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히말라야의 카프카

2024-12-17     김경한 대표기자

침묵의 발걸음은 땅거미가 내려올 무렵 나를 히말라야 첫날밤으로 안내했다. 부어오른 발목과 숨이 넘어갈듯 지독한 피로에 타는 갈증까지 앙상블로 내안에서 연주되고 있었다. 새벽부터 쉬지 않고 계곡을 오르면서 한계를 알 수 없었던 지난날들을 생각해 보았다.

역시 시작과 끝이 잡히지 않는다. 루크라(Lukla.에베레스트가 있는 네팔 쿰부지역 중심지) 산중턱 50미터 짧은 오르막 활주로에 곡예사처럼 내려앉은 경비행기에서 배낭을 메고 일어섰을 때부터 이미 침묵은 시작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운명이라고 하는 것이 끓임 없이 진로를 바꿔가는 국지적인 모래폭풍과 비슷하다. 나는 그 폭풍을 피하려고 도망치듯 방향을 바꾼다. 그러면 폭풍도 내 도주로에 맞추듯 방향을 바꾼다. 나는 다시 또 모래폭풍을 피하려고 도주로의 방향을 바꿔버린다. 그러면 폭풍도 다시 나를 향해 방향을 바꾼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마치 날이 새기 전에 죽음의 신과 얼싸안고 불길한 춤을 추듯 그런 일이 되풀이되는 것이 인생이다"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1949-)의 소설을 배경으로 일본배우들이 기획해 세계를 누비고 있는 '해변의 카프카' 한대목이 폐부를 찌르며 다가왔다.

어쩌면 나 또한 이 연극의 주인공인 15살 소년 '다무라 카프카'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저 멀리 만년설이 두텁게 쌓인 히말라야 설산에는 하얗고 고운 눈바람이 운명처럼 세차게 날리고 있었다. '해변의 카프카'는 다양한 주인공의 스토리 끝에 하늘에서 정어리가 수직으로 쏟아지는 장면으로 3시간 연극이 끝나고 내 눈은 촉촉이 젖어있었다. 네팔로 떠나오는 동안 줄곧 카프카는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히말라야

"그 폭풍은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 폭풍은 내 자신이다. 내안에 있는 그 무엇이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모든 걸 체념하고 그 폭풍 속으로 곧장 걸어 들어가 모래가 들어가지 않게 눈과 귀를 꽉 틀어막고 한 걸음 한 걸음 빠져나가는 일뿐이다. 그곳에는 어쩌면 태양도 없고, 달도 없고, 방향도 없고. 어떤 경우에는 제대로 된 시간도 없다. 거기에는 백골을 분쇄해놓은 것 같은 하얗고 고운 모래가 하늘높이 날아다니고 있을 뿐이다."

카트만두에서 동쪽 에베레스트 등정코스로 떠났다. 해발 2800미터 팍딩 고갯길에 까마귀가 날아올랐다. 창공을 수놓는 몇 마리의 군무다. 생명이 말라버린 땅에 그려지는 수채화 같다. 카프카는 체코어로 '까마귀' 다. 들짐승 이름의 대문호 프란츠 카프카(1883-1924)는 청년시절 무라카미 하루키의 정신세계를 흔들어 놓았다.

나에게도 카프카의 소설 '변신'이나 '성(城)', '유형지에서' 등을 통해 받은 영감은 평생을 지배하는 날카로운 언어가 되었다. 모래폭풍 같은 서울을 피해 도망쳤는데 내 도주로를 다시 히말라야 카프카(까마귀)들이 막아섰다. 고산에서 날아오른 까마귀는 질긴 생명의 표본처럼 뚜렷하게 줄을 그으면서 내 시야의 왼쪽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루크라에서 8시간동안 느린 걸음으로 걷고 또 걸어 올랐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니 히말라야 쿰부 지역은 광대한 바다 같았다.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에서 봤던 그 광활한 바다. 600미터 계곡 아래로 흐르는 두드코시 강과 모든 산들이 낮은 화폭에 수평으로 담겨 있었다. 육상의 거친 땅이 장단과 고저가 모두 없어진 채로 비가 내리는 바다 같았다.
 

▲히말라야

나를 도와주기 위해 무거운 짐을 지고 앞서가는 세르파의 발걸음이 애처롭다. 야크와 말, 좁교(야크와 물소의 교배종. 고산적응이 뛰어난 동물), 사람들이 엇갈리며 오가는 차마고도(茶馬古道) 산길은 천년의 비밀을 감추고 있다. 하루 종일 걷는다는 것은 지루해서 미칠 정도로 지속적인 인내의 수행이다. 좁은 산길에 널려 있는 발밑의 돌과 소똥을 구별하는 일이 시간보내기의 전부다. 일종의 참선 같은 작업이다.

그렇게 모두 다 '카르마(산스크리트어로 인연 또는 업(業))' 를 안고 오르고 있다. 세상에 업을 쌓는 것이 사는 것이고 그러다가 죽는 것이다. 이 끝없는 오르막과 내리막을 '시지포스의 신화' 같은 반복으로 버텨내려니 숨이 턱밑까지 차올라 견딜 수가 없다. 끈질긴 고독의 시험장이다.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온 몸의 숨구멍을 열어 심산에 노출시켰다. 지금부터 백년이 흐른 뒤를 생각해본다. 그때쯤이면 나의 일행들, 세르파들, 고산주민들.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지상에서 사라져 먼지나 재가 되어 버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모든 것들이 허무한 환영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바람에 날려 당장이라도 흩어져 버릴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무(無)'로 사라질 텐데 왜 이렇게 필사적으로 올라가고 또 살아가야 되는 것일까.

까마득한 절벽 돌 틈 사이로 석청이 매달려 있는 몬조를 지나고 조살레 체크포인트 계곡을 오르면서 줄곧 생각에 잠겼다. 나는 자유인인가? 현실의 사슬에서 벗어났다는 자유에 대해 의도적으로 생각을 포개어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자유가 어떤 의미인지 나 자신에게 얼른 와 닿지 않았다.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내가 혼자 있다는 사실이다. 고립되어 홀로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에 와있다. 지도의 거친 표시 어느 점 부근에 고독한 탐험가처럼 말이다. 자유인이란 이런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반복된 발걸음에 지쳐 이제는 그 같은 사실조차도 잘 모르겠다.

 

▲히말라야

황량함 속에는 늘 생명이 잉태되어 있다. 모든 것은 화성의 표면처럼 아무런 생명체가 없는 원시에서 출발했다. 히말라야는 찾는 이들에게 그런 반전을 안겨준다. 내 시선으로 담아 들이는 순간 수많은 봉우리들은 팔딱거리는 생명으로 재탄생해 저장되었다.

남체(Namche.에베레스트 중산간 롯지) 오른편으로 손에 잡힐 듯한 아마다블람(Ama Dablam. 6852미터. 어머니의 목걸이 의미)의 자태가 육중하다. 또 다른 꼭짓점 마차푸차레와 스위스 마테호른까지 세계3대 미봉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다블람은 이곳을 떠날 때까지 나를 줄곧 따라 다녔다. 낮에는 조각품 같은 우아함으로 트래킹을 안내하고 밤에는 희미한 흔적으로 저쪽에서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

피로와 고산증세로 롯지에서 잠 못 이루던 이튿날 새벽 창가에 비친 아마다블람 한쪽에 초승달이 걸려 있었다. 달이 다시 생명을 채워가는 때였다. 왼쪽으로 서있는 캉데카(Kangdeka.6783미터. 말안장 모양을 닮은 봉우리) 직벽은 또 다시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고요한 히말라야, 하늘과 대지 사이의 완벽한 구분.
하늘의 청명함과 대지의 고요함이 어우러져,
그 높이에는 우리의 마음이 멈춘다.

강력한 힘과 광대한 지혜를 갖춘
이 산맥은 우리의 존경심을 자아낸다.
그 성큼 걸음으로 우리는 산을 오르고,
그 꼭대기에서 우리는 자유를 느낀다.

히말라야의 아름다움은
우리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 모습은 우리의 상상력을 초월하며,
우리를 놀라게 하고, 감동시킨다.

히말라야는 끝없는 이야기이며,
그 위대함은 영원히 계속된다.

이 산맥은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 숨 쉰다,
그 아름다움은 우리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는다"

-히말라야. 아미트라 카울(Amitrajeet Kaul). 인도 문학가

산은 고독하다. 본질적으로 나와 대화하는 시간이 많다. 제쳐뒀던 명제들이 하나씩 솟아올라 고개를 내민다. 사람들은 누구나 많은 상처를 안고 인생을 살아간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이번 여행을 결심한 것은 내심 히말라야 여신이 지배하는 이 영산에서 마음의 치유를 얻고자 함이 컸다.

역시 진정한 치료는 상처를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 새로운 것들을 끄집어내는 것이겠지. 여기까지 생각하며 눈을 뜬 새벽. 나는 이곳을 다녀간 수많은 이들의 체취가 묻어있는 낡은 침대 위에 생선구이처럼 구겨져 때묻은 이불속에 들어 있었다.

"우리의 삶이란 끄덕끄덕 졸다가 깜빡 깨어나고 다시 끄덕끄덕 조는 것이다".
프랑스의 의사이자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 Lacan.1901-1981)의 진단서다.

인간은 현실이 견딜 수 없어 늘 꿈을 꾼다. 저것만 얻으면 더 이상 소망이 없겠지, 그러나 그것을 얻으면 순간 깨어난다. 그리고 손에 쥔 것이 스르르 미끄러져 없어지는 것을 발견 한다. 텅 빈 손을 참을 수 없어 그들은 다시 꿈을 꾸기 시작한다.

나도 라캉의 진단처럼 그날 아침 히말라야의 남은 길을 재촉하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새벽부터 떠난 길에서 다가올 일상의 미래가 꿈틀거렸다. 매순간 다짐해온 미래는 대개 시간에 날아가 버린 과거가 되어버렸지만. 히말라야에만 서식한다는 미지의 새 '한고조(寒高鳥)'를 상상하며 메마른 설산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둥지 없이 살다가 밤만 되면 내일은 둥지를 지으리 하고, 아침이 되면 햇빛이 빛나는 히말라야 설원에서 놀기 바쁘고. 저녁이면 다시 후회하며 내일의 둥지 짓기를 다짐하고. 시간의 쳇바퀴에 갇혀 끝없이 돌고 도는 한고조의 윤회처럼 길을 나섰다.

 

▲바람에

며칠째 걷다가 오색 '롱다(라마불교의 경전이 적혀있는 깃발)'가 펄럭이는 산모퉁이에 이르렀다.  그 길을 돌아가면 무엇이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늘 가장 좋은 것이 거기에 있다고 믿어 왔다. 그곳을 향해 서두르지 않고 그러나 쉬지도 않고 걸음을 옮겼다. 무산소로 갈수 있는 해발 5천 미터 근처가 나의 종착지였다. 일주일 동안 하루 8시간씩 걷고 오르고 참회했던 시간이다.

이곳으로 떠나올 때 다짐했던 마음처럼 뭔가를 정복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근사하고 경이로운 산의 가장자리에 있는 작은 한 사람이었을뿐, 이 야생의 땅에 머물러야만 나의 본 모습을 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떠나온 길이었다. 하지만 에베레스트 근처의 봉우리들은 나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하산과 함께 모든 것은 돌고 돌아 처음의 출발점으로 운명처럼 되돌려지고 있었다. 그것이 삶이고 인생임을 가르쳐주는 몸짓처럼 태양의 그림자로 나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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