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양명학의 뿌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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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양명학의 뿌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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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29

 

강화도 양명학의 뿌리를 찾아서

 

 

 

 

10월의 석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김포를 거쳐 초지대교를 지나자 강화도 어귀에는 고구마를 캐는 분주한 일손들이 가을걷이에 한창이다. 넝쿨을 걷어내고 움직이는 호미질마다 씨알 굵은 고구마가 엮여 나온다. 밭 가장자리 작은 마을 앞에는 잎을 떨군 감나무 가지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늘어져 가는 햇살을 붙잡고 있다. 다이어트에 효능이 있다는 소문이 돌고부터 강화도 고구마는 전국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다.

단군의 첨성단부터 고인돌 신화에, 고려시대 몽고군 침입 때는 항몽 38년 임시수도로, 조선말에는 강화도의 개화전쟁까지 숱한 사연을 안고 버텨온 긴 섬이 말없이 낙조 속으로 스러지고 있었다. 한반도 역사와 운명을 같이하면서 애욕을 겪은 국토의 서쪽 어깨. 석양에 걸린 햇빛은 태양의 신 헬리오스를 연상하게 한다. 서해의 수평선 아래로 내려가면 또 내일의 태양으로 떠오르기 위해 열심히 동쪽으로 달려간다는 헬리오스. 우리에게 그런 믿음을 주기 위해 어둠을 가르고 다시 일출의 씨앗을 일구는 이는 누구인지 그 선지자를 찾아 이 강화도를 찾아온 듯한 느낌으로.

강화도의 서쪽 끝 하일리(霞逸里)는 저녁노을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다. 하늘과 땅이 포개지면서 마침내 구김살 하나 없이 완전하게 어둠이 되고 낮이 된다. 하곡(霞谷) 정재두(鄭齋斗 1649-1736) 선생은 조선시대 숙종 말년 홀연히 서울을 떠나 강화도 진강산 남쪽 기슭 이곳 하일리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발걸음으로 꼬박 이틀이 걸리는 거리다. 떨어지고 솟아오르는 태양의 이치를 몸으로 체득하며 이풍진 세상을 참아냈던 양명학의 거두 정재두 선생. 그를 따라 원교 이광사, 연려실 이긍익, 식천 신작, 영재 이건창 등 학자 문인들이 강화도에서 국학의 탁월한 업적을 이뤄냈다.

오래전부터 이건창의 강화도 학문세계에 호기심이 남아있던 터에 10월을 넘기지 말고 한번 다녀오리라 마음먹고 나선 길이었다. 양명학은 명나라 왕양명(왕수인)이 주창한 유학의 계파로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 아닌 이기일원론이 핵심이다. 마음과 사물이 서로 상대적 관계가 아니고 마음과 사물이 하나로 작용하는 천지만물일체설로 기존 성리학과 선을 그었다. 백성들의 삶이야 어찌되었건 날마다 공자왈 맹자왈로 세월을 보내는 조선 지식사회에 비수를 꽂은 것이었다. 지식이 선행하고 실천이 뒤따른다는 성리학에 맞서 지식과 행동이 함께 해야 한다는 양명학은 섞일 수 없는 불순한 학문이었다.

출세지향의 성리학 주류사회를 등지고 나선 이들의 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하지만 지행합일을 신봉하는 지식인들은 강화도에 둥지를 틀고 성리학을 배척하는 강화학파로 끈질긴 명맥을 이어갔다. 갑오경장 때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이건창과 그의 아우 이건승이 후기 학풍을 유지하면서 식민지 시대에는 일본지배세력에 단호히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험난한 세월 속에서 위당 정인보 등이 가세했고 그 바람에 일제치하에서 모든 것이 망가졌지만 국학의 전통만은 강화도를 무대로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간직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지식인들의 산실이었던 강화도의 모습은 병인양요 때 규장각을 약탈해간 프랑스 해군 장교의 고백에서 잘 나타나 있다.

"조선이라는 먼 나라에서 우리가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아주 가난한 사람들의 집에도 책이 있다는 사실이며 이는 선진국이라고 자부하는 프랑스의 자존심을 겸연쩍게 만든다".

봉건적 신분질서와 중세의 사회의식을 완전히 뛰어넘지는 못했지만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자세를 준엄하게 지키며 인간의 문제와 민족의 과제를 가장 실천적으로 고민하던 강화학파의 명맥은 우리역사에서도 드문 일이었다.

"곤륜산을 타고 흘러내린 차가운 물사태(沙汰)가 사막 한가운데인 염택(鹽澤)에서 지하로 자취를 감추고 또 지하로 잠류하기를 몇 천리, 청해에 이르러 그 모습을 다시 지표로 드러내어 장장 8800리 황하를 이룬다".

해방직후 연희전문에서 있었던 백범 김구선생과 임정요인들의 환영회에서 정인보 선생이 소개한 한나라 장건(張騫)의 시는 강화학파를 기억하는 후학들에게 감동으로 전해져 온다. 이들이 강화를 무대로 고통을 참고 학문에 정진했던 것은 황하의 오랜 잠류를 견딜 수 있는 굳은 신념과 일몰에서 일출을 읽어내는 열린 정신으로 지식인의 삶을 실천하고자 했음이리라

또 한 사람 죽산 조봉암 선생. 강화도에서 태어나 강화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강화군청 고용원 1년을 지낸 뒤 일본직원과 싸우고 쫓겨나 21살 때 강화도 3.1운동 만세사건으로 1년 옥살이를 한다. 그 후 일본 유학 길에 올라 사상을 무장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뒤 해방정국에서 초대 농림부 장관, 이승만과 대등한 대선 후보경쟁을 벌이지만 공산주의자로 몰려 억울한 사형을 당한 한국 진보당의 선구자. 이 고장의 기백을 상징하던 조봉암 또한 강화학파의 맥을 잇는 인물로 통한다.

병인양요를 맞아 이시원이 자결한 곳이 이 섬이고 매천 황현이 한일합방의 치욕을 못 견뎌 목숨을 끊은 곳도 이곳 강화도다. 한 시대의 사상을 짊어지거나 때로는 나라의 치욕을 대신 몸으로 표현한 그들의 헌신과 대의명분은 험난하고 고달픈 세월을 견디어내는 힘이었다. 그 땅에 묻혀있는 이들의 묘지와 유적들은 적막했다. 이정표 하나 변변하게 정돈되지 않은 채 역사 속으로 묻혀져 가고 있었다. 한데 밤이 되자 러브호텔과 펜션의 오색 간판들이 여기저기서 솟아 올랐다. 먹고 취하는 후손들의 태평성대가 이 시대 강화도의 풍경인가 싶다.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던 곳에서 인간의 쾌락을 찾는 땅이 된 섬.

전국체전 때마다 성화를 붙여 내려오는 마니산의 도토리나무는 지금도 강화 벌판을 내려다보면서 풍년이 들면 적게 열리고 흉년이 들면 많이 열린다고 한다. 가난했지만 정신만은 올곧았던 선인들의 곤궁한 생계를 걱정하여 부족함을 메워주려는 자연의 보살핌으로 전해져 온다. 입이 궁했던 세월을 무던히 견디며 왔는데 입은 미어 터지나 머리와 가슴은 더 가난해진 시대로 접어든 느낌이다.

옅은 안개가 피어 오르는 강화도의 새벽 산책길에서 바다를 보았다. 갯벌과 바위산으로 이어지는 해안선을 따라 점점 퍼져가는 가을기운이 왕성하다. 서해로 향한 시선을 거둬들이면서 문득 이 섬의 신화를 들려주던 소설가 이윤기의 말이 떠올랐다. "그저 자신들의 입신양명에만 눈이 먼 정치꾼들의 수많은 구호와 주장들이 똥 덩어리처럼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이 세월이 무상하다"고 일갈했던 그도 이미 고인이다. 양명학으로부터 250년 동안 지식의 전당이었던 강화도에서 다시 초지대교를 건너자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가득 찬 육지가 나를 맞았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cs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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