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단종유배 700리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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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의 세상이야기] 단종유배 700리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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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령포는 불어난 강물에 포위되어 더욱 외딴섬으로 변해 있었다. 폭염이 지나가는 길목에 나들이 나온 간편한 차림의 피서객들은 그저 즐겁고 시끄럽다. 애달픈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흐르는 동강은 말이 없는데. 소나무로 울창한 숲을 이룬 단종어소(端宗御所)에 들어서니 콧등이 찡해온다. 두 갈래 우람한 거목이 된 관음송은 어린 임금이 가끔 걸터앉아 한숨을 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밀랍으로 만들어진 단종은 어소 사랑방에서 정갈한 사모관대 차림으로 나그네를 맞았다.

오래전부터 벼르던 영월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간간히 뿌리는 빗줄기를 벗 삼아 조금씩 속도를 냈다. 온전히 하루를 잡고 떠났지만 서울에서 영월은 2시간 남짓한 거리였다. 700리길 멀고 먼 유배지가 강을 지르는 다리와 산을 관통한 터널로 연결되어 달리고 말 것도 없는 간격으로 다가와 있는 느낌이다.

1452년 조선왕조 여섯 번째 임금 자리에 오른 단종은 겨우 12살이었다. 요즘 같으면 스마트폰 게임이나 하고 응석을 불릴 나이였다. 위대한 군주 세종의 장손이었고 조선개국이래 최초의 세손(世孫)이었다. 아무도 이 약속된 왕권취임에 시비를 걸 수 없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임금 자리에 오른 지 불과 1년 만에 파란은 시작되었다.

삼촌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을 거세한 계유정란이 일어난 것이다. 이 바람에 어린 단종은 수양에게 강제로 용상을 빼앗기고 상왕으로 물러나야 했다. 할 만큼 하다가 자식에게 왕권을 물려주고 한발 물러나는 자리가 상왕이다. 그래서 백발이 성성하고 풍우가 안면에 가득한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이 대목에 어린군주를 오버랩하려니 그 기구함이 상상불가다.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수양의 못된 행태를 보다 못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이 주축이 되어 단종 복위를 추진했지만 사건이 중간에 탄로나 가담자 전원이 잔혹하게 참살되었다. 역사는 이들을 사육신이라고 부른다. 이 때문에 단종은 상왕을 내놓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유배길에 올라야 했다. 그해 음력 6월22일 창덕궁을 나선 단종은 의금부 도사 왕방연과 중추부사 어득해가 이끄는 군졸 60여명의 호위를 받으며 700리 영월 유배길에 올랐다.

청계천의 영도교를 지나 중랑천과 만나는 뚝섬 근처 살곶이 다리를 건너고 세종의 별장이 있던 화양정을 거쳐 광나루에 닿았다. 이곳에서 배를 타고 원주 흥원창으로 갔다가 다시 걸어서 단강리를 지나고 운악재를 넘고 치악산 싸리치를 돌아 거의 열흘 만에 청령포에 당도했다. 한여름 장마와 폭염에 몸을 맡긴 한 서린 유배길, 정처 없는 어린 군주의 마음은 피를 토하다가 쓰러지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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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쪽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요 앞쪽은 연중 마르지 않는 강줄기가 세차게 흐르는 청령포. 어떻게 이 기막힌 유배지를 찾아냈나 싶을 정도다. 어소는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둘러 쌓여 있었다. 562년 전 역사의 아픈 기억들로 덧칠해진 비운의 언덕에 오르니 반원을 그리며 휘돌아나가는 동강줄기가 훨씬 선명해진다. 땀을 식히고 단종이 산책했다는 뒷 봉우리에 올랐다. 한양을 그리워하며 피눈물을 흘렸을 어린 임금을 떠올렸다. 세월의 두께만큼 점차 엷어져 가고야 마는 인간사의 덧없음에 잠시 상념이 일렁인다. 건너편 포구에는 사람들을 가득 실은 거룻배가 분주히 오가고 하늘은 점점 구름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청령포의 한때는 그나마 다행이었을까. 두 달만에 홍수로 물이 불어나 강줄기가 넘치자 영월읍 영흥리 광풍헌으로 유배처가 옮겨졌다. 그로부터 다시 두 달만에 숙부 금성대군이 연루된 단종복위사건이 발각되고 또 한 차례 피비린내를 뿌렸다.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돼 떠나온 단종은 결국 서인으로 내려앉혀졌다. 그가 사약을 받고 목졸림까지 당하면서 운명한 것은 1457년 음력 10월24일 17살의 나이였다.

물어뜯고 뒷통수 치는 세상, 권세와 자리가 무엇이길래 이토록 음모와 잔꾀가 무성한 역사의 숲을 이어 왔을까.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지, 권력과 출세, 치부와 패거리즘에 진저리가 나면 다시 인간으로 돌아온다는데. 560년을 돌고 돌아온 지금, 그때와 무엇이 달라졌을까. 숨이 막힐 듯한 거대한 갈등의 소용돌이가 이 여름의 끝자락을 물들이고 있다. 가을이 오면 조금씩 내려놓고 모두가 자숙의 독실로 향했으면 싶은 생각으로 단종애사 청령포를 떠났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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