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근혜정부 경제 비화]② '일괄 사표' 강요, 물갈이
상태바
[이명·박근혜정부 경제 비화]② '일괄 사표' 강요, 물갈이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관장 전원 교체 후 친MB 인사들 무더기 '낙하산' 인사
   
▲ MB정부시절, 소망교회(사진) 출신 금융인 모임인 '소금회'가 주목을 받았다.

[컨슈머타임스 윤광원 기자] "연구원을 정부의 'Think Tank(두뇌)'가 아니라 'Mouth Tank(입)' 정도로 생각하는 현 정부에게 연구의 자율성과 독립성은 한갓 사치품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2009년 1월 당시 이동걸 한국금융연구원장이 사표를 던지면서 임직원들에게 남긴 글이다.

그는 왜 임기를 1년6개월이나 남긴 상태에서 사퇴해야 했을까.

◆"코드가 안 맞는다, 다 바꿔"

이명박(MB) 정부는 참여정부에서 임명된 공직자들을 관료와 공공기관 모두 100% 자신들과 가까운 인사로 바꾸려 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부터 MB 주변 인사들은 "코드가 맞지 않는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고 떠들면서 현직 인사들을 압박했다. 자신들이 참여정부 인사를 공격할 때 사용하던 '코드'라는 용어를 똑같이 재탕했다.

당시 금융감독위원회 이승우 부위원장은 "바꿀려면 빨리 바꿀 것이지…하루하루가 바늘방석"이라고 푸념했다.

새 정부 출범으로 퇴진했던 그는 나중에 예금보험공사 사장으로 부활한다.

관료조직 물갈이 인사가 끝나자 다음 차례는 공공기관들이었다. 문제는 각 기관장들마다 임기가 있고, 그 끝나는 시기가 모두 다르다는 것.

MB정권은 이들의 임기만료 때까지 기다려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정부 부처마다 모든 산하 기관장들에게 '일괄 사표'를 받으라는 청와대의 지시가 떨어졌다.

금융위원회에서 이 '악역'을 맡은 것은 임승태 사무처장이었다.

전광우 금융위원장은 순수 민간 출신의 부드러운 스타일이고 이창용 부위원장은 전형적인 학자풍이다. 그래서 정통 재무관료이고 이미지도 강한 임 사무처장이 총대를 멨다.

그는 기관장들에게 뻔질나게 전화를 해 사표 낼 것을 압박했다.

가장 강하게 반발하며 버티던 김창록 한국산업은행 총재(당시엔 산업은행장의 직함이 '총재'였다)도 7월을 넘기지 못했다.

그 공 때문인지, 임 사무처장은 금융위 퇴직 후 '숨은 꿀보직'이라는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을 지냈다.

후임들의 면면을 보자.

민유성 산업은행 총재는 우리금융지주 부회장과 미국 리먼브라더스 서울지점 대표를 지낸 순수 금융인 출신이다. 그만 빼고는 모두 '낙하산' 논란을 부를 수 있는 인물들이다.

진동수 한국수출입은행장은 재정경제부 제2차관을 지냈고, 박대동  예금보험공사 사장은 금감위 출신으로 한나라당 수석전문위원을 역임했다. 이철휘 한국자산관리공사 사장은 재경부 관료 출신이며, 특히 안택수 신용보증기금 이사장은 한나라당 국회의원이었다.

산업은행 민영화로 새로 출범한 한국정책금융공사 사장에는 유재한 한나라당 정책실장이 임명됐다.

총선 낙천에 대한 '구제용'이라는 소문이 돌았던 안택수 이사장은 취임 당시 "낙하산인 건 맞지만,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전문성은 있다"고 강변했다.

이수화 한국예탁결제원 사장(대구), 임주재 한국주택금융공사 사장(안동)은 TK 인맥이고 김윤환 한국금융연수원장은 대통령직인수위 경제1분과 전문위원이었다.

◆정치권 출신 줄줄이 '낙하산' 투하

일괄 사표로 빈 공공기관 최고경영자(CEO) 자리에는 여권 출신이거나 MB와 인연이 있는 비전문가 낙하산들이 무더기로 투하됐다.

전용학 한국조폐공사 사장은 한나라당 전문위원 출신이고 임인배 한국전기안전공사 사장은 15~17대 한나라당 의원을 지냈다. 김신종 한국광물자원공사 사장은 인수위에서 기후변화에너지대책 태스크포스(TF) 위원이었다.

또 최재덕 대한주택공사 사장은 인수위 경제2분과 위원을 역임했고, 이종상 한국토지공사 사장은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이던 시절 서울시 균형발전추진본부장으로 일했다.

허준영 코레일 사장은 경찰청장 출신으로 MB의 모교인 고려대를 나왔고, 박봉규 한국산업단지공단 이사장은 대구시 정무부시장을 지낸 대표적 TK.

엄홍우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은 대선때 MB 진영의 외곽 조직인 '선진국민연대'의 공동 상임의장을 맡았다. 권영건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역시 선진연대 공동 상임의장이었다.

구본홍 YTN 사장, 차용규 OBS 사장, 이몽룡 스카이라이프 사장, 양휘부 한국방송광고공사 사장, 김영만 경남FC 대표, 임연철 국립극장장, 최규철 뉴스통신진흥회 이사장, 정국록 아리랑방송 사장, 임은순 신문유통원장은 대선 당시 MB의 특보 출신들이다.

국립현대미술관장, 문화예술위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자리도 MB 특보출신들에게 돌아갔다.

정연주 사장이 안 물러나고 버티다가 '강제 해임'당한 KBS에는 이병순 '보궐 사장'을 거쳐 MB 대선캠프 출신인 김인규 사장이 취임했다.

김광원 한국마사회장은 포항시장과 15~17대 한나라당 의원이었고, 홍문표 한국농어촌공사 사장은 17대 한나라당 의원이었고 18대 총선에선 낙선했다.

MB 캠프에서 활동한 대학교육협의회 박종렬 사무총장은 교수 출신으로는 처음 사무총장이 됐다.

심지어 국책연구원장 자리도 낙하산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박태주 환경정책평가연구원장은 운하정책환경 자문교수단에서 경부운하 낙동강 분과를 맡아 MB의 '대운하' 대선공약 만들기에 앞장섰고, 김성열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과 김용하 한국보건사회연구원장은 인수위에서 활동했다.

김석준 과학기술정책연구원장은 한나라당 의원 출신.

◆민간 금융계도 친MB 인사 '천지'

공공기관이 아닌 순수 민간 금융계도 '친MB' 인사들이 점령했다.

김승유 하나금융지주 전 회장은 MB의 고려대 경영학과 동기동창이다. 하나금융측은 "동기 숫자가 워낙 많아 군대에 가기 전에는 몰랐는데, 복학 후 알게 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금융계 4대 천왕'으로 불리며 금융계를 쥐락펴락했던 거물이다.

다른 천왕들인 어윤대 KB금융지주 전 회장, 이팔성 우리금융지주 전 회장도 MB의 고려대 동문이고, 강만수 당시 기획재정부 장관은 퇴임 후 산업은행장으로 4대 천왕에 합류했다.

특히 강만수는 MB를 소망교회에서 만나 그가 서울시장이던 시절 서울시정개발연구원장을 지냈고, 이팔성은 같은 시기 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였다.

어윤대의 전임인 황영기 전 회장(경북 영덕)도 MB와 친분이 깊어 코드인사 시비에 휘말린 바 있다.

최원병 전 농협중앙회장은 MB의 모교인 포항 동지상고를 졸업했다.

이주형 전 수협 신용부문 대표(경북고), 배성환 전 예금보험공사 부사장(경북사대부고), 김영기 전 산업은행 부총재(경북 의성) 등은 TK 인맥.

증권계 포함, 제2금융권도 예외가 아니었다.

정부의 입김이 미치는 산업은행의 자회사 대우증권의 김성태 전 사장은 임기도 1년 남았고 실적도 좋았지만 갑자기 교체됐다. 후임은 임기영 전 IBK투자증권 사장인데, MB 캠프 출신이다.

박종수 전 우리투자증권 사장도 임기를 1년 남긴 상태에서 사의를 표명했다. 우투증권은 정부가 대주주인 우리금융지주의 자회사였다. 후임 황성호 전 사장은 TK인 데다, MB의 고려대 경영학과 직속 후배다.

한국증권금융 이선재 전 상무도 고려대 경영학과를 나왔고 MB 캠프에서 경제자문을 맡았다. 그는 외부 인사로는 증권금융 사상 첫 집행상무였다.

이휴원 전 신한금융투자 사장은 포항 동지상고 출신이다.

노치용 전 산은캐피탈 사장은 MB가 현대건설 사장일 때 6년간 비서실장으로 모셨다.

◆'소금회', 최고 권력과 직통 루트?

이 무렵, 소망교회에 다니는 금융인들의 모임인 이른바 '소금회'가 인구에 회자됐다. 정식 명칭은 '소망교회 금융인 선교회'다.

소망교회는 강남구 압구정동에 있는 대형 교회로 MB와 그의 형 이상득(SD) 전 의원이 독실한 신자다. 이 형제도 소금회 모임에 나왔었다. 최고 권력과 직통할 수 있는 루트(?)라는 소문이 돌았다.

소금회는 지난 1996년 홍인기 전 증권거래소 이사장의 주도로 창립됐다. 처음 70~80명으로 출발, 한창 때는 회원이 200여명으로 불어났다.

가장 눈에 띄는 멤버로는 MB와 SD 외에 강만수 전 기재부장관이 있다.

또 이우철 전 금융감독원 수석부원장, 소금회 회장을 지낸 장병구 전 수협신용 대표, 류시열 전 제일은행장, 신복영 전 서울은행장, 장명선 전 외환은행장, 김재실 전 산은캐피탈 사장, 나석환 전 한보철강 사장 등이 있다.

정계 인사로는 이종구 새누리당 의원, 같은 당 김광림 의원, 더불어민주당 최운열 의원과 홍재형 전 의원이 멤버다.

임석 전 솔로몬저축은행 회장, 이두희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 이병화 전 하나대투증권 감사, 이창식 전 우리은행 부행장도 있다.

하지만 소금회 회원들은 이 모임이 정치적 성격을 띄었다거나 MB정부의 '금융인재 풀'인 것처럼 비춰진 것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고 강조한다. 실제 MB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 그와 SD는 소금회 모임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성태의 '처신'과 윤용로의 '처세'

MB정부 초기의 분위기가 이런 상황에서, 노무현 정부에서 금감위 부위원장까지 지냈던 이동걸 금융연구원장이 1999년 1월까지 버틴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당연히 사람들의 관심은 금융계의 대표, 최고 수장인  이성태 당시 한국은행 총재에 쏠릴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산상고 선배다.

2006년 4월에 선임돼 아직 임기가 절반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는 마음을 비우고 의연히 '처신'했다.

기자들과 산행길에 나선 이 총재에게 질문이 쏟아졌다. 자진 사퇴 압력이 안 들어왔느냐고. 이에 그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정권이 바뀌면 사람도 바뀌는 게 당연하다. 미국도 그렇다. 고위 공직자들이 한꺼번에 물갈이된다"

자신도 언제든 나가라면 나가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무런 압박이 없었다. 덕분에 그는 2010년 4월까지 임기를 무사히 채울 수 있었다. 정부가 한은 총재에 사퇴 압력을 넣었다가 한은 독립성 논란을 부른 조순 전 총재의 전례를 의식해서였을까.

여기엔 강만수의 역할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직책상 기재부장관과 한은 총재는 자주 부딪힐 수밖에 없고, 사표 압력이 있었다면 기재부를 통해 들어갔을 것이다.

강만수는 이성태의 강단을 잘 안다. 1997년 외환위기 직전 금융감독기구 통합 찬반 논란으로 정부와 한은이 정면 충돌한 당시 강만수는 재정경제원 차관, 이성태는 한은측 투쟁기구 대표였기 때문.

이성태의 후임에는 MB정부 첫 청와대 경제수석이던 김중수가 임명됐다.

참여정부에서 임명돼 임기를 다 채운 금융계 인사가 또 한명 있다. 바로 윤용로 전 기업은행장이다.

그는 금감위 부위원장까지 지내고 2007년 12월 기업은행장이 될 당시, 사실상 내정 상태였던 '모피아(재무부 마피아)' 선배 진동수를 '처세술(?)'로 제쳤다고 해서 전·현직 관료사회에서 미운 털이 박힌 상태였다.

물론 유임의 명분은 있었다. 기관장이 된 지 얼마 안됐다는 것. 그렇지만 순수하게 그것 뿐이었을까.

그의 처세를 짐작케 하는 일화가 있다.

2009년 어느 날 한 상갓집. 그는 임태희 당시 한나라당 정책위원회 의장과 마주 앉아있었다. 인수위 비서실장을 지낸 임태희는 당시 여권 최고 실세 중 하나였다. 옆자리엔 박재완 당시 청와대 국정기획수석비서관과 김종창 금융감독원장, 민유성 산업은행장이 함께 있었다. 

임태희가 입을 열었다. "지난번 얘기한 여자배구팀 창단 어떻게 됐어?" 당시 대한배구협회장을 겸하고 있던 그가 기업은행에 창단을 요청한 것.

당시 기업은행 입장은 창단 반대였다. 윤용로는 얼버무리면서 빠져나가려 애썼다. 그러나 임태희는 집요하게 계속 압박했다. 기자가 근처에 있다는 것도 깜박 잊은 채…

그 때는 확답 없이 대충 넘어갔지만 기업은행은 곧 국내 배구리그의 타이틀 스폰서가 됐고, 결국 여자배구팀도 창단했다.

윤용로는 기업은행장 이후에도 하나금융지주 부회장과 외환은행장으로 MB정권 내내 잘 나갔다.

◆이정환 "좀비들의 득세는 길지 않다"

이정환 당시 증권선물거래소 이사장도 화제의 인물이었다.

MB정부 출범 초기인 2008년 3월 거래소의 새 이사장 선임절차가 시작됐다. 그러나 MB가 서울시장 시절 발탁한 이팔성 전 서울시향 대표의 '내정설'이 돌면서 거래소는 발칵 뒤집혔다.

노동조합이 낙하산 반대투쟁을 벌였고 이 전 대표는 결국 거래소 이사장직을 포기했다. 그는 대신 우리금융 회장이 됐다.

이정환은 내부 출신(경영지원본부장)으로는 첫 이사장이 됐다. 그것도 쉽지 않았다. MB의 출신학과인 고려대 경영학과 남상구 교수, 전홍렬 전 금감원 부원장과 경쟁했다.

그는 정권에 미운 털이 단단히 박혀 재임중 내내 안팎으로 사퇴 압력에 시달렸다.

마침내 1년 7개월만인 2009년 10월 자진 사퇴했다. "거래소의 공공기관 지정이 해제되면 사임하겠다"고 밝힌 바 있던 그는 '거래소 허가주의' 법안이 국회에 상정되자 '사표를 통해 법안 통과에 도움을 주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지인들에겐 이런 이메일을 남겼다.

"배신, 하극상, 배은망덕 등의 반윤리적인 일들까지 봤고 기회주의자, 영혼도 없는 출세주의자, 때때마다 줄을 바꿔 탄 처세주의자 등 수많은 '좀비'들과 원칙도 철학도 없이 그냥 자신과 맞지 않는다며 덫을 놓고 집요하게 따라다니면서 괴롭히는 '스토커'도 목도했다.

부스러기라도 던져주면 감읍하는 좀비들은 일시적으로 득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머지않아 사멸한다"

이정환은 20대 총선에서 더민주 후보로 '험지'인 부산에서 출마, 여권과 정면대결했지만 관록의 3선 의원 김정훈에게 고배를 마셨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투데이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