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안 베탕쿠르의 세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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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안 베탕쿠르의 세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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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30


 

릴리안 베탕쿠르의 세금

  

 

프랑스의 화장품 제국 로레알은 벌써 100년 넘게 전 세계 여성들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기업이다. 1907년 파리의 중심지 생토노레에서 머리염색물질을 최초로 개발한 화학자 유젠 슈웰러가 창업했다. 여성소비자를 철저히 연구한 로레알은 내놓는 상품마다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지속적인 신제품 개발과 기업합병을 통해 랑콤, 비오템, 아르마니, 비키, 헬레나 루빈스타인, 랄프로렌 등 500개가 넘는 브랜드를 출시했다. 로레알의 질주로 프랑스는 오늘 날 세계 최대 화장품 수출국의 명성을 날리고 있다. 130개국에서 연간 40조 원어치가 팔리고 있으니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창업자인 아버지 슈웰러는 오래 전에 사망했고 외동딸 릴리안 베탕쿠르가 로레알의 총수로 있다. 그녀는 올해 89살이어서 이미 기력이 쇠퇴한 할머니다. 하지만 재산으로 따지면 포브스지 발표 세계 12위의 거부다. 프랑스 보수우익의 거물이었던 남편도 죽고 기업은 철저히 전문경영인에게 맡겨 운영한다. 2년 전 베탕쿠르의 딸 프랑소와즈가 상속문제로 어머니를 고소하면서 국제적인 화젯거리가 됐지만 지난해 말 두 여인은 화해를 통해 모녀지간의 정을 회복했다. 이 과정에서 베탕쿠르의 비자금과 탈세가 불거져 아직 프랑스 당국의 조사가 진행 중이다.

고령에 스캔들을 몰고 다니는 주인공 할머니 베탕쿠르가 이번엔 정부에 세금을 더 내게 해달라고 청원해 또 한 번 빅뉴스가 됐다. "재정적자와 공공부채로 프랑스와 유럽의 운명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같이 많은 혜택을 받아온 계층이 국가에 기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부자들이 세금을 더 낼 수 있도록 '특별기부세'를 신설해 달라고 청원한 것이다. 갑부들이 흔히 내온 기부금이나 사회공헌자금이 아닌 세금을 더 내겠다는 공식제안은 지금까지 선례가 없었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베탕쿠르의 부유세 제안은 재정위기에 처해 있는 프랑스 정부에 큰 힘이 될 것으로 보인다. 사르코지 대통령 역시 당선직후부터 부자감세 발언으로 '부자들의 대통령'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던 터라 무척 반가웠을 것이다. 부유세는 내년에 10조원의 세수효과를 낼 전망이다. 뒤를 이어 프랑스 최대 정유사 토탈의 최고경영자 크리스토프 드 마르주리와 소시에테 제네랄 은행의 프레데릭 우데아, 에어프랑스의 장 시릴 스피네타, 푸조 시트로앵 자동차의 필립 바렝 등 16명의 경영인들이 '베탕쿠르의 세금 더 내기 청원'에 동참했다. 연간 소득 50만 유로 이상의 고소득자들이 3%의 세금을 더 내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미국의 억만장자 워런 버핏도 세금 더 내기에 가세했다. 그는 뉴욕타임스 기고문을 통해 "미국이 재정위기에서 벗어나려면 가진 사람들이 세금을 더 걷는 수밖에 없다"며 '부자증세(增稅)'를 제안했다. 마이크로 소프트의 창업자 빌게이츠와 페이스북의 마크 주커버그, 조지 소로스 등도 자발적으로 세금을 더 내게 해달라고 지원 사격에 동참하고 있다. 세금은 절세가 미덕이고 피해가면 최선으로 생각했던 우리에게 프랑스 부자, 미국 갑부들의 처신은 정말 신선한 충격이다. 사고의 틀이 무너지는 느낌이다.

베탕쿠르와 버핏의 생각은 간단하다. 지금처럼 빈부격차와 계층갈등으로 자본주의 위기가 지속된다면 시장경제가 파멸을 맞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 동안 많은 혜택을 누려온 부자들이 세금을 더 거둬서 국가재정 안정에 기여하자는 논리다. 빈곤층은 어차피 정부가 돌봐야 하는데 세금으로 정부의 지갑을 좀 채워주겠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늘어나면 사회불안 요인이 되고 결국은 조지 소로스가 염려하는 '열린 사회의 적'들로 변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부재정이 바닥나면 한 나라가 혼란에 휩싸이고 연쇄적으로 국제경제가 어둠의 터널로 진입한다. 이 터널진입을 부자들이 나서서 막아보자는 자본주의 수호의지가 엿보인다.

어떻게든 벌어서 움켜쥐고 쓰다가 자식들에게 잘 물려줄 방법만을 고민하는 우리 부자들에게 '베탕쿠르의 세금청원'이 던져주는 의미는 무겁다. 빈부와 계층, 남북으로 나뉘어 깊어만 가는 편싸움에 서서히 경쟁력이 떨어지는 지금 우리의 미래는 알 수 없다. 누구나 잘살기를 원하지만 고르지 못한 것이 세상의 이치인지라 무슨 묘안을 내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고 가야 할지 머리가 아프다. 현대가(家)에서 최근 1조원을 출연해 빈곤층 교육기회를 지원하겠다고 발표 한 것은 그나마 위안이다. 하지만 검찰수사과정에의 약속을 지킨 정몽구 회장의 5천억 원이나 아직 대선 꿈이 살아있는 정몽준 회장의 자선은 그렇게 개운치만은 않다.

가난을 구휼했던 경주의 최부자, 제주의 김만덕 스토리가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따듯하고 진심이 넘쳐흐르는 그 정신을 아직도 이어받고 싶어서일 것이다. 청부(淸富)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의 행동을 보고 결정해야 한만큼 시대가 변했다. 세상이 팔을 비틀어 억지로 부조하는 부자가 아니라 그 진정성에 사람들이 고개를 절로 숙이게 되는 기품 있는 부자들을 우리는 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와 법치가 바로서고 정말 가진 사람들이 스스로 주머니를 털고 싶도록 감동을 줘야 한다. 세금 더 내게 해달라고 까지는 아니어도 함께 가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진정한 포옹이 이뤄지도록 말이다.

늘 위기였다. 학자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말하고 기업은 경영의 위기를 말하고 기업가는 정부의 위기를 말한다. 위기를 말할 수 있으면 그것은 이미 위기가 아니다. 내입으로 말하기 싫을 뿐 해법을 서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로 달리면 서로 악순환만 지속된다. 베탕쿠르의 세금청원 같은 선순환의 고리를 잡고 한 차원 높은 사회로 나갈만한 충분한 역량이 우리에게 축적돼 있다. 한국적 자본주의 정신과 부의 역사가 재정립되어야 할 시점이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고 하지 않았던가. 함께 사는 세상 만들기는 이미 우리 선조들이 꿰뚫어본 시대의 지혜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cs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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