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법화를 경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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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법화를 경계한다
  • 윤성식 고려대 명예교수 admin@cstimes.com
  • 기사출고 2021년 01월 20일 09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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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 의하면 2009년 7월 민주당은 국회 본회의에서 한나라당이 미디어관련법을 강행 통과시킬 때 대리투표가 있었고, 의사결정에 필요한 정족수 미달로 부결된 안건을 다시 표결함으로써 일사부재의 원칙을 어겼으므로, 이미 가결된 미디어법을 무효로 해달라는 '무효소송'을 헌법재판소에 청구하였습니다.

당시 헌법재판소는 민주당이 주장한 대리투표, 일사부재의 원칙 위반 등 위법행위가 있었음을 인정했으나 동시에 미디어관련법 가결을 무효로 해 달라는 무효소송 청구에 대해선 헌법재판관 절대다수의 의견에 따라 기각하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헌법재판소는 미디어관련법 가결 과정에서 발생한 위법 사실이 있었지만, 가결을 무효로 할 만큼 중대하지 않으며, 무효 여부는 국회가 자율적으로 결정할 일이지 헌법재판소가 판단할 사항이 아니라는 취지였습니다.

2020년 12월 문재인 대통령은 윤석열 검찰총장을 징계했습니다. 윤총장은 대통령의 징계결정을 취소해 달라고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법원은 검사징계위원회가 의사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대통령의 징계결정이 무효라고 판결했습니다. 의사정족수에 관한 양쪽 공방을 보니 판사가 의사정족수를 채웠다고 판결할 수도 있고 채우지 않았다고 판결할 수도 있더군요. 의사정족수에 문제가 없었다며 판사가 대법원의 판례를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주장, 판사가 법조윤리를 잘못 이해했다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이 사건은 대통령과 검찰총장이 충돌한 정치적 사건입니다. 미디어관련법의 경우처럼 징계과정에서 위법한 사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징계를 무효로 할 만큼 중대하지 않다고 판결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고려대 정외과 임혁백 교수는 법원의 판결에 대해 "공무원의 징계권까지 사법부가 사실상 장악한다는 것은 대통령의 권력의 찬탈입니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행정부 공무원인 검찰총장에 대한 대통령의 징계권을 사법부가 찬탈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번 사태를 사법쿠데타라고 부른 이유는 판사가 검찰총장의 직무정지에 관한 법무부 징계위원회의 이유를 인정하면서도 사소한 절차적인 문제를 이유를 들어 징계정지 가처분을 인용한다는 것은 '과도한 법 해석을 통한 사실상의 법제정 효과'를 내었다는 점에서 대통령의 인사권을 사실상 찬탈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사실 현재와 같은 판결이 내려진다면 임기제 공무원을 해임하기는 불가능해보입니다. 행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이 행정부 소속 공무원(사법부 소속이 아님)인 검찰총장을 해임할 수 없다면 문제가 아닐까요?  게다가 법원까지 인정하는 징계위원회의 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대통령의 인사권을 찬탈했다는 해석이 적절해보입니다.

노무현 대통령 때 이라크에 파병하려는 노무현 정부에 대해 야당이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하였습니다. 헌법재판소는 '국방 및 외교에 관련된 고도의 정치적 결단을 요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사법적 판단을 자제해야 한다는 이유로 청구를 각하했습니다.

앞으로 법원에 제기되는 이와 유사한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사법부가 재판을 거부하고 정치권으로 되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법부는 정치적 문제에 관여해서는 안됩니다. 선출된 권력이 스스로 정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게 해결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국민이 위임한 권한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정치의 사법화(juridification of politics 혹은 judicialization of politics)는 미국, 유럽, 남미 등에서 오래전부터 목격되어 왔습니다. 정치의 사법화는 정치 문제를 정치권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사법부로 가져가 재판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정치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경우 대화, 토론을 통해 사회적 공론화를 거치고 타협이나 선거 등을 통해 해결책을 찾는 것이 좋은데도 불구하고 몇명의 판사에게 해결책을 맡기는 최근의 전세계적 경향을 말합니다. 전세계의 많은 정치학자가 정치의 사법화가 민주주의를 해칠 수 있다는 사실에 우려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에서도 정치의 사법화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대통령 탄핵은 물론이고 행정수도이전, 대통령의 검찰총장 징계, 국회의 운영, 심지어 국회의장의 권한에 대해서도 사법부의 판단을 요청합니다. 정치의 사법화는 국민이 거시적인 정치과정을 통해 선택할 사항을 법원이 오직 제기된 부분적 사건만 보고 미시적으로 판단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사법부는 국민이 선출한 국민의 대표가 아닌 엘리뜨 전문가 집단입니다. 정치문제는 소수의 엘리뜨 법조인이 결정하면 안됩니다. 정치의 사법화는 정치혐오증, 정치불신에 어느 정도 이유가 있습니다. 정치의 사법화는 민주주의를 보완하고 정치를 보완하는 긍정적 역할도 합니다. 정치의 사법화는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 피할 수 없지만 지나치면 독이 됩니다.

국민은 '죽일 놈의 정치인'보다 법조인을 더 신뢰하다보니 정치의 사법화가 갖고 있는 문제점을 잘 모를 수가 있습니다. 법률가가 국민의 대표에게 맡겨진 일을 미시적인 법의 잣대로 심판하는 일은 아무리 법을 공정하게 적용하여 재판한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있습니다. 수천년 동안 인간은 정치를 경험한 결과 소수의 엘리뜨가 결정하는 정치보다는 모든 국민이 결정하는 정치가 더 나은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민주주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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