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츠파 정신과 창조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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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츠파 정신과 창조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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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28

 

후츠파 정신과 창조경제

 

 

 

 

방송국 기자로 첫 출발했던 80년대 초반은 아직 재래식 세상이었다. 정신 없이 뛰어다니며 '뉴스거리'를 물어오는 것이 본업이었지만 마감시간에 맞춰 잽싸게 사무실로 돌아와야 하고 그 즉시 원고지에 먹지 두 장을 깔고 토시(와이셔츠 손목부분 보호커버) 끼고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 기사를 편집데스크와 방송부스에 배달해야 1차전이 끝난다. 그런데 마지막 먹지 기사를 받아 든 아나운서는 글씨가 안 보인다고 아우성이다. 손가락 옹이 베기는 것은 둘째고 일단 눌러야 보이니 이런 우라질. 잘 베껴지는 좋은 먹지는 왜 없는 거야.

 

그러는 사이 석장이 한 묶음으로 자동 복사되는 원고지가 등장했다. 특허품이라 조금 비싼 게 흠이지만 당연히 인기 만점. 이 기막힌 보급품을 책상서랍에 몇 뭉치씩 숨겨두는 바람에 어느 날 '장물'을 다 압수당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새내기 수습기자들 데리고 한 잔 기울이며 이런 이야기를 하니 '전설 따라 삼천리' 취급이다. 원고지는 물론 먹지도 본적이 없는 세대들에게 씨알이 먹힐 리가 있나. 노트북은 어디에 두고 그런 짓들을 했을까? 종이에 뭘 써서 돌려가며 읽었다니 그런 세상도 있었나 하는 눈치들이다. 토시 낀 먹지세대 그 '옛날 기자'가 지금 인터넷 미디어에 기사를 쓰고 있다. 그것도 아주 능숙한 솜씨로. 나 자신이 놀라운 적응력에 가끔은 스스로 감동해 하며 산다. 대견스러워서.

우리나라에 인터넷이 널리 퍼진 것은 외환위기 겪으면서니까 1998년쯤부터다. 인류가 6억 명 시대를 거쳐 1998년 60억 인구가 되었고 이제는 그보다 훨씬 많아졌다. 6억 명은 오프라인 세대, 60억 명은 온-오프라인 세대, 60억 이후 지금은 사이버 시대를 살고 있다. 모든 것이 가상공간에서 이뤄진다. 물건사고 게임하고 소식 전하고. 이 세상이 현실인지 가상인지 헷갈려 하며 산다. 때로는 사이버 공간에서 자살도 한다. 가상에서는 끝 없는 창조가 이어진다. 하긴 창조하다 보니 이런 가상공간이 시대를 지배하게 된 것이겠지만.

지난 30년 만에 세상은 몇 번이나 뒤집히고 엎어졌다. 혁명의 영웅시대에서 민주화와 기업의 전성시대로, 스포츠 스타와 과학기술자의 시대로 무대가 바뀌었다. 독재정권과 민주화 인사가 화면에서 사라진 대신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의 프레젠테이션이 톱 뉴스를 차지했다. 대통령보다 재벌총수의 움직임에 더 민감하고 타이거 우즈의 새로운 여자친구가 관심사다. 기술이 빛의 속도로 질주하는 동안 세상은 인터넷이 지배하는 수평적 사회가 되었다. 기존 질서가 사이버에 주도권을 내주고 호모 사피엔스가 호모 디지쿠스로 진화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어떤 전략이 필요할까. 추격인지 아니면 선도 인지의 좌표 설정 말이다.

'따라쟁이' 경제는 이제 선도전으로 대전환 할 때가 되었다. 새 정부가 맥을 짚은 대로 '창조경제' 만이 미래의 비전을 담보할 수 있다. 후츠파(chutzpah) 정신으로 벤처를 되살리고 이를 바탕으로 창조경제를 만들자는 구상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충청도보다 작은 나라에 750만 인구가 몇 억의 아랍권과 세계를 상대로 우뚝 서있는 이스라엘을 본받자는 제안은 분명 일리가 있다. 2차 대전 이후 우리와 이스라엘만이 제대로 나라 꼴을 갖췄다는 공통점 외에도 자원빈국, 안보 불안국이라는 공동의 운명을 지고 가는 처지이니까. 그뿐인가 지독한 교육열, 근면, 영민함은 두 나라만의 공유가치다.

주제넘고 당돌하고 뻔뻔하고 놀라운 용기의 후츠파 정신은 곧 청년 정신이다. 나이와 계급에 관계없이 상대가 누구이든지 간에 당당하게 자기의견을 내세우고 토론을 통해 합리적 결론을 얻는 문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과 혁신을 거듭하며 창업을 도와주는 사회분위기, 형식을 파괴하고 누구나 질문할 권리를 인정하며, 섞이고 섞여서 재창조 해내고 위험을 감수하면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끈기, 실패로부터 배우고 다시 일어서는 문화가 바로 청년 정신이다. 기적의 나라 이스라엘은 이 바탕 위에 심어진 요즈마 펀드로 히브리 창조기업들을 성공시켰다. 벤처 모태펀드로 유명한 요즈마 그룹의 이갈 에를리히 회장이 지난주 여의도 국회 세미나에서 강조한 스토리다.

5천년 탈무드 정신 후츠파를 바탕으로 건국 60년 만에 글로벌 수퍼국가가 된 나라. 전 세계 벤처투자의 35%, 노벨상의 22%, 세계 100대 첨단기술기업 연구소의 75%, 원자력안전, 인터넷 보안, 바이오헬스 융합의 선구자. 그런 벤처기업이 끓임 없이 생겨나는 수수께끼의 나라가 이스라엘이다. 싸이를 월드스타로 만들어준 유튜브도 텔아비브 청년 9명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디지털 시대를 압도하는 30조 원짜리 명품이다. 유대인 칼럼리스트 사울 싱어는 저서 '창업국가' 에서 자국의 두뇌강국 이유를 후츠파 정신에서 찾았다.

모두 찬성한다. 후츠파, 요즈마, 청년국가, 창업경제. 하지만 이스라엘은 장구한 세월을 후츠파 정신으로 살았고 그 결과물로 오늘날과 같은 창조경제가 탄생했다. 박근혜 정부 출범 뒤 힘겨운 한 달이 지나고 이제 겨우 정부가 구성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여기저기서 창조경제 붐이 일고 있다. 엊그제 까지만 해도 녹색성장을 외치던 공무원들이 재빨리 창조경제 합창을 시작했다. 금융까지 창조의 장식이 붙여지고 있다. 청와대의 녹색성장위원회는 온데 간데 없고 그 자리에 창조경제, 행복경제가 간판을 바꿔 달았다. 5년 만에 녹색경제는 끝났고 앞으로 5년 안에 창조경제가 마무리 된다는 것인지 궁금하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바뀌고 그 사람들이 시대정신에 맞게 조직을 끌고 가야 가능한 문제라는 점이다. 그 정부를 움직이는 리더들이 창조적이고 미래지향적이며 참신해야 이른바 창조경제가 꽃 피워지는 것 아닌가. 육사출신 장성들이 요직으로 돌아오고 죄를 심판하던 법조인이 총리를 맡고 영혼을 팔아서라도 줄을 선다는 고시출신 관료들이 다시 전면에 재등장하는 모습으로 창조를 말하면 뭔가 부자연스럽지 않은가. 그래도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마디 덧붙인다면 남들같이 해서는 결코 남처럼 될 수 없다는 점이다. 깨어지지 않으면 깨지는 것이 현실이다. 이 정부에 어떤 금기가 있는지를 둘러보고 고쳐야 지금까지의 추격전이 진정한 창조경제로 바뀔 것이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cs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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