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자바의 신화, 보로부두르
상태바
[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자바의 신화, 보로부두르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수백 개의 석가는 조용한 웃음으로 나를 맞았다. 이렇게 많은 해탈의 미소를 한꺼번에 마주 한 적은 없었다. 8세기 초부터 그 길고 지난한 세월을 어떻게 견디며 왔을까. 돌에 스며든 역사를 보며 경이로운 상상이 가득 차올랐다. 인도네시아 자바중부 쿠두평원의 야산에서 대면한 보로부두르는 불가사의의 시간을 안고 있었다.

종교적 신념이 아니었다면 탄생조차 꿈꾸기 힘든 열반이 가득했다. 솜씨가 이승사람들의 경계를 벗어 난듯 한 석조신전들 사이사이 정교한 돌조각을 지나면서 그 시작을 알고 싶었다. 단지 부처의 세계를 탐닉한 고대인들의 정성 때문이었을까. 그러기에는 시선을 압도할 만큼 웅장하고 돌을 파내 만든 석화가 너무나 섬세하다.

사원 꼭대기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대지의 평원은 끝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근처 몇 개의 화산은 아직도 지층에서 마그마가 들끓는 듯 가느다란 연기를 밀어내고 있었다. "왜 이런 작업들을 했을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몇 번을 오르내렸지만 그 정도로 수 십 만개의 돌들이 산 정상에 옮겨진 의문을 풀어내기는 역시 어려운 일이었다.

자바 섬은 현재 인도네시아 국민의 대부분이 살고 있는 거점지역이다. 인구 35천만 가운데 14천 만이 모여 있다. 수도 자카르타에서 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족자카르타는 (족자) 인도네시아 고대왕국의 도읍지였다. 족자의 외딴 산중에 남아있었던 불교역사의 보물이 현세인 들에게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선보이고 있는 셈이다.

고대 샤일렌 불교왕국이 어떤 이유로 서기 800년대 초반 대공사를 50년 동안 벌였다. 하지만 힌두계 산자야 왕조에 패망해 캄보디아로 쫓겨 갔고 그들은 300년 후 '앙코르와트' 를 지었다. 산자야 왕조는 보로부두르 근처의 웅장한 힌두사원 '쁘람바난' 을 건축했다. 샤일렌 왕국은 훗날 캄보디아와 베트남을 장악하고 다시 지금의 자바, 수마트라로 진출해 해상왕국이 되었다.

이렇게 융성했던 왕조도 나중에는 이슬람 세력에게 공중분해 되었다. 왕가의 종교적 광신이 백성의 노동을 착취하고 물리적 대공사를 강행하면서 민심을 잃고 재정이 거덜 나면서 결국은 멸망의 순서를 밟았던 것이다. 후세사람들에게 전해오는 족자의 스토리다.

 

보도부두르의 전면 앞에서
▲자바의 보로부두르 사원 스투파에서

보로부두르는 10층 높이의 건축물이다. 길이 100미터가 넘는다. 504개의 부처상이 층마다 나란히 원형을 이루며 꼭대기 층 '스투파' 로 연결된다. 지상에서 5층까지 동심원으로 계단이 연결되어 사방에서 다 오를 수 있다. 스투파는 73개가 배치되어 있었다. 대형 종모양의 석탑으로 탑 상단 내부 공간에는 불경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이젠 아무것도 없는 빈공간일 뿐이다. 불교가 지향하는 궁극적 공()의 현시인 듯싶다.

10세기 중반 자바의 정치 문화 중심이 동쪽으로 옮겨가면서 세상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사라졌다가 1814년 영국인 토마스 스탠포드가 현지인들을 고용해 최초 발굴해냈다.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에 이미 많은 부분이 훼손되고 도난당했다. 영국총독 시대에 유럽인들이 다시 복원작업에 나섰다. 이미 숲속에 반쯤 묻힌 사원을 제 모습으로 만들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유네스코의 지원으로 화산재를 걷어내고 고증을 거쳐 당대의 실체를 많이 회복했다. 전문가들의 복원 작업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라운드가 가장 넓게 설계된 1층은 탐욕의 세계다. 현지어로 '카마타투' 즉 인과응보를 조각으로 표현했다. 전쟁과 악령, 후회, 선행 등의 조각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어진다. 사람들이 프라다크시나 즉 탑돌이를 하듯 걷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5층은 '루파다투', 즉 구도의 세계다. 부처의 일생이 묘사되어 있다. 송고한 그의 삶을 다 전하지는 못하고 바라나시 근처 녹야원의 설법 장면으로 마무리하고 있었다.

나머지 층에는 본생경으로 부처가 왕자 싯달타로 태어나기 전 생을 담은 조각들과 460개 벽면에 영광스러운 하늘의 법을 찾아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방랑하는 선재동자의 모습을 담았다. 지층부터 하늘로 올라가며 욕계, 색계, 무색계, 해탈의 순서로 층이 연결된다. 동쪽은 촉지인의 아촉불, 서쪽은 선정인의 아미타불, 남쪽은 시여인의 보생불, 북쪽은 시무외인의 불공성취불이 배치되어 있었다. 온전한 것보다 풍우에 스러져 흔적만 남은 부분도 많다.

속세를 구원하기 위한 부처의 일생은 아직도 중생들을 보듬어 안고 있는 모습이다. 세상의 희노애락과 생로병사가 천년을 넘어 지금도 나약한 인간들의 심리를 밧줄로 매달아 단단히 붙잡고 있는 형태다.

 

보로부두르 전경
▲보로부두르 사원 전경

화산이 분출할 때마다 조금씩 무너지고 도굴꾼들에게 날아간 석가의 목은 싱가포르와 방콕의 골동품 시장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보로부두르(산위의 절)는 엄청난 돌을 모두 사람들이 날라다 지었다는 사실이 불가사의다. 전승불교와 자바불교의 앙상블을 이루며 세계에서 가장 크고 완벽한 불교 부조사원으로 남았다. 예술성으로 필적한 만한 곳이 없는 듯하다.

사원 동쪽에 멀리 보이는 메라피 화산은 아직도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보로부두르가 복원된 이후에도 대폭발(2010)을 거쳐 활동 중이다. 이 때문에 가끔 관람객 입장이 금지되기도 한다. 모두 1460개 돌 판에 새겨진 부조는 일품이다. 우기를 맞은 옛 사원에는 시도 때도 없이 빗줄기가 쏟아졌다. 마치 아일랜드의 하늘같았다. 빗물은 석가의 부조를 타고 흘러내렸다.

종교, 노동, 착취, 멸망의 길을 간 왕국은 셀 수 없이 많다. 샤일렌 왕국도 그러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다만 인도의 진정한 종교건축이 인도 밖 이곳 자바에서 실현된 듯한 느낌이다. 신은 현세에 있어서 여러 가지 근심의 보상으로 우리들에게 희망과 구원을 주었다(볼테르)는 말처럼 안식을 찾는 것이 중생이고 그 촉매로 보로부두르가 탄생했을 것이다. 키 큰 보리수 아래 사원 간판은 우뚝했다. 오른쪽 길가에는 한 때 사원과 인연을 맺었던 수많은 돌들이 주인을 잃은 채 정처 없이 나뒹굴고 있었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대표기자 justin-747@hanmal.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투데이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