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LA 게티 센터, 미술관의 꽃

2024-06-26     김경한 대표기자

미술관은 이제 현대 예술의 물리적 중심지다. 문화의 심장부로 도시의 이미지를 바꾸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광대한 미국영토에서 두드러진 양대 미술관으로 사람들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동부의 구겐하임과 서부의 게티를 꼽는다. 캘리포니아의 자랑거리 폴 게티 미술관은 산타모니카 해변이 바라보이는 언덕에 우뚝했다.

옅은 안개처럼 보이는 미스트가 근처 상공을 가르며 느리게 지나가는 아침나절이다. 태평양에서 밀려오는 습기는 아메리카 대륙의 공기와 만나 현기증 나는 시야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바다와 인간의 경계에서 현실과 비현실의 세계를 하나의 화폭에 담아내는 듯한 풍경이다.

미국 최대 석유 재벌이던 장 폴 게티(Jean Paul Getty. 1892~1976)는 다른 영역에선 소문난 구두쇠였지만 미술품은 광적으로 수집했다. 20대 초 이미 막대한 부를 거머쥔 그는 로스앤젤레스(LA)에 게티 빌라와 게티 센터라는 두 개의 건축 보석을 남겼다. 당시 돈으로 건축비만 13억 달러(약 1조 7000억 원)를 투입해 진도 7.5에도 끄떡없는 수장고와 연구소, 전시관을 지었다. 사망 후에도 7억 달러 넘는 유산을 미술관에 기부했다. 소장품과 부동산 모두를 게티 재단에 넘겼다.

게티는 미네소타 출신이지만 부친의 오일사업이 번창해 중간에 캘리포니아로 이사했다. 오클라호마 유전 성공으로 '게티오일(1942)' 이 설립되었고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와 함께 유전개발에 나서 엄청난 부의 주인공이 되었다. 게티가 남긴 말이다. "당신의 돈을 셀 수 있다면 당신은 진정한 부자가 아니다"

 

▲장

게티센터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말리부 해변은 그림 같았다. 석유황제이면서 대단한 수집가 폴 게티는 이 언덕에 영원히 마르지 않을 '감성의 유전'을 지었다. 미술작품 수집을 위한 자신의 열정을 마약 중독자나 알코올 중독자의 중독증세와 비슷하다고 자주 토로하곤 했다.

게티 센터는 누구에게나 무료로 개방된다. 한해 200만 명 이상이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게티 인스티튜트의 자긍심은 대단하다. 세계 최고 수준의 복원 전문가들이 유럽의 명화나 손상된 건축 도면들을 들고 이곳을 방문한다.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게티의 수장고만 무사하다면 인류 역사는 다시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미술에 이어 출판, 음악, 예술 교육 등에서도 게티 센터의 역할은 활발하다.

게티는 전 세계에서 수집한 개인 소장품을 LA에 묻었다. 태평양 연안 퍼시픽 팰리 세이즈에 지어진 게티 빌라, 산타 모니카 산 해발 270m 언덕에 자리 잡은 게티 센터는 쉽게 시도하지 못하는 명작이 되었다. 게티 빌라의 언덕 아래엔 태평양의 거친 파도가 밀려들고 게티 센터 꼭대기에 서면 LA시가지와 주변 산맥이 한눈에 들어온다.

건축가 리처드 마이어가 산 위에 설계한 요새 같은 이곳은 산 아래 주차장에 내려서 트램을 타야 갈 수 있다. 5분 정도 오르면 완벽한 내진설계와 방재 시설로 지어진 웅장한 건축물의 향연이 펼쳐진다.
 

▲로스엔젤레스 게티

미술품 수집광이던 게티는 자신의 집에 갤러리를 열어 소장품을 전시(1954) 했다. 그리고 인근에 고대 건축 양식의 새 미술관을 지었다. 게티 빌라의 시작이다. 1974년 미술관으로 개관했지만 그는 이 미술관을 가보지 못하고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다. 소장품이 늘어나자 게티 재단은 게티 센터(1997)를 지었다. 게티 빌라에는 고대 그리스, 로마, 에트루리아 유물이 전시돼 있고 게티 센터엔 미국과 유럽 근 현대 미술품이 가득 들어차 있다.

두 곳 다 돌아보기에는 하루가 모자란다. 면적만 해도 여의도 이상이다. 게티 빌라는 전망 좋은 야외 레스토랑과 유럽식 호화 정원이 하이라이트다. 게티 센터는 기획전시 외에도 웨스트 파빌리온에 고흐, 렘브란트, 모네 등의 명화들이 모여 있었다. 게티 연구소는 100만 권 의 장서와 200만장의 사진을 소장하고 있다. 주차비를 제외하면 모두 무료다.
 

▲말리부

게티 빌라는 로마시대의 귀족빌라를 그대로 재현한 건축물로 유명하다. 바닷가 빌라 풍경을 그린 고대 프레스코화를 바탕으로 설계되었다. 로마에서 27킬로미터 떨어진 오스티아 해변의 명품 빌라가 모델이었다.

서기 1세기 말에 기록된 '스타티우스(빌라를 방문하고 남긴 시인)' 의 문장에 의하면 로마 귀족들의 빌라는 여러 개의 욕실과 분수, 금도금 천정 모자이크 기둥 등 호화로움을 모두 갖췄다. 은퇴 원로원 귀족들이 당나귀를 타고 사냥을 하거나 낚시를 즐겼다. 장군 플리니우스의 다른 빌라(이탈리아 토스카나 소재)는 당시 최고의 석재인 카라라산 대리석과 귤나무 목재 등으로 지어졌다. 단지 그 빌라에 수로가 연결되지 않은 것을 아쉬움으로 적고 있다.

가이우스 플리니우스는 지금의 이탈리아 코모 출신으로 로마의 해군제독이었다. 베수비오 화산 폭발 당시 현장을 시찰하다가 연기에 질식돼 숨졌다. 그가 100명의 전문가를 동원해 2만 가지 항목을 정리한 '박물지' 에는 천문 지리 인문 과학 문명 등의 자료들이 망라되어 있다. 세계역사상 첫 백과사전인 박물지 37권을 편찬해 콜로세움을 세운 티투스 황제에게 헌정했다. 우리가 인용하는 로마의 모든 스토리는 이 박물지에서 출발한다.

이 가운데 목욕문화가 흥미롭다. 해안이 바라보이는 기막힌 입지에 비싼 돌로 깎아 만든 하우스 대욕장이 있었다. 남녀 각각의 탕이 따로 또는 혼탕으로 만들어졌다. 온탕, 냉탕의 기원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마음껏 먹고 마시고 토하고 씻고 휴식을 즐겼다. 청결이 귀족과 천민을 가르는 기준이 된 시점이다. 로마는 목욕탕 문화로 최 정점에 섰다가 이 때문에 오히려 나락으로 떨어졌다.
 

▲게티빌라

로마의 최고 빌라가 재현되었다는 소식은 세계적인 관심으로 떠올랐다. 캘리포니아 해안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2천 년 전 빌라가 완벽하게 지어졌다. 말리부 해변의 이 건축은 해마다 엄청난 인파가 찾는 성지로 이름을 올렸다. 수많은 소장품이 내걸리고 내 외부는 네로 황제까지 지속되었던 로마제국의 상류층 공간이 현대적 감각으로 재탄생되었다.

천사의 도시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는 게티 덕분에 세계적인 예술도시로서의 명함을 받았다. 영화의 성지 할리우드를 품고 있어서만은 아니다. 미국 전역을 통틀어 가장 많은 미술관과 박물관이 있다. 서부의 심장인 LA는 동부에 비해 미술관이 훨씬 늦게 지어졌지만 다른 주에서 볼 수 없는 예술 생태계가 있다. 로스앤젤레스에만 100개가 넘는 미술관이 있다. 모두 돌아본다면 1년간 여행해도 모자랄 수준이다.

이 지역 부호들의 기부금과 기증으로 설립된 미술관들은 현재의 예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고흐, 세잔, 드가, 마그리트, 마네, 모네, 피카소 등 역사적인 명화는 물론 동시대를 이끌어가는 '지금의 예술' 들이 한데 모여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아시아계 등 수많은 국적의 이민자를 받아들이며 성장한 도시여서일까. LA 예술계가 재창조한 문화의 스펙트럼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 넓고 깊다.
 

▲게티

"돈은 자본이 아니다, 오히려 능력이 자본이다"라고 쓴 요제프 보이스(독일 화가)의 선언문에 동의한다. 이름 없이 명멸한 부호들은 많았다. 모으는 능력보다 쓸 줄 아는 능력이 사후를 좌우한다. 예술을 향한 시각과 혼을 담은 정성이 함께 하면 본질에 도달할 수 있다. 벽돌 한 장, 문장하나, 그 안에 간직된 무늬의 세밀한 호흡까지 오랜 영감이 머무는 숲을 만들어내는 이들의 지혜는 놀랍다.

로마는 전쟁 때 바다에 함대를 댈 수 있는 큰 부자들(클라시쿠스)과 가난해서 용병으로 아들 밖에 줄 수 없는 빈자(포로레타리우스)들이 한데 어울려 살았다. 역사는 그 어느 쪽도 소홀하지 않았다. 클라시쿠스가 이룩한 무대에 포로레타리우스가 합세해 새로운 도시문명을 창조해 냈다.

폴 게티는 런던에서 마지막을 보냈다. LA는 물가가 비싸다고 선택한 결정이었다. 런던 교외 서든 플레이스의 대저택에서 죽음을 예감하고 그는 모든 재산을 차례로 기부했다. 이때 쯤 게티는 분명히 톨스토이의 생각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죽음을 의식할 때만 우리는 내면의 선을 회복한다.
죽음을 의식할 때만 우리는 삶의 본질을 아는 것들에게 눈길을 돌릴 수 있다.
죽음을 의식할 때만 우리는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역사는 다시 현재의 역사가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