망봉 눈앞에 펼쳐진 바다는 경계를 분간할 수 없었다. 대서양과 인도양이 혼합된 해변은 세찬 바람으로 바위덩이들만 나도는 거친 지점이었다. 유럽에서 만 킬로미터 거리다.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이곳까지 왔을 500여 년 전 그들의 항로는 이제 역사가 되었다.
'희망봉' 은 남아공 대서양 해변의 바위로 만들어진 곶이다. 포르투갈의 바르톨 디아스가 처음(1492) 발견해 문명세계와 연결시켰다. 5개월 항해 끝에 엄청남 폭풍에 떠밀려 표류하다가 30일 만에 닿은 육지여서 '폭풍의 곶'이 되었다. 죽음과 바꾼 모험이었다. 나중에 대항해 시대를 연 주인공 주앙2세 때 '희망의 곶' 으로 개명되었다.
케이프 타운에서 케이프 곶으로 가는 길은 험했다. 바위해안을 돌아 나오고 경사를 넘고 절벽 모퉁이를 수없이 지나야 하는 인내의 끝단이었다. 케이프타운에서 48킬로미터 거리다. 이곳이 정확하게 아프리카 대륙의 최남단은 아니다. 남아공 상세 지도를 보면 대륙의 최 남서쪽 끝이다. 실제로 최남단은 케이프 곶에서 동남쪽 150킬로 지점의 아굴라스 곶이다.
끓임 없이 불어 닥치는 적도이남 아프리카 남동풍은 신기하게 이곳 케이프 곶을 돌면서 잦아든다. 당연히 극동항로 개척의 중요한 이정표(1488)가 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로 가는 클리퍼(범선) 항로의 중요기착지이기도 했다. 모든 선원들이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신령스러운 지점이었다. 'The Cape' 로 통용된 이유다.
스페인이 레콩키스타(국토회복) 운동으로 800년 만에 무어인들을 몰아내고 이베리아 반도를 통일하면서 영토가 좁아진 포르투갈은 해양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세계사를 장식한 엔히크 왕자가 그 주인공이다. 포르투갈 정부의 지원을 받아 바스코 다 가마는 4척에 170명의 선원을 태우고 리스본의 벨렝 항을 출발(1497) 했다. 희망봉을 거쳐 10개월 만에 인도에 도착해 역사에 남는 신항로를 개척해냈다. 대항해 시대, 식민지 시대, 제국의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남아공은 먼저 식민지 개척에 나선 네덜란드 차지였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얀 리베크는 케이프일대를 식민지화(1652) 하고 아프리칸스어를 만들어 통용했다. 원주민 코이산족의 불행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훗날 나폴레옹 군과 전투를 벌이던 영국군이 이 지역을 접수(1806) 했고 남아공 독립 때까지 지배했다.
남아공 정부와 포르투갈의 인연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리스본 항 벨렝 지구에는 디스카버리 타워 광장이 있다. 엔히크 왕자 시대의 대항해 개척 주인공들을 기리는 곳이다. 이 공원의 동쪽 대리석 광장 공사를 남아공정부가 지원했다. 문명사회로 연결해준 포르투갈 사람들의 은공에 대한 남아공의 보답이었다. 아이러니컬한 인연이다.
희망봉은 인도항로의 수수께끼를 풀어준 당대 유럽의 획기적 사건이었다. 동시대 사람들은 아프리카 남단에 또 다른 대륙이 연결돼 있어 항해로는 인도에 도달할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극동으로 가기 위해 희망봉만큼 보급기지로서 훌륭한 곳은 없었다. 인종차별과 식민지 쟁탈전으로 얼룩진 남아공 역사의 시작이었다.
'희망봉(喜望峯)' 은 희망 곶의 번역오류이거나 중국인들이 쓰던 용어를 일본 지배 하에서 그대로 도입한 데 따른 것이다. 우리 머릿속에는 케이프 곶 보다는 희망봉이 더 익숙하게 남아있다. 87미터 높이의 바위산에 올라 등대를 돌아보고 해변으로 내려갔다. 'Cape of Good Hope'. 이정표는 거센 바람에도 꿋꿋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자연을 거스르는 인간의 오만인지도 모른다. 그 앞에 잠시도 서있기가 어려울 정도로 풍속은 매서웠다. 날아가지 않으려고 이정표의 포스트를 단단히 붙잡고 버텼다.
돌아서서 바다를 향해 가슴을 열고 두 팔을 벌렸다. 오른쪽은 대서양, 왼쪽은 인도양이다. 우현의 유럽 가는 길과 좌현의 인도 아시아 항로가 내 품안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난 대륙의 끝이었다. 인생의 버킷리스트 하나를 지워내는 순간이다. 수에즈운하가 개통되지 전까지 유럽의 모든 선박들은 희망봉 코스가 유일한 항로였다.
최초로 이곳에 도착한 이들이 포르투갈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리스 시대 이미 항해 한 흔적들이 기록물로 남아있다. "고대 페니키아인들이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적도를 넘고 모진 고생 끝에 어느 지점에 당도해보니 태양이 북쪽에 떠있었다". (헤로도토스. <역사>. 기원전 600년). 아랍인들은 훨씬 전부터 이 항로를 알고 있었다는 방증들도 많다. 서양 중심의 역사배우기 허점일수도 있다.
케이프타운으로 돌아오는 길은 바람이 잦아들어 평온했다. 한때 남아공 최대 도시였으나 요하네스버그와 더반에 밀려 지금은 살기 좋다고 소문난 아담한 항구도시로 남았다. 거주자는 백인들이 대부분이고 치안도 좋다. 맑은 공기, 기막힌 자연, 신이 내린 지형 때문에 지구상 마지막 낙원으로 꼽히는 지역이다.
미국 뉴스매체 CNN은 케이프타운을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1등 도시로 선정(2024) 했다. 방콕과 뉴욕, 멜버른, 런던 보다 높은 등급을 주는 이유는 차고 넘친다. 비행기로 20시간을 넘게 날아온 서울(42위) 사람이 케이프타운을 바라보는 시선은 부러움 가득이다. 인위적으로 만들 수 없는 자연 환경이 베스트 도시의 결정적 조건인 셈이다. 도시가, 자연이, 공기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케이프타운이다.
등대에서 구입해 들고 온 케이프 반도의 항공사진은 늘 나의 시선을 정화시켜주는 부적이다. 아프리카 대륙 끝단에서 남쪽으로 뻗어나간 암석 줄기가 먼 신화처럼 다가오곤 한다. 포말을 일으키는 암반지형의 바다 접점, 종착지를 가늠할 수 없는 대양의 물결이 장엄하다. 가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지친 일상의 에너지 처방전이다. 육지가 끝나면 바다로 회귀하는 세상의 이치처럼 생명으로 시작하여 다시 죽음으로 환원해가는 인간계의 반복은 거대한 자연계의 이미테이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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