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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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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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28

 

이승만 다시보기

 

 

 

항일 독립 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초대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1948년 건국직후부터 대마도가 한국 땅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49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대일 배상요구를 언급하며 "대마도만은 별개로 취급되어야 할 것이다. 대마도가 우리의 섬이라는 것은 더 말 할 것도 없거니와 350년 전 일본인들이 그 섬을 침입했을 때 조선은 민병을 일으켜 일인과 싸웠다. 그 역사적 증거를 기념하기 위해 도민들이 대마도의 여러 곳에 세웠던 기념비를 뽑아다가 도쿄박물관에 둔 것만으로도 넉넉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이 비석도 찾아볼 생각이다"라고 강조했다. 포츠담 선언은 일본이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도록 했기 때문에 1870년대에 대마도를 불법적으로 삼킨 일본은 마땅히 이를 돌려주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일본인들이 이 사실을 되새기면 어떤 표정들일까. 거칠어지는 한일관계의 파도를 타고 최근 '대마도 소유권 주장' 을 펴는 이들이 많아졌다. 독도를 때리면 대마도를 건드린다. 지금은 전략적 수준이 낮은 무리한 포석이지만 60년 전 신생 독립국 한국은 식민지 종주국 일본에 대고 거침없는 하이킥을 날렸다. 대마도를 내놓으라고 몰아 부칠 당시의 이승만은 용감했다. 그리고 단호했다. 그가 쌓은 업적은 말년의 독재와 소통부재로 희석되었지만 이 시점에서 돌아보는 "역사 바로보기" 차원에서 분명한 의미가 있다.

고향 황해도에서 서당공부를 거쳐 배재학당으로 올라온 그는 일찍부터 미국인 선교사들과 교류했다. 명성황후 시해 복수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사선을 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당시 상황에서 유학을 생각한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조지 워싱턴 대학, 하바드 석사를 거쳐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5년 만에 명문 3개 대학의 과정을 모두 해냈다.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국의 외교정책'이라는 박사논문은 지금도 후학들이 경외하는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지식을 쌓고 실력을 길러야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신념만은 분명했던 것 같다.

프린스턴 대학 캠퍼스에는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뉴욕에서 남쪽으로 1시간 30분을 달려 고학생 이승만이 공부했던 교정을 돌아보았다. 나이테를 알 수 없는 거목들이 울창하게 대학과 정문 앞 낫소 스트리트 타운을 감싸 안고 있다. 1754년 영국의 박해를 피해 건너온 장로교도들이 목사양성을 위해 세운 학교. 258년 전의 일이다. 최초에는 지금 이곳 지명이 되어버린 '낫소(Nassou)홀'이라는 이름의 학교에서 교육을 시작했고 150년 전 뉴저지 대학으로 다시 1896년 지금의 프린스턴으로 개명했다. 독립전쟁 때 '낫소 홀'은 군대막사가 들어와 사령부로 쓰였다. 프린스턴은 이제 미국에서 4번째 역사를 자랑하는 동부의 명문대학이다.

   
 ▲미국 동부 뉴저지주 프린스턴 대학 캠퍼스 청동사자상 앞에서.

애국심을 불태우던 가난한 식민지 유학생의 흔적은 무심한 세월 속에 씻겨져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망국의 설움을 안고 정진했던 대학은 시대의 변화보다 학문적 전통 안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장구한 세월을 지켜온 두 마리의 푸른 청동 사자상이 프린스턴의 상징으로 잔잔한 위엄을 발산하고 있다. 유서 깊은 도서관 건물과 캠퍼스 교회 인문학관의 육중한 돌 외벽은 이곳이 대학이라기 보다는 중세의 수도원 같은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가을 분위기가 완연한 캠퍼스는 멕시코와 유럽에서 온 단체 방문객들로 북적였다.

미국 28대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1856-1924) 은 당시 이 대학 총장이었다. 윌슨 총장 부부와 세 딸은 이승만을 집으로 자주 불러 격려하고 특별히 아꼈다. 이승만이 언젠가 한국을 되찾을 인물로 보고 기회 있을 때마다 교수들에게 강의 추천을 했다고 한다. 뉴저지 주지사를 거쳐 대통령이 된 뒤 발표한 민족자결주의 원칙 선언은 부당하게 다른 나라를 점령한 국가들을 비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물론 조선을 병합한 일본을 간접적으로 지목하는 대목이 들어있다. 사람들은 이를 이승만을 위한 배려로 보고 있다. 윌슨은 딸의 백악관 결혼식에 이승만을 초대할 만큼 가까웠다. 가난한 유학생에게 박사학위 수수료를 면제해주라고 지도교수에게 보낸 메모가 아직도 이 대학 고문서실에 보관돼 있다.

올해는 이승만이 이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지 꼭 102년이 되는 해이다. 잊혀진 선배를 추모하고 기리는 뜻에서 지난 몇 년간 한국동문회가 6억 원을 모았고 늦었지만 박사학위 100주년을 기리는 행사를 가지기로 했다. 추석명절 기간인 다음주 10월3일에 기념세미나를 하고 200명 남짓 들어가는 지하 1층 강의실에 '이승만 홀 Syung Man Rhee.1910 Lecture Hall)' 명명식을 갖는다. 렉쳐홀 뒷벽에는 흉상을 본뜬 동판 부조까지 설치하기로 했다니 감회가 새롭다.

지금 새로운 시대를 열망하는 젊은 세대는 이승만을 기억하지 못한다. '나쁜 독재자' 정도의 인식이 전부다. 긴 애국과 눈물겨운 독립운동의 헌신을 모두 접어두고 짧은 독재로만 그를 평가하기엔 아쉬움이 남는다. 이제 그를 둘러싼 시비를 가지런히 정리해볼 때가 되었다. 공적의 두께와 실수의 부피가 어느정도 혼재돼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역시 역사 바로보기의 시작이다. 에드워드 헤롤드 카의 말처럼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끝없는 대화'이기 때문이다. 좋든 싫든 역사란 후손들이 써가는 시대의 대 서사시다. 네거티브 평가와 그 상처에만 기준을 맞춘다면 지나간 정치가들이 존경받기는 참으로 어렵다. 사실을 그대로 가려보는 여유, 잘한 것과 잘못한 것을 동시에 관찰하는 역사적 혜안이 필요한 때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cs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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