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에서 만난 미당과 인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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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에서 만난 미당과 인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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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5

 

고창에서 만난 미당과 인촌

  

 

질마재 언덕길 너머로 구름이 떠간다. 깔끔하게 추수가 끝난 들녘을 지나 포근한 바다가 보이고 동백꽃절로 유명한 선운사 정기를 안고 도는 고창 풍경은 누가 봐도 전형적인 옛날 농촌의 부자동네 모습이다. '국화 옆에서'를 읊조리며 청년시절 내내 흠모해왔던 시인의 고향을 찾는다는 설레임에 먼 여행길도 고단하지 않다. 미당 서정주의 생가는 늦가을 노란 국화로 뒤덮여있고 방문객들의 발길이 꼬리를 물었다.

일제와 해방, 한국전쟁, 민주화 그리고 2000년까지의 번영을 목격하며 파란만장한 생을 살다간 서정주는 문학 활동 60여 년간 천여 편의 시를 남겼다. 생가와 이웃한 미당시문학관에는 공간마다 시대별 사진기록과 소장품들이 빼곡하다. '동천', '귀촉도','국화 옆에서', '문둥이', '화사(花蛇)' 등 주옥같은 명작 시들이 고스란히 보존돼 낯선 방문객들을 맞고 있다. 한 사람의 시가 열 편 이상 교과서에 실린 것은 아마 우리문학사에 전무한 일일 것이다.

미당문학관을 돌아 나오니 이웃 마을에 그보다 먼저 태어나 이미 시대를 주름잡던 거인 인촌 김성수의 생가가 눈길을 끈다. 호남 갑부의 아들로 태어나 와세다 대학을 유학하고 고려대학교 설립과 동아일보 창간, 경성방직 창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인촌. 1951년 부통령을 지내고 작고하기까지 김성수의 족적은 한국현대사의 한 획을 그을 만큼 뚜렷하다. 미당과 인촌은 고창사람들이 자랑하는 이 고장의 인물이다.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미당시문학관에서

변변한 산업하나 없이 들판의 농사만으로 부를 따지던 당시 생활은 누구에게나 그랬듯이 미당의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려운 세월을 이겨내고자 그는 고향출신으로 경성을 주름잡던 인촌 밑에서 궂은 일들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것이 어린 미당의 눈에는 무척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으리라. 미당은 청년시절 그런 아버지를 떠나 서울 개운사에서 산사 생활을 하기도 했다. 고향마을 유지에게 굽실거리는 부친이 얼마나 싫었는지는 그의 시 '아비는 종놈이었다'에 잘 묘사돼 있다.

'아비는 종놈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손톱이 까만 애미의 아들~
스물 새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인촌이 사업가로,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정치가로 큰물에서 잘 나갈 때 미당은 보잘것없는 문학청년이었다. 선운사를 무대로 잉태된 두 사람의 행적은 훗날 친일파 시비에 나란히 올라 시대를 비껴갈 수 없는 운명을 만난다. 인촌은 경성방직을 경영하면서 조선총독부와 밀월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국방헌금을 내는가 하면 언론을 통해 시국연사로 부일협력을 강조함으로써 황국사상을 두둔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미당 역시 1940년대 '오장(伍長)에게 보내는 편지' 등을 통해 일본을 찬양하는 문학 활동을 벌인 사실이 인정된다. 특히 광주학살의 주인공으로 지목되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아부성 축시를 바친 사건으로 그가 문단에 추천한 민족시인 고은 선생이 등을 돌리는 쓰라림도 맛봐야 했다.

 
   
▲선운리 이웃마을 봉암리의 인촌 김성수 생가에서

두 사람은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의 명단에 나란히 올랐다. 민족문제 연구소가 2008년에 펴낸 친일인명사전 명단에도  두 사람은 역시 함께 등재돼있다. 하지만 어떤사람은 친일을 단죄하고 싶고 어떤 사람은 시대의 아픔으로 잊고 싶어한다. 각자 도드라진 삶으로 절대 권력의 시야를 벗어날 수 없었던 상황이 만들어낸 상처로 말이다.

인촌은 일제를 벗어나려면 교육밖에 해결책이 없다는 신념을 실천했다. 1926년 간디에게 청한 고언에서 '조선은 조선의 것이 되길 바란다'는 답신을 받고 그의 비폭력 교육사상에 심취해 민초들을 배우게 하고 독립자금 마련에 더 열심이었다. 과(過)의 무게로 공(功)을 덮기는 쉽지 않다.

미당은 우리말을 다루는 천부적 감각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그리스 신화에서 출발한 초인정신, 보들레르와 이태백으로부터 인간의 질곡과 자연의 시심을 두루 섭렵해내면서 민족어의 가능성을 한껏 키웠다. 생명파 초기의 탐미적 관능세계와 불교정신을 녹여낸 시어들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경지를 이뤘지만 친일의 오명을 씻어내지는 못했다. 그런 회한들을 버리고 싶었을까. 미당은 노년에 킬리만자로부터 남태평양의 작은 섬까지 여행하면서 세상의 풍물과 철학을 노래했다. '늙은 떠돌이의 시'를 통해 어쩔 수 없었던 과거를 참회한 흔적이 역력하다.

고창을 떠나는 차창 밖으로 선운사의 봉우리들이 스쳐간다. 이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 두 사람의 큰 그림자가 무겁다. 이미 그들의 역사는 흘렀고 공과의 평가가 무성했던 시절도 지났다. 허물들이 헤집어져 세상을 달궜지만 이제 그마저도 시들하다. 누구나 고통의 시대에 온몸으로 나서면 절대선은 없는 것 아닌가. 한 인간에게 돌을 던지기 보다는 차라리 그 시대를 나무라야 하지 않겠는가. 상념의 윤회가 어지럽다.

평가하되 시비하지 말고 용서하되 잊지 않는 마음이 중요할 것이다. 세월이 지나 지금 세상을 돌아본다면 한미 FTA가 나라를 팔아먹은 것으로 재단 될 수도 있다. 역사는 때때로 사실보다 보고자 하는 시각에 따라 해석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당과 인촌의 시대 철천지 원수였던 일본과의 활발한 경제 교류는 지금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사상과 이념은 늘 실용이라는 현실을 앞서지 못했다. 그 현실앞에 선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나약하다는 연민을 떨쳐내지 못한 귀경길이었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cs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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