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판에 구겨진 성적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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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판에 구겨진 성적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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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0

 

정치판에 구겨진 성적표

 

 

 

 

250억 달러 수출 탑을 받아 든 그의 눈이 촉촉이 젖어 들었다. 1983년 2억 달러 수출 이후 2000년 100억 달러, 2008년 150억 달러, 2011년 200억 달러에 이어 올해 254억 달러어치를 수출해냈다. 30년 만에 120배를 넘는 신기록을 세운 것이다. 한해 250억 달러 수출을 달성한 기업은 역사상 삼성전자 이후 두 번째다. 40년 동안 한눈 팔지 않고 정유사업에 올인 해 오늘의 GS 칼텍스를 일궈낸 허동수 회장 이야기다. 모두가 안 된다고 할 때 그는 온갖 자금을 끌어다가 무려 5조원을 투자했고 아무도 가지 않는 길에서 결국 엄청난 대어를 낚아 올렸다. 소문난 정유 전문가 '미스터 오일'의 인간적 승리이기도 하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정유산업이 수출 품목 1등에 올랐다는 것은 실로 기적이다. 자동차도 전자도 아닌 석유제품이 한국 무역을 끌고 나가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정유업계의 선전으로 이 분야 수출은 517억 달러. 전체 수출에서 10.3%를 차지했다. 반도체(461억 달러), 일반기계(440억 달러), 자동차(430억 달러)를 제치고 당당히 수위에 등극했다. 해외에서 원유를 들여다가 휘발유 등유 윤활유 등으로 분해한 제품을 다시 역수출한 성과다.

2008년 금융위기 때 정유사들은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국내 소비시장만 가지고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대안을 찾던 업계는 그 동안 투자를 망설이던 '고도화 설비'에 과감하게 배팅했다. '지상유전'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이 공법은 값싼 벙커C유에서 휘발유같이 돈 되는 경질유를 뽑아내는 기술이다. 현금이 빠듯한 투자형편에 11조원을 쏟아 부었다. 규모의 경제를 통한 가격경쟁력이 해외시장에서 통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예상은 적중했다.

이 바람에 SK이노베이션 울산공장은 세계2위, GS 칼텍스 여수공장은 세계 3위, 에쓰오일 온산공장은 세계 7위의 생산능력을 갖췄다. 전 세계 정유제품 생산 'TOP 10' 에 우리나라 회사가 3개나 명함을 올렸다. 현대 오일뱅크도 80억 달러어치를 수출했다. 정유산업의 파격질주에 힘입어 올해 무역은 2년 연속 1조 달러를 이뤄냈다. 이탈리아를 제치고 글로벌 8대 무역국으로 자리매김했다.

세상을 요란하게 장식했던 스마트폰이나 자동차만 주력 수출품으로 알았는데 고향을 지키는 구부러지고 작은 소나무처럼 정유업이 새로운 효자로 떠올랐다. 지난해 기름 값 고공행진의 주범으로 몰려 정유사들이 자기 배만 채운다는 비난 속에서도 이들은 묵묵히 제품 수출에만 매달렸다. 지식경제부 장관까지 나서서 휘발유 소비자 가격 산정표를 가져오라며 주리를 틀 때 섭섭함이 목까지 차 올랐을 것이다. 내수로 편하게 돈 벌어 치부한다는 누명을 벗기 위해 더 이를 악물었을 것이다.

길은 어디에나 있다. 다만 찾지 못할 뿐이다. 우리보다 소득이 높은 중동의 산유국들은 치열하게 살지 않는다. 그래서 극적인 성공도 없다. 세계 3대 원유수출국인 베네수엘라에서는 석유가 '악마의 배설물'로 통한다. 오일머니로 쉽게 번 돈 때문에 누구도 기술개발이나 수출고민에 나서지 않기 때문이다. 독재자는 부자일지 몰라도 시민들은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가난해진다. 자원부국의 저주다. 척박한 현실을 뚫고 나가야 한다는 오기와 열망은 자원빈국이어서 가능했다는 역설이 성립되는 대목이다.

문제는 모두가 개방정신으로 뭉쳐 함께 힘을 합쳐 나가는 것이다. 세계가 놀라는 무역 1조 달러 2년 연속 달성. 이쯤 되면 국민축제거리다. 한 바탕 잔치판을 벌일 만하다. 하지만 화려한 실적이 무색하리만큼 조촐한 시상식이 전부였다. 이미 미디어에서 잊혀진 대통령 얼굴만 잠깐 스쳐갔다. 대선에 파묻혀 무역성적표는 안주거리에도 오르지 못하는 분위기다. 주요 대선 후보들이 무역의 날 행사장에 맨 먼저 달려가 수출역군들과 기쁨을 나누고 만세라도 불러야 또 힘이 나서 내달릴 텐데. 연예인들의 잠꼬대 버릇까지 보여주며 온갖 잡담으로 세월을 보내는 TV 중계는 언감생심. 이래가지고야 중진국 졸업장이나 제대로 따낼 지 걱정이다.

그러면서 대선판이 쏟아내는 복지공약은 벌써 몇 백 조원을 헤아린다. 누가 벌어서 어떻게 먹여 살리겠다는 건지 모를 일이다. 어차피 대중들은 빨리 잊어버리고 쉽게 지치니까 집권만 하면 그만일 수도 있다. "경제는 그냥 놔둬도 저절로 굴러가니 상관할 바 아니다" 가 정답인 듯도 하고. 기업들에게 적당하게 주먹질하고 걷힌 세금으로 눈치껏 선심이나 쓰자는 심리일까. 복지국가로 가려면 나눠줄 것이 있어야 하고 지금까지처럼 수출로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데 그저 나눠주겠다는 의견만 난무하고 어떻게 벌겠다는 해법은 내놓지 않는다.

며칠 전 김동길 원로교수를 만났다. 팔순 중반도 넘은 그는 이제 지팡이에 의존해야 움직일 수 있지만 아직도 생각과 언변은 예전 그대로다. 고향이 이북이라 빈대떡과 막 빚어낸 평양냉면 한 그릇을 대접받았다. 대학교수에 국회의원까지 경험했으니 이번 대선을 어떻게 보느냐고 물어보았다. 대답이 걸작이다. "우리는 저력이 있는 나라예요. 지난 60년 현대사에서 그 많은 위기와 고비가 있었지만 잘 이겨왔잖아요. 이번에도 잘 될 겁니다" "아니 누가 당선되고 어떻게 잘된다는 말씀이신가요?" "허허- 걱정 마세요. 나쁘게야 되겠어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냥 놔두면 다 잘 됩니다. 될 대로 되는 거지요"

국민들이 정치 걱정하지 않고 정치가 국민을 걱정하는 시절은 언제쯤 가능할 것인가.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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