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갈, 나무 심은 사람
상태바
민병갈, 나무 심은 사람
  • 전은정 기자 eunsjr@cstimes.com
  • 기사출고 2021년 04월 08일 14시 21분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임준수 /김영사/ 1만9800원

[컨슈머타임스 전은정 기자] 지금껏 민병갈 원장은 평생을 나무에만 쏟은 열정적인 원예전문가로만 알려져 있었지만, 10여 년 동안 곁에 머무르며 그의 삶과 정신을 지켜본 저자 임준수는 더욱 입체적이고 인간적인 민병갈 원장의 삶의 면모를 조명한다. 대외적으로는 한국의 나무를 세계에 전파한 학술·외교적 역할을 했고, 대내적으로는 천리포수목원을 국내 식물학과 원예학의 인큐베이터로 운영하며 자연보호 운동과 한국 식물학 발전에 힘쓴 교육자의 역할을 했다. 또, 누구보다도 한국을 사랑한 푸른 눈의 한국인이자, 격동의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온 우리 역사의 산증인이었다.

대한민국 광복 직후 한국에 발을 디딘 이후 57년간 이어진 민병갈의 운명적인 한국 생활은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과 맥을 같이 한다. 그의 시선은 해방기의 혼란상, 한국전쟁 발발 당시의 급박한 상황, 60~70년대 재건과 성장의 활기, 그 이후 문화적 다양성이 꽃피던 한국의 모습을 두루 거쳤다. 미군정 복무 기간 동안 한국인의 의식주와 한국의 자연에 매료된 그는 전역 이후에도 민간 신분으로 군정청 근무를 이어갔다. 1954년부터는 한국은행에 입사해 28년 동안 투자 분야 고문으로 일했다. 1960년대 초부터 한국 이름을 사용한 민병갈은, 1979년에 비로소 법적으로 한국에 귀화해 완전한 한국인이 된다.

한국 문화와 한국인, 그리고 한국의 자연에 대한 민병갈의 각별한 사랑은 그의 삶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군정 근무 시절 민병갈은 틈만 나면 한국 시골 곳곳을 누비며 한국인들의 일상 풍경을 눈에 담았다. 민병갈의 한국 문화 탐구는 호기심을 넘어선 애정과 선망이었다. 그는 한자와 한글을 공부하고 싶어서 시간만 나면 인사동 고서점에 발을 들였다. 한국은행에 근무하면서부터는 한옥에 입주해 살면서 집에서는 항상 한복을 입었다. 입맛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한옥에 외국인 친구들을 초대해 정기적으로 김치 파티를 열었다.

의식주 모두를 한국식으로 하고자 했던 민병갈은 "나는 전생이 한국인이었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평생에 걸친 헌신과 투자로 천리포수목원을 일구어낸 데는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민병갈 원장의 무한한 사랑과 동경이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투데이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