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헤미아의 방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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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아의 방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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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일까. 거장들이 떠난 그 하늘을 지키는 사람이. 운명적으로 태어나 음악을 사랑하고 그렇게 이름을 남긴 사람들의 빈자리를 채우며 도시에 윤기를 흐르게 하는 사람. 그는 놀랍게도 올해 83세의 불꽃 이반 모라베츠(Ivan Moravec)였다. 연주가 끝날 때마다 피아노 난간을 잡고 일어서서 인사를 해야 할정도로 육체는 쇠잔해졌지만 건반을 두드리는 손가락은 민첩했다. 미소를 보내는 얼굴에는 아직도 발그레한 소년의 뺨이 남아있다. 현존하는 최고(最高)의 피아니스트. 체코의 자존심을 프라하의 드보르작 홀에서 만났다. 쇼팽의 녹턴(Nocturne.야상곡)을 두드리는 노익장은 보헤미아를 밝히는 등대 같았다.

야나체크, 스메타나, 드보르작이 떠나버린 지금 체코 국민음악 계보를 이어가는 모라베츠의 모습은 강렬했다. 3번이나 반복된 커튼콜과 관객들의 존경어린 시선이 감동을 더해준다. 콘서트의 흥분을 식히면서 홀을 나서니 바로 몰다우 강변이다. 신성로마제국의 위세가 하늘에 닿았던 시절 만들어진 카를교의 위용이 주변을 압도한다. 600년 된 거대한 다리는 전 세계의 관광객들로 분주하다. 모두 시간을 잊은 표정들이다. 우러나오는 감탄사와 행복한 탄성들이 불빛 속 강물에 실려 간다.

▲ 몰다우 강 언덕에서 내려다 보이는 프라하

청년기의 방황이 끝날 무렵 실은 이 도시와 아무 연관도 없는 퀸의 '보헤미안 렙소디'에 빠진 시간이 있었다. 프레디 머큐리의 터질듯 한 허스키 창법에 취해 몹시 그리워 하던 곳. 이 저녁 드디어 보헤미아의 하늘을 안았으니 두 팔을 벌리고 나를 송두리째 프라하의 정취 속에 실컷 버무리고 싶다. 보헤미안들의 삶과 죽음을 스메타나는 교향시'나의조국' 6곡으로 만들어 프라하 시에 헌정했다. 강을 끼고 살아온 이들의 인생을 잘 그려낸 2곡 '몰다우'가 백미다. 억눌린 체코 사람들에게 꿈을 주고 싶었으리라. 그래서 이들은 스메타나를 가슴에 묻고 산다.

집시 문화를 탄생시킨 보헤미안의 상징은 체스키 크롬로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중세마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체스키 땅을 밟아보는 것 자체가 설레임이었다. 15세기 수도원 건물이었던 로제(장미)호텔의 음산한 무게를 느끼며 여장을 풀고 문을 나서니 바로 보이는 체스키 고성. 약속이나 한 듯 한결같은 주황색 지붕들 사이로 고딕, 바로크, 르네상스 건물들이 혼재해 있다. 시간의 감옥을 꿈꾸듯 비상해온 성문에 들어서자 때마침 여름비가 뿌려진다. 세월을 거스르며 고독한 전설로 남아있는 체스키 성의 그림자가 짙다. 이 마을을 말발굽 모양으로 휘감고 나와 프라하까지 이어지는 몰다우 강변에서 민초들은 역사를 만들어 왔다. 성에서 바라본 사방은 동유럽의 끝없는 지평선이다.

▲ 오스트리아와 체코 국경근처 체스키 크롬로프 중세마을.


보헤미아는 체코의 라틴어다. 보헤미안들은 기원전부터 엘베강과 블타바(몰다우)강을 젖줄로 살아온 민족이다. 근대들어 300년 동안 합스부르크의 지배로 고통을 겪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주변국가로 유랑길에 올랐다. 그들의 슬픈 역사가 집시 음악이다. 보헤미아라는 말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련한 꿈이나 연민, 그리움 같은 이미지가 강한 이유는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집시의 흔적은 세월만큼 엷어졌다. 바츨라프 광장과 체르니 궁전, 프라하 대성당 그 어디에도 단지 추억으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극작가이자 노벨평화상을 받은 하벨 대통령의 문민 통치는 체코의 또 다른 자랑거리다. 소련의 오랜 그늘에서 벗어나 선진화를 시작한 주인공이다. 소득과 성장 모두 새로운 기록을 갈아치웠다. 세계적 명품 '보헤미아 크리스탈'과 군수산업의 경쟁력이 바탕이 되었다.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해 평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그는 지난해 말 세상을 떠났다. 하벨의 잔영은 프라하 곳곳에 남아있다. 지성이 넘졌던 그의 리더십에 깊은 존경을 보낸다. 자유선언과 벨벳혁명까지 수많은 저항과 피의 투쟁을 통해 얻어낸 과정이 우리와 닮은꼴이다. 억지로 갈라진 남북은 아직도 그대로인데 스스로 나눠서 행복한 체코가 부럽다.

▲프라하 시내 오를레이 천문시계 앞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을 촬영한 파빌리온 카페를 돌아 다시 강변에 섰다. 프라하는 우리에게도 이제 매우 익숙한 도시다. 청년 관광이 급증하고 문화교류도 활발하다. 우리뿐인가. 세계인들은 매년 8천 만 명씩이나 이 나라의 산하를 찾는다. 보헤미아 유산이 최대 수출상품이다. 집시문화가 21세기 먹거리인 셈이다. 어디 스토리만 가지고 최고의 매력을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 지붕색깔 하나 바닥 돌 한 조각에 쏟은 정성이 오늘날 동구권의 리더로 올라선 비결이다. 아무것도 그냥 이뤄지지는 않는다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는 이 도시를 매우 사랑했다. 독일계 유태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느곳에도 마음 붙이지 못하고 무던히 방황했다. 청년 카프카가 해매고 다녔던 프라하 대성당 아래쪽 골목길. 그가 집필하던 작은 서재를 찾아 생전에 쓰던 필기구와 노트들을 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이곳, 여기, 우리의 모습, 우리가 사는 세상의 고립으로부터 힘들게 떠났는데 다시 되돌아오고야 마는 숙명적인 출발지, 그곳이 바로 프라하".

그가 남긴 단편 '낯선 일상성'의 한 구절을 떠올리며 나는 100년 전 중세의 골목을 살다간 카프카가 되었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cs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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