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재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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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재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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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8

 

어떤 재판관

 

 

 

그는 지하철을 타고 출근했다. 나라에서 준 관용차를 마다하고 서민들과 함께 걸어서 일터로 가기를 고집했다. 때로는 노선버스를 타기도 했다. 가끔 사무실에서 도시락과 함께 판결문을 썼다. 93년 첫 재산 공개 때 6400만원을 신고했고 판사 생활 30년을 청산하면서 전 재산 7000만 원에 만족했다. 모든 법관 중 꼴찌다. 전별금은 도서관에 희사하고 다음 근무지로 조용히 떠났다. 대법관 신분에 비서관도 물리치고 원룸자취방에서 지냈다. 사람들은 그를 '딸깍발이 판사'로 불렀다.

그 재판관이 퇴직했다. 남들은 법원을 떠나기 전에 이미 거금을 받고 유명 로펌의 변호사 자리를 봐두는 것이 관행이지만 그는 금전으로 몸값을 판단하는 자리는 한사코 거부했다. 대신 후학들을 가르치는 선생의 길을 선택했다. 그것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서울의 명문대학이 아닌 지방대학에 조용히 둥지를 틀었다. 많지 않은 교수 봉급으로 안빈낙도하며 다음 세대들에게 법과 정의를 설파하기에 여념이 없다.

세상 사람들은 그에게 재상을 맡아 달라, 최고 재판소장에 와달라고 러브콜을 보냈지만 한번 정한 그의 신념은 요지부동이었다. 여러 차례 이런 저런 자리를 제안하는 이들에게 제발 자신을 더 괴롭히지 말아 달라고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죄를 심판하는 자리에서 가능하면 기름기를 빼야 평민의 눈으로 옳은 판단을 할 수 있어서였을까. 법전을 뒤적이고 사색하고 판결을 고민하는 구도자의 삶을 사는 모습에 백성들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 황금에 물든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선비를 보는 것 같아 머리가 다 신선해 진다. 조무제 전 대법관 스토리다.

또 다른 재판관이 있었다. 가능하면 공익보다는 자신이 편하고 이익이 되는 편에 서서 이 자리를 즐기려 했던 흔적 때문에 지금 밤잠을 설치고 있다. 고위 공직자가 앞장서야 할 승용차 홀짝제가 불편하다고 자동차를 2대 배정받아 편하게 타고 다녔다. 법인카드로 주말 집 근처에서 거나한 반주와 식사를 즐겼다. 학위 논문은 적당히 베껴 쓰고 직원들은 하인부리 듯 험하게 다뤘다. 해외 출장 때는 반드시 부인을 데리고 나갔고 업무가 끝나면 며칠씩 더 즐기고 왔다.

말썽이 나자 그는 '관례대로 행동했을 뿐' 위법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해명하고 있다. 아들의 재산증여도, 각종 수당을 더 타내려고 꼼수를 부린 것도, 투명하지 못한 그 동안의 처신도 다 관례대로 했다는 것인지 아리송하다. 그런데 결정타는 법원노조의 설문조사였다. 후배법관과 직원들을 대상으로 물어봤더니 90%가 그에게 더 높은 관직을 주는 것은 안 된다고 답했다. 참으로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들지 못할 일이다. 누구라고 지칭하지 않아도 알만한 인물이다.

중국 고대 전국시대 말 굴원(屈原)의 이야기다. 초나라 왕족의 후예였던 그는 뛰어난 학식으로 희왕의 신임을 받아 26세에 나라의 정사를 주관하는 좌도에 오른다. 당시 합종연횡의 대세 속에서 강국인 진나라와의 연합을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가 모함을 받아 유배되었다. 강남으로 쫓겨나 초췌한 몰골로 호숫가를 거닐고 있는데 어부가 유배된 이유를 묻는다. 굴원의 답변이 엉뚱하다.

"세상 사람들이 죄다 부패했는데 자기 혼자만 맑은 정신이어서 추방당했고 세상 사람들이 죄다 술에 취해 있는데 자기 혼자만 멀쩡한 상태여서 유배되었다"는 것이었다. 어부는 굴원의 처세를 비꼬고 싶었다. 성인은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세사(世事)의 변화와 추이(推移)에 능히 어울릴 수 있어야 함을 나무라고 싶었지만 화를 당할지 몰라 꾹 참았다. 굴원을 내려주고 뭍을 떠난 어부는 강 가운데에서 노를 올려놓고 한 수 읊는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어찌 그대는 세상의 이치를 거스르는가". 어부는 굴원의 시야에서 점차 멀어져 갔다.

사람들의 버림을 받은 굴원은 동정호 남쪽을 방황하다가 기원전 295년 5월5일 멱라수에 돌을 안고 투신자살 했다. 굴원과 어부의 대화는 시경(詩徑)의 '초사장구 17편' 에 전해져 내려온다. 중국에서는 지금도 단오절인 이날을 굴원의 추모일로 기념한다.

굴원의 소신과는 반대로 세상이 모두 맑은 정신인데 자신만 술에 취해 사는 재판관이 있었던 셈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멀쩡한데 자신만이 부패한 인생을 즐기고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창랑(滄浪)에 물이 맑은데도 발을 담그고 갓끈은 때가 묻어 꼬질꼬질해 질 때까지 한 번도 닦지 않고 살았다. 그에게 수신제가와 치국평천하의 의미를 되새겨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러고도 백성들이 내보내는 원성의 이유를 모른다면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청빈법관'과 '사익법관' 사이에서 인품을 논하는 것은 다시 창랑에 발을 담그는 격이어서 각설한다. 법(法)은 물 흐르듯 맑고 유연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법가(法家)는 청렴의 표상이었고 수많은 후학들이 닮고 싶어 하는 고매한 인품의 소유자가 많았다. 세상이 아무리 변했다 할지라도 아직 우리는 그런 선비 같은 법관들을 바라보면서 팍팍한 세상에 희망을 걸고 간다. '정의가 살아있는 마지막 보루'로 재판관이 칭송되는 이유다.

추상같은 판결에 앞서 나를 정제하고,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수신하는 모습의 가지런함이 필요할진데 착하게 살고 있는 멀쩡한 세상 사람들 속에서 자기 혼자 취한 인생을 살았다면 조용히 반성하고 낙향해 초야에 묻힐 일이다. 세상의 인심이 이러한데도 임명권자인 나라님이 되돌리기를 주저하거나 그 장본인이 자기 입이라도 함부로 이말 저 말을 뿌리고 다닌다면 이는 아집이요 권력의 독선이다. 또 하나 수명을 다해가는 이 정권은 어쩌면 처음과 끝을 똑같이 인사실패로 장식하는지 신기한 일이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cs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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