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으로 얼룩지는 사회, 소비자가 판단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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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으로 얼룩지는 사회, 소비자가 판단해야
  • 윤성식 고려대 명예교수 admin@cstimes.com
  • 기사출고 2020년 04월 02일 10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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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1층에 사는 주민이 엘리베이터 교체 비용을 못 내겠다고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법원은 1층 주민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논리적인 판결로 보입니다. 1층에 사는 주민은 엘리베이터 사용할 일도 없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동일한 소송이 또 제기되었는데 이번에는 법원이 소송을 제기한 1층 주민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유를 읽어보니 그럴싸했습니다. 역시 논리적 판결로 보였습니다.

황희 정승에게 어떤 사람이 와서 다른 사람 욕을 했습니다. 황희 정승이 맞장구를 쳐 주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다른 사람이 찾아와서 아까 찾아온 사람을 욕했습니다. 황희 정승이 이번에도 맞장구를 쳐 주었습니다. 그 사람이 가고 난 뒤에 모든 것을 보고 있었던 조카가 황희 정승에게 이 말도 맞다고 하고 저말도 맞다고 하니 잘못이라고 말하자 역시 그 말도 맞다고 맞장구를 쳐 주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세상사를 보면 이 말도 맞고 저말 도 맞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재판이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된다고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아무리 양쪽 논리가 일리가 있어도 해도 법원은 한쪽 편을 들어줘야 합니다.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막상 선거 때가 되면 우리는 한쪽을 선택해야 합니다.

법정에서는 두 변호사끼리 자기주장을 내세우며 싸우거나 검사와 변호사가 싸웁니다. 판사는 양쪽 주장을 듣고 판단을 내립니다. '제가 판사 시절에는 변호사들이 거짓말의 향연을 벌린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모른 채 재판을 했지요. 그런데 변호사를 하고 보니 민사재판은 정말 거짓말의 향연이더라구요' 전직 판사 출신 변호사가 한 말입니다.

민사재판은 당사자끼리 싸워도 되지만 대개 변호사를 선임하기에 변호사끼리의 싸움이 됩니다. 당사자끼리의 싸움도 변호사끼리의 싸움도 진흙탕 싸움이 되기 마련이고 그 과정에서 거짓말이 난무합니다. 형사재판의 경우도 검사가 악의적으로 사건을 짜 맞추기를 하면 사실 관계를 교묘하게 소설로 변질시킵니다.

이런 거짓말하는 사람들에게 판사가 영향을 받는 것보다 차라리 판사 혼자 거짓말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재판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양심이 있고 판단력이 좋은 판사를 어떻게 선정할 수 있을까요? 차라리 거짓말하는 변호사 앞에서 판사가 판결을 내려야 오히려 더 정의로울 수 있습니다.

검사는 범인이라는 증명을 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입니다. 변호사는 범인이 아니라고 입증하기 위해 역시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민사사건에서도 변호사들은 자기편이 이길 수 있도록 모든 수단을 동원합니다. 때로는 상대방의 약점을 공격하고 상대방으로부터 유리한 합의를 끌어내기 위하여 없는 거짓말로 협박하기도 합니다. 양쪽의 이러한 노력이 오히려 진실을 규명하고 정의를 실현하는데 더 적합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혼자의 판결은 위험합니다.

정치는 언론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국민은 상당 부분 언론에 의해 정치적 판단을 합니다. 국민 앞에서 대개 양쪽으로 나뉜 언론이 변호사와 또 다른 변호사의 싸움처럼, 검사와 변호사의 싸움처럼 공방전을 펼칩니다. 한쪽 언론만 듣고 결론을 내리는 국민도 많지만 요즘처럼 인터넷이 보편화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양쪽 언론을 접하는 국민도 많습니다. 신문을 구독했던 과거에는 자기가 구독하는 신문의 기사만을 읽었습니다. 요즘은 신문 구독자의 숫자가 격감하였습니다. 인터넷의 포탈을 통해서 수많은 다양한 언론의 기사를 접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의 영역에서는 대체로 양쪽 견해로 나뉘어 치열하게 싸웁니다. 언론은 싸움에서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언론에게 양쪽 견해 중 그 어느 견해에도 기울지 않고 공정하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불가능하기 때문닙니다. 언론은 반드시 한쪽에 기울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고 공정한척 위장한다면 그건 이중인격이고 위선입니다. 미국은 대통령 선거 때 언론사는 자신이 어떤 후보를 지지하는지 밝힙니다. 왜냐하면 절대 어느 한쪽에 기울지 않고 공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검사는 유죄의 가능성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변호사는 무죄의 가능성에 혼신의 힘을 다할 때 도리어 균형 있는 판결이 가능합니다. 만약 검사와 변호사가 중립을 지키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안심되기는 커녕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낄 것입니다. 하나의 가능성에만 몰두하여 노력할 때 사실 관계가 더 명료하게 드러나며 양쪽의 의견을 판사가 공정하게 종합할 수 있습니다.

언론에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말고 중도적 입장을 취하라는 요구는 불가능하고 비현실적인 요구입니다. 언론은 반드시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어 있습니다. 차라리 치우칠 가능성을 100% 활용하는게 좋습니다. 정부의 정책이 잘못이라는 온갖 증거를 동원하는 언론과, 잘못이 아니라는 온갖 증거를 동원하는 언론이 있어야 역설적으로 국민은 더 잘 판단할 수 있습니다. 만약 언론이 중도를 유지하겠다고 하다간 자칫하면 판단하기 어려운 애매한 기사만 가득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해서 해외 언론은 한국 칭찬 일색이었고 국내 언론은 대부분 비판 일색이었습니다. 해외 언론이 한국을 헐뜯을 때 열심히 인용하던 언론도 해외 언론의 찬사에는 눈을 감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언론환경은 한쪽으로 너무나 치우쳐 있습니다. 말하자면 기울어진 운동장입니다.

여론조사를 보면 국민 대다수가 정부가 잘한다고 생각하지만 언론사를 보면 대부분 못한다고 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언론은 다양한 시각을 모두 국민 앞에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압도적으로 한쪽 시각만이 언론을 통해 국민에게 전달된다면 정치는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는 다양한 시각이 전달될 수 있도록 언론의 자유를 허용하고 언론 환경의 균형 있는 생태계의 조성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정부가 이러한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국민이 자발적으로 이러한 언론 환경의 조성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환경이 국민에게 이익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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