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바다로 간 엔히크 왕자. 포르투갈 제국을 일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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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의 세상이야기] 바다로 간 엔히크 왕자. 포르투갈 제국을 일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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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은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 끝 작은 나라다.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중세의 역사적 사건 레콩키스타(국토회복운동) 과정에서 어렵게 독립했다. 동양에서 주원장이 명나라를 출범시킬 무렵에 세계사에 등장한 국가다. 주앙1세가 아비스 왕조를 시작하면서 국가의 틀을 갖췄다.

동쪽은 당시 가장 강력한 카스티야 왕국이었다. 이사벨 여왕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아랍통치세력인 무어인들을 축출하고 되찾은 제국이다. 국경의 서쪽은 거친 바다 대서양이었다. 먹고 살길을 찾아야 했던 약소국 포르투갈은 동쪽의 강대국을 상대로 전쟁을 통해 뻗어나갈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할 수 없이 바다로 눈길을 돌려야 했다.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생존을 위해서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방법 외에 선택지가 없었다.

당시 사람들은 바다에 대하여 축적된 이론이나 연구가 없이 무지했다. 이는 포르투갈의 일만은 아니었다. 큰 배를 만들어야 바다로 나갈 수 있었지만 기술이 부족했다. 연안을 넘어 멀리 대서양은 이들에게 말 그대로 공포와 죽음의 대상이었다. 그렇다고 도전을 멈출 수는 없었다.

주앙1세의 셋째아들 엔히크 왕자(1394-1460)는 유럽대륙의 땅 끝 사그레스에 항해학교를 세우고 전 유럽과 물러간 이슬람 세력권에서 인재를 끌어 모았다. 이론적 깊이는 없었지만 바다 경험이 있는 항해, 천문, 지리, 선박조선 전문가들을 수소문해 불러들였다.

왕자의 간곡한 설득에 중세 기사들은 말을 버리고 항구로 모였다. 수많은 시간을 들여 반복된 노력 끝에 작은 범선 캐러벨을 만들었다. 기존의 소형 배들을 기초로 개조한 최초의 큰 배였다. 대양에 대한 인간의 첫 도전장이었던 셈이다. 선박이 마련되자 이들은 모두 배에 올랐다.

리스본은 개척자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항구 바닷가에 우뚝 선 디스커버리 탑,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캐러벨의 갑판을 상징하는 거대한 석조 기념물은 올려다보는 나를 압도했다. 엔히크 왕자와 그를 따른 수많은 장인들, 기사들이 용감한 자세로 도열한 조각상은 실제의 비장함까지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시선은 한 결 같이 두려움의 바다, 대서양을 향하고 있었다.
 

리스본 항구. 디스커버리 탑 앞에서
▲리스본 항구. 디스커버리 탑 앞에서

초기 바다를 향한 이들은 조잡한 범선과 낡은 항해술로 숱한 시련을 안겼다. 괴혈병으로 선원의 반이 죽어나가는 고통이 덮쳤다. 끈질긴 도전 끝에 포르투갈 인들은 마침내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진한 덕분이었다. 향료와 차, 비단 같은 사치품과 노예를 획득했다. 부국으로 가는 최고의 상품들을 손에 넣었다.

디스커버리 탑은 포르투갈이 주최한 세계박람회(1940)때 처음 만들어 졌다. 그 후 앤히크 왕자 서거 500주기를 추모하면서(1960) 거대한 현재의 탑이 완성되었다. 리스본 항구 서쪽 끝 벨렝 구역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에그타르트' 를 맛보거나 포르투갈 최대의 제로니모스 수도원을 돌아보기 위해 찾는 곳이다. 이제는 그들이 세계사의 주인공이었던 시대의 영광을 기억하는 장소가 되었다.

광활한 해변 광장에는 멋진 나침반 모자이크와 세계지도가 칼라스톤으로 바닥에 장식되어 있었다. 희망봉을 발견해준 은혜로 공사 경비 전액을 당시 남아공 백인정권이 부담했다고 한다. 현지의 조각가 텔모와 아메이다가 나눠 세운 이스트 탑과 웨스트 탑에는 33명의 당대 개척자들이 현세인 들처럼 용기있는 표정으로 도열해 있었다.

동탑에는 엔히크 왕자와 인도항로를 개척하고 무려 세 번이나 그곳을 다녀온 포르투갈의 영웅 바스코 다 가마를 비롯해 브라질을 발견한 페드로 카부랄, 최초의 세계일주로 유명한 탐험가 마젤란, 희망봉을 처음 발견한 디아스 등 16명의 조각상이 사선으로 줄지어 서 있었다.

서탑에는 당대 최고의 화가 곤잘레스와 베네딕트 정교회 소속의 선교사들, 시인 루이스, 작가 핀투와 지도제작자, 과학자, 그리스 기사단들이 생생한 모습으로 중세 개척시대를 증언하고 있었다.
 

▲디스커버리 탑 앞쪽 윈드로즈, 바다의 대한 전설과 신화가 새겨져 있다.
▲디스커버리 탑 앞쪽 윈드로즈, 바다에 대한 전설과 신화가 새겨져 있다.

주인공 엔히크 왕자는 공작이면서 그리스 기사단 단장이었다. 향락과 사치놀음에 빠질 수도 있었지만 왕자는 다른 쪽에 시선을 돌렸다. 높은 지위를 이용해 자금과 사람을 끌어 모았다. 최초의 항해 학교를 열고 수많은 항해사들을 길러냈다. 아라비아와 유대인 수학자들을 리스본으로 초청해 지도를 제작하고 천문, 지리, 의학을 연구했다. 선박 건조에 온 힘을 기울인 주인공이었다.

포르투갈 왕실은 집중된 투자로 무역통로를 개척하고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현재까지 옛 영광이 유지되는 카나리아제도, 아조레스 제도, 마데이라 군도는 물론 세네갈과 가나 등 중부 아프리카 항로와 무역거점도 이때 만들어낸 수확이었다.

바다는 포르투갈의 운명이고 숙명이었다. 본토 해안선만 1230킬로미터에 이른다. 아조레스 제도 667킬로미터, 마데이라 군도 250킬로미터까지 합하면 세계적인 해양국이다. 긴 해안선은 역사 이래 대양의 꿈을 키우기에 거부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하지만 엔히크 왕자 등장 이전까지는 한 번도 시도해보지 못한 불가능의 비전이었다.

1415년 세우타 점령을 시작으로 600여 년 동안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 오세아니아를 아우르는 대제국이 탄생 유지되었다. 세계사 최초의 사건이었다. 브라질(1821년 독립), 기니비사우(1974년 독립), 모잠비크(1975년 독립), 앙골라(1975년 독립), 마카오(1999년 중국 반환)까지 포르투갈 제국의 명맥이 이어졌다.

훗날 대항해 시대의 개척자들로 평가되었지만 시작은 그렇지 않았다. 제국의 영광이나 역사적인 사명감과는 거리가 먼 세속적 동기에서 시작된 투쟁이었다. 경제적 여유를 충족시키기 위해 무조건 바다로 나간 것이 가장 큰 동기였다. 돈 벌어 풍요를 누리기 위한 욕망이 빚어낸 결과였다. 인도항로 무역은 엔히크 사후에도 이어졌다. 포르투갈의 성공은 유럽 사람들을 자극했다. 대 항해 시대의 서막은 이렇게 열렸다.

귀한 물건을 소유하고 남보다 더 많이 돈을 벌어 잘 살고 싶다는 생각은 인간의 기본 욕망이다. 이 단순한 에너지가 척박한 역사를 바꿨다. 숭고한 정치적 이상보다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그 시대의 열정이 더 강렬한 국가발전의 시작점이 되었다. 시대의 흐름을 바꾼 처절한 혁신과 도전은 지극히 이기적 동기에서 시작된다. 포르투갈이 증명하고 있다.

유럽 변방의 작은 나라가 인류역사의 장대한 제국반열에 올라선 것은 고단한 현실을 넘어서려는 결단이 비결이었다. 간절함이 담긴 도전은 이 세상에서 늘 유효한 결과로 끝을 맺었다. 현실과 동떨어진 고상한 명분과 이상론은 미래의 대안이 될 수 없다. 정치적 이념의 대결은 세월이 가면 무익하고 허무하다. 실용적 이념에 사활을 걸어야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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