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사랑
상태바
[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사랑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슬로건2.jpg
깨진 파편들을 이어붙인 조선의 막사발이 눈에 들어왔다. 서민들이 물이나 차를 마실 때 또는 국그릇으로 쓰던 물건이다. 고급품도 있었지만 이도자완(井戶茶碗)이 아닌 사발들은 하층민의 애환이 담긴 평범한 생활용품들이다. 족자는 또 어떤가. 새 한마리가 꽃가지 위에서 아래를 보고 있고 또 한 마리는 날아오르는 문양이 솜씨 있게 담겨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보아왔던 익숙한 것들이다. 조선백성들의 손때 묻은 옛 물건들이 '도쿄민예관'을 채우고 있었다.

해군 소장의 아들로 태어나 민예품 수집과 연구에 평생을 바친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 그의 생가는 잔잔한 여름날 오후바람을 타고 먼 기억 속으로 나를 데려갔다. 일본인이면서 조선을 과도하게 사랑했던 한 지성인의 남은 자취가 무겁게 다가왔다. 도쿄제국대 철학과 시절 친구에게 받은 조선도자기 한 점에 온 마음을 빼앗긴 뒤 평생을 조선의 민간공예품에 빠져 살았다. 이를 아는 세대들은 이제 지나가고 있다.

▲ 도쿄 메구로의 일본민예관 전시실에서.
적산가옥 같은 초라한 출입구를 거쳐 들어가면서부터 소박한 '일본민예관' 은 곳곳에 야나기의 자취가 묻어 있었다. 서민 공예품들은 동아시아 역학 관계 속에서 살다간 동시대 사람들의 모습을 마치 타임캡슐 속에 남겨놓은 듯하다. 야나기는 늘 식민지 조선의 불행에 귀를 기울였다. 1921년 처음 경성(서울)을 여행하고 질박한 민예품들에 반해 무려 21번이나 한반도를 방문했다. 조선곳곳을 돌아다니며 민중들의 질박한 물건들을 보물처럼 찾아내고 연구했다.

자신의 생가(도쿄 메구로 서쪽)에 남은 터를 사들여 직접 디자인을 하고 목수일도 도우면서 지어진 전시관은 옛 정서로 기품을 간직하고 있엇다. 전 세계에서 모아온 17000점의 물건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공간이 없어 방치된 수집품은 지하창고 등에 분산 보관중이다. 종류도 다양했다. 가장 많은 도자기류와 염색, 목칠 공예품, 회화, 금속 공예품, 석공예, 목죽 공예품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삐걱거리는 목조계단을 따라 올라간 2층 '조선공예실' 에는 우리의 과거가 고스란히 옮겨져 시간을 잊고 있었다. 부엌이나 뒷마당에서 뒹굴다 사라진 하찮은 물건들이 정갈하게 배치되어 그 시대의 생기를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야나기가 조선에서 모아 온 1600점의 소장품 가운데 월별로 선별해 50여점씩 테마전시를 하고 있었다. 올 여름은 '채색그릇전' 이다. 접시나 사발에 그려진 그림과 독특한 색깔이 멋스럽다. 전시품에 별 다른 설명은 없었다. "감상은 지식이 아닌 자유로운 눈으로 하는 것" 이라는 그의 생전 철학에 따른 것이다.

밖은 여름태양이 대지를 태우는데 색이 있는 채색그릇들의 색조는 하늘의 칼라와 연결되고 있었다. 본관 옆 서관은 야나기가 살았던 집이다. 도치기현에서 이축된 돌 지붕이 특이한 일본식 2층 목조주택이다. 그는 여기서 평생을(72세) 살았다. 거실 공간에는 나무 의자 8점이 전시 중이었다. 근대 수공제품들이다. 모두 그 시대의 장인들의 혼이 깃든 물건들이다.

▲ 도쿄 메구로의 일본민예관 전시실에서.

"조선의 민화는 조용하면서도 평화스럽고 온화하면서도 초조하지 않게 그려졌다. 그래서 만사가 태평하고 자유롭다. 구속받지 아니하기에 또한 두려움도 없다. 동양의 심미를 표현하는 정수다"야나기가 조선의 미를 아낀 이유다.

"민예품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만드는 사람가운데 학식 있는 사람이 적고 그것을 만든 공인들이 의식적으로 어떤 취향을 드러내려는 경우도 없다. 그래서 진정한 민예품이 된 것이다 민예적인 미는 형식의 구속에서 탄생되지 않았다" 뿌리가 뽑힌 채 살아가는 백성들의 물건이니까 생명력이 더 길었을 것이다.

군국주의와 전쟁의 시대를 관통하던 청년철학도의 눈에는 순박한 백성들의 평화나 안정이 마음속의 이상향이었을 것이다. "반항하는 그들보다 억압하는 우리가 더 나쁘다. 어떤 경우든 피를 보는 폭력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압제로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는 것 같은 어리석음을 거듭해서도 안 된다. 그러한 방식으로 참된 평화와 우정이 형성된 적은 일찍이 한 번도 없었으며 그 어디에도 없다. 칼의 힘은 결코 현명한 힘을 낳지 못 한다".

일제가 조선의 광화문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총독부 건물을 지을 때 야나기가 일본 잡지에 기고한 '조선의 벗들에게' 서문이다. 당시 동아일보는 이 내용을 시리즈로 실어 피지배 민중들의 응어리를 풀어내고자 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정의로운 일본이 만들어져야 하고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철학, 그것이 세계의 기본이자 상식이기를 바랬다.

식민지시대가 막을 내린 뒤에도 한국 사람들은 야나기 무네요시의 우정을 잊지 못했다. 우리정부는 뒤늦게 그에게 보관문화훈장을 추서(1984)했다. 식민지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슬픔을 어루만지고자 했던 생전의 마음을 오래 기억하고 싶었던 까닭이리라.

역사는 돌고 돈다. 모진 압제가 끝나고 대한민국 70년이 지났다. 숱한 논쟁 끝에 문제의 총독부(중앙청) 건물이 해체되었다. 사라진 조선의 광화문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그러나 두 나라는 아직 청산되지 않은 기억에 매달려 있다. 여기까지 오는데 100년의 세월이 걸렸는데 다시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광기의 시대에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식민지 지배를 비판했던 한 일본인의 양식을 쉽게 잊을수는 없을것 같다. 상식과 이성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했던 그의 따뜻한 시선이 우리 가슴속에 남아있기 때문에. 민예. 마음. 사람의 삼각고리를 매개로 끝없는 윤회의 세계를 탐구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우리식으로 그냥 부르면 류종열이어서 더욱 정겨운 이름이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대표기자 justin-747@hanmail.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투데이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