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파두'에 흔들리는 영혼들, 리스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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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의 세상이야기] '파두'에 흔들리는 영혼들, 리스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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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문제였다. 리스본 서쪽 대서양은 언제나 미지의 세계였다. 처음엔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갔고 나중엔 기회를 잡으러 세상의 끝으로 간 사람들의 이야기는 늘 슬픈 사연을 품고 있다. 해안마을마다 새겨진 스토리들이 이들의 역사다. 사내들은 물길을 헤치며 전진했고 남겨진 여인들은 기다림이 인생이었다. 바다를 통해 영광과 환희를 얻었지만 동시에 많은 댓가를 치러야 했던 땅이 이베리아 반도의 포르투갈이다.

갖가지 사연을 안고 떠난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마음, 바다에서 돌아오지 않는 이들을 기다리며 만들어진 슬픈 멜로디가 오늘날 세계적으로 알려진 리스본의 '파두(Fado)'다. 파두는 노래라기보다 말 그대로 이들의 '운명'이나 '숙명'이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리워하는 마음. 우리의 한(恨)과 가깝게 닿아있다. 그래서 정서적으로 수평교감이 이뤄지는 이유일 것이다. 포르투갈로 밀려든 브라질 식민지인들과 북아프리카 무어인들의 어두운 뒷골목에서 자라난 선율이다.

항구의 허름한 술집에서 흥얼거리던 파두는 1950년대 걸출한 여가수 아말리아 로드리게스를 통해 세계음악으로 우뚝 섰다. 그녀가 부른 '검은 돛배' 는 쓸쓸함과 애잔함의 결정체다. 프랑스 영화 '과거를 가진 애정'에서 블랙 숄을 두르고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창법으로 부른 이 노래는 포르투갈 음악을 외부세계에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 생전의 전성기시절 아말리아 로드리게스

아말리아 로드리게스(Amalia Redrigues.1920-1999)는 선술집 트럼펫 연주로 끼니를 이어가던 가난한 아버지의 9남매에 섞여 태어났다. 정식 음악공부도 하지 못했지만 19살 때부터 부른 그녀만의 독특한 파두는 고달픈 리스본 하층민들의 인생을 달래주는 찬송가처럼 무섭게 번져 나갔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그녀는 영국과 프랑스 브라질로 진출해 수많은 미디어를 달구면서 세계적인 스타 반열에 올라섰다.

아름다운 리듬, 슬픈 음색의 로드리게스는 생전에 170여곡의 주옥같은 파두를 남겼다. 포르투갈 문학가 사라마구가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던 해(1999)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그해 10월초 이 국민여가수의 장례식은 사흘 동안 포르투갈 국장으로 엄수되었다. 운구행렬에는 그녀의 힛트 곡 "어두운 운명". "잘못된 계산", "슬픈 운명","차가운 햇살", "리스본의 하루"가 쉬지 않고 울려 펴졌다.

리스본에 도착한 날 나는 파두가 절정에 달했던 시절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구시가지를 찾아 나섰다. 대서양과 연결되는 코메르시우 광장은 안쪽으로 작은 골목들을 방사형 선처럼 엮어 쥐고 있었다. 거기에 오래된 호텔(산타 후스타) 로비에서 우연처럼 '검은 돛배'를 만났다. 박수와 앵콜이 이어지면서 중년을 훨씬 넘긴 여가수는 리스본의 2줄 현악기 '기따라'에 맞춰 그 유명한 노래 '비(Chuva)'의 슬픈 멜로디를 허공으로 날려보내고 있었다.

"삶의 평범한 일상들은 그리움이 되지 않아요

인생의 이야기 속에는 살아있는 이들이 있어요

하지만 그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내 그리움은 그 모두를 안고 가지요

우리 삶에, 우리 영혼에 남겨진 흔적들

난 당신이 떠난 그날을 잊지 못합니다

그 추억은 빗방울이 되어 내 창문을 두드립니다"

애간장을 녹이다 못해 오장을 쥐어짜듯 고통을 내뱉는 그녀의 창법은 나를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게 결박했다. 뱉어내는 숨소리 하나하나가 가슴을 아리게 두드리는 듯했다.

▲ 리스본 산타 후스타 클럽에서 파두가수 마르게리아와 함께.

아밀리아가 살았던 집에는 아직도 베란다에 무심한 꽃들이 그대로 걸려있었다. 주인은 떠났지만 그녀의 노래는 남아 계절이 오면 피고 지는 꽃잎으로 세상에 너울거리고 있었다. 한때 우리나라 드라마 삽입곡(1980년대 '사랑과 야망')으로 소개되어 인기를 모았던 파두는 이제 포르투갈 사람들에게도 역사로 석고화 되는 중이다.

아말리아 전성기 시절을 같이하던 100여명의 파두 싱어들이 '리스본 파두 뮤지엄'에 모여 있었다. 바다와 맺어진 운명을 상징하듯 그들은 해변의 낮은 3층짜리 박물관에 자리를 잡고 오가는 이들을 맞이했다. '마리아 세베라', '둘세 폰테스', '크리스티나 블랑코'. 옛 기억들이 아련한 이름들이다.

2층에는 내 청년시절을 적셨던 '베빈다' 의 젊은날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있었다. 그녀가 부른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Ja Esta)'는 노래가 아닌 젊은 날의 진혼곡이었다. 가끔 양희은의 목소리로 베빈다를 추억하는 일은 작은 위안이다. 박물관 설림 20년이면 길지 않은 족적이지만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파두 애호가들의 눈빛은 항상 진지하다. 끓어오르는 파두 선율과 지상에 수직으로 내려 꽂이는 태양이 묘한 칵테일로 감정을 고조시키는 공간이다.

파두 박물관 뒤편 대서양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오후를 보냈다. 건너편 등성이에는 주황색 지붕들이 불규칙한 도형을 이루고 흰색 회벽이 수채화의 마침표를 찍는 듯한 풍경이다. 맥주 한잔을 들고 시인 최형태의 '어느 무명 파두 가수의 노래'를 기억하며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이 잔혹한 세상에서도

인생은 그저 계속될 뿐이라고

조그만 카페에서

저 무명 파두가수 노래를 하네요

절절히 아픈 사연을

그러나 그럴 줄 일찌감치

다 알고 있었다는 듯

그저 무덤덤히 읊조리며

웃기려 들지 않아서 더 웃기는 얘기처럼

슬퍼하지 않아 더 슬픈 사연들처럼

오늘이 그랬듯이 내일도

힘겨운 하루가 기다리고 있지만

그 노래를 듣자니

다시 한번 다짐하게 됩니다

괴로워 말자 살자 살어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이 있다해도

그래요

살면서 어찌 상실이 없겠어요

살면서 어찌 외로움이 없겠어요

살면서 어찌 상처가 없겠어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어쨌든 살자구요 우리

노래하며 춤추며

저 바다의 넘실대는 파도처럼

골목 안 이 작은 카페의

한 소절 노래처럼."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대표기자 justin-7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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