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미국 나파밸리, 명품와인 '오퍼스 원'
캘리포니아의 하늘은 청명했다. 샌프란시스코 시내를 벗어나 지나가는 계절을 만났다. 봄은 세상이 감각적인 빛을 되찾는 시간이다. 꽃이 그리웠던 모든 이들에게 굶주린 갈증을 풀어준다. 봄꽃을 찾아 나선 길목의 자연은 어느새 여름 채비로 분주했다. 봄이라 하기엔 조금 늦고 여름이라 하기엔 조금 이른 때다. 샌프란시스코 만에서 북쪽으로 달렸다. 다가왔다가 멀어지는 산타 쿠르즈 산맥의 광활한 풍경들 끝에 기다리던 나파밸리가 있었다. 소설속의 연인처럼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계곡이다.
나파밸리는 미국 와인산업의 심장부다. 버클리를 지나 세인트 헬레나 로드에 들어서자 양편에 수많은 와이너리가 산재해 있었다. 이곳을 오늘날의 와인 순례지로 만든 선구자는 로버트 몬다비(1913-2008)다. 유럽을 제치고 신세계 와인시대를 열어준 주인공이다. 가난한 이탈리아 이민자 아버지 체사레 몬다비를 이어 세계 와인의 성지로 일궈냈다.
그는 스탠포드대 재학시절 양손에 와인을 들고 시음을 권하며 샌프란시스코 시내 식당들을 전전했다. 포도의 세계를 이해하고 가문의 와인을 알리기까지 고단한 세월을 견뎌냈다. 동생 피터와의 갈등 끝에 서로 갈라선 뒤 늦은 나이에 다시 와이너리(1966)를 창립했다. 명품을 향한 그의 집념은 이때부터 빛을 발했다.
로버트 몬다비는 나파와인의 판을 통째로 바꿨다. 온도조절기능이 가능한 스테인레스 스틸 탱크를 처음 도입했고 프랑스에서 비싼 오크통을 들여왔다. 화이트 와인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저온발효를 추진했다. 와이너리 투어를 고안했고 레이블에 포도품종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나사(NASA. 미 우주항공국)의 기상정보를 받아 포도나무 병해충 연구에도 매진했다. 최고를 향한 열정과 집념이 명품 '오퍼스 원(Opus One)' 으로 완성되었다.
나파밸리의 명소 '로버트 몬다비 와이너리'를 한 바퀴 돌아보고 건너편 '오퍼스 원' 으로 자리를 옮겼다. 연분홍색 카라라 산 화강암 정문부터 격조가 넘쳤다. 일직선 진입로 끝 정면의 하우스는 웅장했다. 좌우 사선으로 떨어지는 구조는 건축의 깊이를 더해 주고 있었다. 정원은 꽃이 저지른 기억과 집요한 계절 냄새로 가득했다.
와인을 마시면 꿈을 꾸고 그 꿈은 나를 무의식의 경계로 데려다 주곤 한다. 꿈은 의식과 잠재의식이 섞여있다. 꿈의 부표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면에 반쯤 드리운 채 깃발처럼 흔들린다. 의식과 무의식이 상응하니 밖의 현상을 수용하거나 내부의 정서를 밀어내기도 한다. 외부의 바람소리를 듣는가 하면 내면의 모습을 가끔 독백으로 내보내기도 한다. 꿈속에서 또 다른 꿈을 꾸다가 깨어나면 날아 가버린 꿈 조각들을 붙잡고 허망해 하곤 한다. 술이 약한 나의 와인 마시기 패턴이다.
한 잔을 음미하고 두 번째 잔을 들었다. 술 반, 공기 반 섞어서 이 세상을 마시는 기분이었다.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가 평생 동안 집필했던 '에쎄'(음미하다. '수상록' 으로 번역)의 감정처럼 황홀했다. 지나온 술잔의 시간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격조와 설렘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취기가 오르자 '신비의 혀'로 알려진 와인 애호가 하피즈(14세기. 페르시아 시인)도 내게 말을 걸어왔다.
"오 사랑하는 이여.
와인의 강에 배처럼 생긴 잔을 띄우세요
내게 사향 내음 진한 검붉은 포도주 한 잔을 주구려
돈과 욕망의 냄새 나는 비싼 와인은 필요 없다오
내 비록 취해 쓸모없어 보인다 해도
내게 친절을 베풀어주오
당신의 미소가 내 어두운 가슴을 밝히니까요"
(하피즈. 와인의 강)
왼쪽으로 지나가는 나파밸리의 바람은 들판의 풀들을 일제히 눕혔다. 오른쪽에서 내려오는 소노마 밸리의 바람은 누웠던 들풀들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햇살이 오후로 접어들 때까지 나의 와인놀이는 계속되었다.
로버트 몬다비는 미국와인의 후진성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고심했다. 나파의 새로운 역사를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했다. 마침내 보르도의 샤토 무통 로칠드 소유자 바롱 필립 드 로칠드를 하와이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전격적으로 5대5 지분의 '오퍼스 원 프로젝트' 에 합의했다. 첫 빈티지(1979)가 성공적으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몬다비와 로칠드, 두 패밀리의 와인생산 역사는 오퍼스 원 라벨에 동쪽 서쪽을 바라보는 두 얼굴로 새겨졌다.
로칠드는 와인역사에서 독보적인 인물이다. 1920년 가문의 포도원 샤토 무통 로칠드를 이어받을 때만 해도 2등급에 머물던 품질을 각고의 노력 끝에 1등급으로 올렸다. 엄격한 심사의 벽을 뚫어낸 성과(1973)였다. 이때부터 그는 세계최고의 와인 명가 당주가 되었다.
오퍼스 원은 나파밸리에서 생산되지만 보르도의 기술력과 영혼이 스며있다. '구대륙' 유럽과 '신대륙' 미국의 합작품이기 때문이다. 오퍼스 원 탄생을 계기로 유럽 자본의 신대륙 진출이 줄을 이었다. 보르도 페튀루스로 유명한 무엑스 가문은 나파에서 도미너스를 생산했다. 오퍼스 원에 버금가는 명품이다. 도멘 샹동(나파밸리), 알마비바(칠레) 등이 명가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바카 산맥(Vaca Range) 높은 곳의 세이지 마운틴 빈야드(Sage Mountain Vineyard)는 로버트 몬다비의 아들 마이클 몬다비의 선택이었다. 위대한 와인은 위대한 땅에서 나온다는 강한 믿음을 실천했다. 훌륭한 와이너리는 위치가 좌우한다. 이곳의 토양은 1미터 깊이에 돌이 많은 붉은 화산토로 이뤄져 있다.
에이커 당 수확량이 낮아 포도나무의 활력을 제한한다. 대신 미네랄이 풍부하고 해발고도 500미터로 적정한 기온을 유지한다. 샌프란시스코 만(San Francisco Bay)이 내려다보이는 서쪽과 남쪽으로 이어져 자연의 냉각 효과가 뛰어나다. 와인의 신선함과 생동감을 유지시키는 비결이다.
근처 밸리로 넘어가는 길들은 험했다. 가파른 산을 몇 개씩 지나야 했다. 고갯길 중턱에 차를 세우고 서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지랑이가 너울대는 건너편 산맥이 나그네의 노스탤지어처럼 어른거렸다. 봄꽃이 떠나가면 곧 장미의 시간이 올 것이다.
"할 수 있을 때 장미 꽃봉오리를 따세요, 시간은 쉼 없이 달아나는 것, 오늘 미소 짓고 있는 이 꽃도 내일이면 시들어 버린다네." (로버트 헤릭.17세기 영국 시인)
와인은 수확의 절정, 하강직전에 거둬 술로 담근다. 오래 간직하며 음미하기 위해서다. 아니면 영원히 가지고 싶어서다. 그래서 와인은 유혹과 탐미주의의 대명사다. 일본 교토의 천년 고찰 금각사에 불을 지른 수도승의 심리다. 이 세상에 빛나고 아름다운 것들은 내 가슴속에 혼자 간직하고 싶은 본능이 꿈틀거린다. 타인들이 보지 못하게 불 질러 없애버리고 싶은 탐미의 심정을 이해한다.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이곳의 모든 것들이 나를 탐미주의의 세계로 끌고 가는 중이다.
오퍼스 원의 유명세는 음악의 영역까지 넘어섰다. 팝음악 '네가 가진 것을 보여줘'(Show me what you got) 에서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나아지고 있어, 오퍼스 원처럼 말이야' 는 젊은이들의 감성을 뜨겁게 달궜다. 시간이 흐를수록 맛과 향이 더 농축되고 풍만해지는 가치를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다.
나파를 여행가방에 넣고 대륙을 건너오는 동안 와인영화 한 편을 반복해서 보았다.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 은 몇 번 음미해도 좋은 필름이다. 잔잔한 독립영화 속에 깊은 음악과 울림이 담겨있다. 와인 마니아들의 관심을 끌만한 연출과 탄탄한 구성이 일품이다. 프랑스의 성(샤또)벽을 무너뜨린 미국의 골짜기 와인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음악은 침묵의 잔을 채우는 와인이다. 와인은 병에 담긴 시처럼 격정적이다. 인간이 만든 감정의 상대로 이만한 창조는 없었다. '신은 물을 만들었지만 인간은 와인을 만들었다'는 빅토르 위고의 말은 언제나 가슴을 적신다.
나파에서 반나절을 보내고 몇 개의 고개를 지났다. 소노마밸리도 이미 짓 푸른 녹음의 세계로 진입해 있었다. 삶은 바람처럼 흘러간다. 나는 지금 소노마 밸리에서 막 지나온 시간의 굽이를 뒤돌아봤다. 손에 땀을 쥐며 내려왔던 뒤쪽 산 너머 나파밸리의 풍경들이 아득하다. 거쳐 왔던 인생의 모든 지점들이 그랬을 것이다. 젊은 날로 다시 돌아가고 싶진 않지만 아련한 기억들을 꺼내 음미하는 순간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다.
계곡 아래 지평선으로 내려왔다. 큰 길 양옆으로 이어지는 포도원의 정문 장식들은 어느 먼 마을 오래된 주택들의 문패를 관찰하는 느낌이었다. 몇 개의 와이너리가 지나가면 벌판이고 다시 인간의 손길로 만들어진 포토 밭의 긴 이랑들이 나타나곤 했다. 원시의 자연과 사람들의 공존이다.
로버트 몬다비는 죽음을 앞두고 인생에서 후회스러운 순간들을 되뇌었다. 강철 같던 그의 내면에도 인간의 본능과 회한이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동생 피터와의 결별, 와이너리의 주식상장(2004) 같은 과한 욕심을 후회 한다"고 말하고 타계했다.
와인은 주연으로 시작했다가 술자리가 끝날 무렵 조연이 된다. 다시 함께한 이들의 이야기가 주연이 된다. 찬란한 삶에 스며든 와인은 추억이다. 소울이 느껴지는 우주의 리듬을 목으로 넘기고 그 뒤 울려 퍼지는 다양한 감각은 삶이라는 현실로 발효되어 간다.
로버트 몬다비는 나파밸리의 주연으로 살다가 다시 흙속의 조연으로 돌아갔다. 그가 그토록 연구하고 평생을 들여다본 포도밭의 테루아(토양)로 회귀했다. 나도 오늘 와이너리의 주연이 되었다가 다시 속세의 조연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평원의 마지막은 하늘과 만나고 있었다. 그 접점은 모든 경계선을 무너트려 엷어진 햇살과 함께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적당히 올랐던 한 낮의 취기는 천상과 지평선이 하나 되는 곳으로 멀리 날아가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온 뒤에도 내 머릿속에는 나파밸리의 푸른 에너지가 출렁거렸다. 언젠가 또 다시 이곳을 찾을 때까지 이 아름다운 풍경들은 내안에서 늘 나부끼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