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황소같은 남자 헤밍웨이. 마드리드
남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거친 숨소리, 고통을 이겨내는 불굴의 의지, 뜨거운 가슴, 열정을 따라가는 마초적 행동. 이러한 요건에 모두 부합하는 사나이로 나는 망설임 없이 미국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1899-1961)를 떠올린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스토리, 원시적 사내의 풍모가 가득한 하드라이프 인생은 언제나 나를 흥분 시킨다.
"어떤 사람도 외톨이 섬은 아니라네. 한 사람 한 사람은 대륙의 한 조각이요, 전체의 일부, 어떤 이든 죽으면 내 일부를 도려낸 것처럼 아프다네. 내가 인류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지. 조종(弔鐘)이 울리거든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나 알려 하지 말게나. 그 종은 내 일부가 죽었음을 알리는 거라네"
영국 성공회 신부 '존 던' 이 1624년에 쓴 소네트 'Meditation(명상)' 의 일부다. 역사에 남을 만한 이 멋진 문장은 300년의 세월이 흐른 뒤 헤밍웨이의 소설로 부활했다. 폭력과 전쟁을 그냥 넘기지 못했던 그는 중세도시 론다에서 특파원 자격으로 스페인 내전(1936-1939)을 겪었다. 이때의 고뇌는 세계 문학사에 불후의 명작으로 남았다.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나 (For whom the bell tolls)'는 출간 즉시 50만부가 팔렸다.
론다는 스페인 남부 말라가에서 북서쪽으로 1시간 거리, 해발 800미터 고원 도시다. 협곡과 절벽이 만들어 내는 경치는 숨이 막힌다. 바위산 위에 세워진 도시며 절벽을 연결하는 아슬아슬한 누에보 다리는 현실이 아닌 비현실의 세계였다. 투우의 발상지 론다에서 헤밍웨이는 '오후의 죽음' 이라는 단편소설을 쓰기도 했다.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군으로 참전한 남자 주인공 로버트 조던은 여자 주인공 마리아와 사랑에 빠진다. 조던은 적의 총탄에 맞아 죽어가면서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마리아에게 외친다. "당신 속에는 내가 들어 있어. 이제 당신은 우리 둘을 위해 가는 거야. 우리 둘은 이제 당신 속에서 가는 거야." 이 애절한 문장은 성공회 신부 존 던 이 아내의 죽음을 애도한 시 구절을 연상하게 한다.
스페인 내전은 파시즘, 자유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가 뒤섞인 이데올로기 각축장이었다. 53개국 3만2천명의 젊은이들이 스스로 참전해 스페인 민중을 위해 싸웠다. 이 전쟁에서 헤밍웨이는 어느 이데올로기도 두둔하지 않았다. 어디에 살든 개인은 인류 전체의 한 구성원이라는 존 던의 사상을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의 주제로 관통시켰다.
그는 바위도시 론다에서 목격한 내전의 참상을 마드리드에서 소설로 구상했다.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왜 인류는 크고 작은 전쟁을 피할 수 없는가를 질문했다. 그 속에서 꽃피는 사랑과 이별을 하드보일드 문장으로 그려냈다. 집필하다가 답답하면 마드리드 시내 맥주 집(세르베세리아 알레마나)에 들러 한잔 하거나 레스토랑 '보틴' 에서 저녁식사와 와인을 즐겼다.
마드리드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 소브리노 데 보틴( Sobrino de Botin.1725년 개업) 은 여전했다. 20년 만에 다시 찾은 보틴의 분위기는 변치 않은 옛 친구의 모습 같았다. 100년도 더 되어 보이는 서까래와 바닥 타일 등은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다. 장작화덕에 구운 새끼돼지요리 '코치니오 아사도' 는 3백년을 이어오는 대표 메뉴다. 헤밍웨이가 자주 앉았다는 창가 쪽에 그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문학과 휴머니즘을 사랑하는 이들이 해마다 수없이 보틴을 찾아온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으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 그가 사랑한 와인 '마고' 는 이미 다 팔려나가고 없었다. 프랑스 샤토 와인 중에서도 손꼽히는 마고는 헤밍웨이의 술이었다. 미국으로 돌아가 플로리다 키웨스트로 이사하고 말년에 쿠바에서 지낼 때까지 사랑했던 손녀의 이름을 '마고 헤밍웨이' 로 작명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수년 전 나는 탄자니아 방문 때 킬리만자로 중간 롯지에서 이틀을 보낸 적이 있다. 하늘과 초원을 벗 삼아 암보셀리 국립공원 사파리구역을 4시간동안 횡단했다. 코끼리 울음소리가 들리는 숙소에서 헤밍웨이의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 을 몇 번이나 읽었다. 그가 자신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으뜸으로 꼽는 명작이다. 나를 안내한 마사이 부족 청년에게서 원주민들과 복싱을 하곤 했다는 헤밍웨이의 지나간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아메리카, 유럽, 아프리카, 남미 등 4대륙에 걸쳐 많은 흔적을 남기고 간 작가 헤밍웨이. 시카고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파리를 거쳐 마드리드, 론다, 밀라노, 쿠바에 이르기까지 극적인 여정을 살았다. 20세기 대표 코스모폴리탄으로 기억할만한 행로다. 세월이 갈수록 그의 수많은 작품들은 재평가되고 있다.
헤밍웨이는 인생을 너무 많이 사랑했고 너무 많을 걸 요구했고 결국 모든 것이 닳아 없어지도록 만들어 버렸다. 그렇게 살다 갔지만 생을 과하게 소모했다거나 남용했다고 보는 사람은 없다. 시대의 흐름과 자신의 사고에 충실하게 인생을 즐겼다고 보는 편이 적절한 평가다.
결혼하고 가정을 만든 첫 번째 도시 파리,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부상으로 병원 신세를 졌던 이탈리아 밀라노와 베네치아, 진심으로 사랑했던 스페인 팜플로나와 마드리드, 명예 쿠바인으로 불리기를 원했던 말년의 아바나 해변까지 파란만장한 헤밍웨이 루트는 꺼지지 않는 불꽃의 길이다.
밀라노의 호숫가에서 헤밍웨이는 '무기여 잘 있거라' 를 집필했다. 서쪽 마조레 호수와 중앙의 루가노, 동쪽의 코모는 부자들의 휴양지다. 부상당한 몸이 우선해지자 그는 스페인으로 달려갔다. 지칠 줄 모르는 행동주의 작가였다. 팜플로나 투우 축제는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단골 메뉴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쿠바 아바나의 작은 어촌 '코히마르' 는 마지막 역작 '노인과 바다' 를 낚은 곳이다. 청새치를 잡아 생을 이어가는 노인 산티아고를 불멸의 주인공으로 그려냈다.
해밍웨이의 말처럼 "인생은 물가를 벗어나 먼 바다로 나가는 것. 우리도 언젠가 한 번은 먼 바다로 나가야 할 때가 있다". 84일 동안 바다를 해매이고도 허탕 친 늙은 어부 산티아고는 마침내 목숨을 건 사투 끝에 덩치 큰 청새치 한 마리를 잡아 뱃전에 묶는다. 하지만 인생의 훈장 같은 청새치는 상어들에게 다 뜯겨 뼈만 남은 채 항구에 도착한다. 이때 산티아고의 독백은 눈시울을 뜨겁게 만든다.
"인간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어.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아"
(But man is not made for defeat,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어떻게 한 인간이 이렇게 많은 경험을 하고 이렇게 많은 땅을 주유하며 초인적인 삶을 살 수 있었을까. 그는 62년의 일생동안 30여권의 책을 펴냈다. 소설과 에세이, 논픽션을 썼고 '제5열' 같은 희곡도 창작했다. 소설 10여 편이 할리우드에서 영화로 제작되었고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등 3편은 영원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노인과 바다' 는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안겨주었다.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문체와 빙산이론 같은 소설미학은 최고의 유산이다.
광적인 읽기 몰입, 광적인 쓰기 몰입. 읽으면 쓰게 되고 쓰면 더 읽게 되고 더 읽으면 또 쓰게 되는 아름다운 쳇바퀴에 갇혀 일생을 보냈다.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그리스 터키 전쟁, 스페인 내전, 중일전쟁에 참전했다. 중일전쟁에서 마오저뚱과 공산혁명을 성공시킨 저우언라이를 취재하기도 했다. 전쟁경험은 작품마다 소중한 재료가 되었다.
바다낚시와 투우. 사냥, 복싱 같은 거친 스포츠를 선호했고 음주운전도 그만두지 못했다. 평생 32회의 사고를 당했고 40대부터는 매일 위스키 1리터씩을 마셨다. 초인적인 삶이었다. 4명의 여인과 결혼, 이혼을 반복했고 잠깐씩 스쳐간 이성친구도 적지 않았다. 한 인간이 그렇게 많은 글을 쓰고 그 많은 사랑을 하고 그 많은 책을 읽고 그 많은 나라를 돌아다니고 그 많은 사고를 당하고 그 많은 전쟁터를 쫓아다닐 수 있었는지 상상불가다.
"한 세대가 가고 한 세대가 오건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다. 태양은 다시 뜨고 지며 뜬 곳으로 서둘러 돌아간다. 바람은 남으로 갔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빙빙 돌고 돌아 그 가던 길로 돌아온다. 모든 강은 바다로 흐르지만 바다는 넘치지 않으며 강물이 비롯된 곳으로 돌아간다"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 중에서)
"진정한 작가에게 매 작품은 성취감을 넘어 무언가를 다시 시도하는 새로운 시작이어야 합니다. 작가는 언제나 자신이 이루지 못한 혹은 다른 이들이 시도했으나 실패한 무언가에 도전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면 때때로 큰 행운이 따르는 대성공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연설)
평생 죽음을 쫓아다닌 드라마틱한 인생. 그냥 있어도 오는 죽음을 그는 온몸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 근원을 추적했다. 모든 작품에 죽음의 냄새가 물씬하다. 아버지는 총으로, 여동생 에슐리는 약물과다복용으로 자살했다. 남동생 레스터 권총자살, 아꼈던 손녀딸 마고 헤밍웨이까지 약물복용 자살(1996)로 생을 마감했다. 헤밍웨이도 아이다호 케첨의 집에서 엽총 자살(1961)로 마지막을 선택했다.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
무엇을 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인간의 관심사가 건강과 일, 친구와 술, 침대에서 즐기기 등으로 정의한 헤밍웨이의 자살은 많은 생각을 던져준다. 부끄럼 많고 스스로에게 은둔자였던 셈이다. 총과 낚싯대, 펜으로 온 세상을 황소처럼 유랑한 거인, 소설보다 더 극적인 삶을 살다 간 인간 헤밍웨이는 죽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언제까지나 영생을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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