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치민과 이승만
상태바
호치민과 이승만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http://www.cstimes.com
2013.03.04

 

호치민과 이승만

 

 

 

혁명의 불길은 꺼졌다. 하지만 공산당 선언 83주년을 기념하는 분위기로 옛 사이공 시가지는 축하 분위기다. 지난 20년 동안 수 차례 와본 곳이지만 인민의 영웅 호치민 장군의 추모분위기는 아직도 열렬하다. 프랑스, 미국과의 기나긴 전쟁 끝에 얻어낸 통일 베트남. 이제 식민지 해방도 남북대립도 모두 신화가 되었다. 오직 도이모이(개방)정책만이 가난했던 과거의 먼지를 분주히 털어내는 중이다.

스무 살에 식민지 코친차이나를 떠나 두 달 간의 항해 끝에 도착한 파리에서 신세계에 눈을 뜬 청년 호치민(胡志明). 정복자들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파리꼼뮌을 거쳐 모스크바로, 미국으로, 중국으로, 온갖 가시밭길을 마다 않던 그가 1930년 밀입국한 홍콩에서 마침내 베트남 공산당을 창건하면서 인도차이나의 운명은 달라졌다. 그로부터 83년이 지났다.

호치민 장군은 1890년 반 프랑스 저항의 본거지인 고대 왕도 후에 근처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쩌면 우리와 똑같은 유교문명권에서 과거시험과 성리학을 중심으로 형성된 세계관은 그의 혁명시절을 끝까지 관통해낸 이념이었다. 국자감에서 공부한 아버지의 가르침 때문에 항상 유교의 그림자가 따라다녔다. 그러면서도 천 년 동안 중국 영향권을 벗어날 수 없었던 조국의 운명이 다시 프랑스 식민지 압제로 이어지는 현실을 보면서 소년 호치민의 애국심은 불타올랐다.

   
▲ 박물관에 설치된 호치민 동상

당시 베트남 지식인들은 불평등한 지배관계를 끝내고 독립하기 위해 과연 누구의 힘을 빌려야 하는지가 고민거리였다. 일본, 프랑스, 미국을 놓고 저울질 하던 젊은 애국자는 프랑스 행 선박에 몸을 실었다. 파리에서 그는 식민종주국 프랑스의 선진성에 눈을 떴다. 강해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당시 유행하던 파리의 사회주의 추종자들은 왜소한 식민지 청년 호치민에게 호의적이었다. 이들의 도움을 받아 모스크바로 떠났고 그곳에서 코민테른 활동에 몰입하며 내린 선택은 공산주의였다.

30대 초반부터 추적과 탈출이 교차하는 도망자 신분이었지만 늘 여유와 포용으로 동지들을 규합하고 사선을 넘었다. 1차적인 투쟁과 함께 강대국을 설득하는 외교가 최선의 방법임을 함께 체험한 세월들이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독립이 되는 듯 했지만 프랑스와 미군이 지원하는 월남으로 분단돼버린 조국을 합치기 위한 투쟁은 멈출 수가 없었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 그는 다시 하노이에 월맹 정부를 세우고 산악지역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으로 외세와 맞섰다.

혁명가 호치민은 통일을 보지 못하고 팔순을 앞둔 1969년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후세들이 반드시 통일과업을 이뤄달라" 고 유언한 대로 6년 뒤 역사적인 사이공 함락은 성공했고 베트남은 비로소 하나의 국가가 되었다. 사이공에 근무했던 미 대사관의 정보장교 윌리엄 듀이커가 전역 후 30년 동안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써낸 '호치민 평전'은 한 인간의 감동적인 서사시였다. 증오스런 적군의 우두머리에서 존경할만한 혁명가로 바뀌어가는 묘사과정이 흥미롭다. 천 페이지의 방대한 분량은 다소 짐스러웠지만 여행길 내내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다.

호치민 시내. 우리 건설업체들이 완공한 고층 빌딩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전쟁에서 해방된 베트남은 자본주의 노선을 혼합한 개방정책으로 이제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가고 있다. 20세기 가장 비극적인 전쟁의 상처는 아물고 도약이 꿈틀대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 호치민이라는 영웅이 자리 잡고 있다. 호 장군의 이름을 딴 새로운 도시 '호치민'은 세계사의 중심을 향해 힘차게 진군하고 있다.

   
▲ 베트남 공산당 선언 83주년을 기념하는 호치민 시가지 모습과 그의 행적들

같은 시기 또 다른 식민지 조선에는 이승만이 있었다. 서당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서울에서 개화교육을 받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무너져 가는 왕조를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청년시절 옥고를 치른 이승만은 미국 유학 길에 오른다. 프린스턴 대학 박사를 따내고 동부와 서부를 오가며 왕성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암울한 조국을 구하려면 미국이라는 나라의 힘이 필요했을 것이다. 해방을 맞았을 때 그의 나이 일흔 살, 노년의 한가운데로 접어든 뒤였다.

한반도에 통일국가를 세우고 싶었지만 냉전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나마 미국의 지원으로 남한단독 정부를 만드는데 자신의 역량을 모두 쏟아냈다. 최초로 현대국가를 탄생시키고 대통령을 지냈다. 하지만 그는 독재자로 낙인 찍혀 망명지 하와이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몇 해 전 공영방송이 만든 3시간짜리 다큐멘터리를 다시 보았다. 한국정부를 세우고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그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 가슴이 뜨거워지는 역정들이 담겨 있었다. 물론 미완의 친일청산과 권력의 노욕을 나무라지 않을 수 없지만 이 애국자를 우리는 아직도 독립영웅의 자리에 올려놓지 못하고 있다

아시아의 두 식민지에서 호치민과 이승만은 동시대를 살았다. 한 사람은 사회주의를 택했고 한 사람은 자유주의를 택했다. 한 사람은 통일을 이뤄내 국민적 영웅으로 남았고 한 사람은 반 쪽짜리 정부의 수반을 지내다가 죽어서도 독재자의 오명 속에 갇혀있다. 두 사람의 생을 통해 이데올로기의 선택이 운명을 좌우한 역사의 뒷모습을 보았다.

   
 ▲ 호치민 시청 앞 광장 동상 앞에서.
두 사람은 똑같이 유교문화권에서 자랐다. 그러나 각기 다른 이데올로기로 조국을 구하려 했다. 민족자결주의를 외친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독립을 원하는 간절한 편지를 똑 같이 써 보냈다. 돌이켜 보면 그들은 공산주의자나 자유주의자이기 이전에 진정한 민족주의자였다. 어떤 선택이 그 시대의 운명이었는지는 개인의 영역을 벗어나는 문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이만큼 올라왔고 베트남은 우리의 도움을 받아 지금 세계사의 주역으로 차오르고 있다.

요즘 세간에는 이승만이 미국독립운동시절 추종자였던 로디김이라는 어린 여성과 바람을 피우다 하와이 법정에 기소됐었다는 그럴듯한 스토리가 사진과 함께 나돌고 있다. 사실 여부를 놓고 양측의 역사가들이 전면전을 벌이고 있다. 존중하고 싶은 사람과 끌어내리고 싶은 사람들의 이중성 속에 알고 보는 역사, 모르고 보는 역사가 혼전 중이다. 언제쯤 이런 논쟁이 끝날까.

호치민 박물관을 나와 사이공 강변에 섰다. 호(胡) 주석은 영웅이다 못해 신격화된 위치에서 넘치는 존경을 받는데 이(李)박사는 아직도 대다수 국민들에게 잊혀져 가는 독재자다. 한쪽은 넘쳐서 거슬리고 한쪽은 모자라서 아쉽다. 아시아의 두 민족주의자를 보면서 우리는 어떤 벽을 넘어서야 하는지 머리가 혼란스럽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cstimes.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투데이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