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호치민과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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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의 세상이야기] 호치민과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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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불길은 꺼졌다. 하지만 공산당 선언 90주년을 기념하는 분위기로 옛 사이공 시가지는 축하 분위기다. 지난 20년 동안 수차례 와본 곳이지만 인민의 영웅 호치민 장군의 추모분위기는 아직도 열렬하다. 프랑스, 미국과의 기나긴 전쟁 끝에 얻어낸 통일 베트남. 이제 식민지 해방도 남북대립도 모두 신화가 되었다. 오직 도이모이(개방)와 산업발전 정책만이 가난했던 과거의 먼지를 분주히 털어내는 중이다.

스무 살에 식민지 코친차이나를 떠나 두 달 간의 항해 끝에 도착한 파리에서 신세계에 눈을 뜬 청년 호치민은 정복자들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파리꼼뮌을 거쳐 모스크바로, 미국으로, 중국으로, 온갖 가시밭길을 마다 않던 그가 1930년 밀입국한 홍콩에서 마침내 베트남 공산당을 창건하면서 인도차이나의 운명은 달라졌다. 그로부터 90년이 지났다.

호치민(胡志明. 1890-1969. 본명 응우웬 신 꿍)은 프랑스 점령에 가장 저항이 심했던 고대 왕도 후에(Hue) 근처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쩌면 우리와 똑같은 유교문명권에서 과거시험과 성리학을 중심으로 형성된 세계관은 그의 혁명시절을 끝까지 관통해낸 정신이었다. 천년동안 중국 영향권을 벗어날 수 없었던 조국의 운명이 프랑스 식민지 압제로 이어지는 현실을 보면서 소년 호치민의 애국심은 불타올랐다. 베트남 국자감에서 공부한 아버지의 가르침으로 그의 인생은 항상 유교의 그림자가 따라다녔다.

당시 베트남 지식인들은 불평등한 지배관계를 끝내고 독립하기위해 과연 누구의 힘을 빌려야 하는지가 고민거리였다. 일본, 프랑스, 미국을 놓고 저울질 하던 젊은 애국자는 프랑스행 선박에 몸을 실었다. 파리에서 그는 식민종주국 프랑스의 선진성에 눈을 떴다. 강해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모스크바와 미국, 멕시코 중국 등 세계를 돌아본 뒤 본격적인 코민테른 활동에 몰입하면서 내린 선택은 공산주의였다.

 

생전의 호치민. 그의 애민정신은 이제 연구대상이 되었다. 평생 독신으로 베트남민족에 바친 헌신은 현재까지 높은평가를 받고 있다.
▲생전의 호치민. 그의 애민정신은 이제 연구대상이 되었다. 평생 독신으로 베트남민족에 바친 헌신은 현재까지 높은평가를 받고 있다.

 

30대 초반부터 석방과 탈출이 교차하는 도망자 신분이었지만 늘 여유와 포용으로 동지들을 규합하고 사선을 넘었다. 1차적인 투쟁과 함께 강대국을 설득하는 외교가 최선의 방법임을 함께 체험한 세월들이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독립이 되는 듯 했지만 프랑스와 미군이 지원하는 월남으로 분단된 조국을 합치기 위한 투쟁은 멈출 수가 없었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 그는 다시 하노이에 월맹 정부를 세우고 산악지역에서 게릴라전으로 맞섰다.

혁명가 호치민은 통일을 보지 못하고 196980세에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후세들이 반드시 통일과업을 이뤄달라고 유언한 대로 6년 뒤 역사적인 사이공 함락은 성공했고 하나의 국가라는 필생의 목표는 마무리 되었다. 미국 정보장교로 월남패망당시 사이공에 근무했던 윌리엄 듀이커가 전역 후 30년 동안 수집한 자료로 공들여 써낸 '호치민 평전'은 한 인간의 감동적인 서사시였다. 증오스런 적군의 대장에서 존경하는 혁명가로 묘사되어가는 변화가 흥미롭다. 천 페이지의 방대한 분량은 다소 짐스러웠지만 여행길 내내 좋은 친구가 되었다.

호치민 시내. 우리 건설업체들이 완공한 고층 빌딩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눈부시다 못해 현란할 정도로 변해가는 오늘의 베트남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결합의 성공사례다. 전쟁에서 해방된 베트남은 자본주의 노선을 혼합한 개방정책으로 세계가 주목하는 국가로 발돋움하고 있다.

20세기 가장 비극적인 장기전을 치렀지만 아픈 상처는 역사가 되었고 1억 명의 베트남인들은 신화에 도전하고 있다. 그 한가운데 호치민이라는 영웅이 자리 잡고 있다. 베트남에 가장 많이 투자하는 나라, 가장 많은 기업(6천여개)들이 진출해있는 나라, 여기다 박항서 축구열풍까지 더해져 양국은 돈독한 동반자관계는 오랜 시간 빛을 발할 것 같다.

 

▲프랑스 식민지시절 에펠이 설계한 '사이공 우체국'내부. 호장군의 사진이 함께하고 있다. 현재는 호치민 시내의 방문명소로 세계인들이 찾는 곳이다.
▲프랑스 식민지시절 에펠이 설계한 '사이공 우체국'내부. 호장군의 사진이 함께하고 있다. 현재는 호치민 시내의 방문명소로 세계인들이 찾는 곳이다.

 

같은 시기 또 다른 식민지 조선에는 이승만(1875-1965)이 있었다. 서당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서울에서 개화교육을 받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무너져 가는 왕조를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청년시절 옥고를 치른 이승만은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프린스턴 대학 박사를 따내고 동부와 서부를 오가며 왕성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암울한 조국을 구하려면 미국이라는 나라의 실체와 힘이 필요했을 것이다. 해방을 맞았을 때 그의 나이 71세, 노년의 한가운데로 접어들고 있었다.

한반도에 통일국가를 세우고 싶었지만 냉전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나마 미국의 지원으로 남한단독 정부를 만드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최초로 현대국가를 탄생시키고 초대부터 대통령을 지냈다. 하지만 그는 독재자로 낙인찍혀 망명지 하와이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몇 해 전 공영방송이 만든 3시간짜리 다큐멘터리를 다시 보았다. 한국정부를 세우고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그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 가슴이 뜨거워지는 역정들이 담겨 있었다. 이 애국자를 우리는 아직도 독립영웅의 자리에 올려놓지 못하고 있다.

아시아의 두 식민지에서 호치민과 이승만은 동시대를 살다 떠났다. 한 사람은 사회주의를 택했고 한사람은 자유주의를 택했다. 한 사람은 통일을 이뤄내 국민적 영웅으로 남았고 한 사람은 반쪽짜리 정부의 수반을 지내다가 죽어서도 독재자의 오명속에 갇혀있다. 두 사람의 생을 통해 이데올로기의 선택이 운명을 좌우한 역사의 뒷모습을 보았다.

두 사람은 똑같이 유교문화권에서 자랐다. 그러나 각기 다른 이데올로기로 조국을 구하려 했다. 민족자결주의를 외친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비슷한 시기에 독립을 원하는 간절한 편지를 썼다. 돌이켜보면 그들은 공산주의자나 자본주의자이기 이전에 진정한 민족주의자였던 셈이다. 어떤 선택이 그 시대의 운명이었는지는 개인의 영역을 뛰어넘는 문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이만큼 올라왔고 베트남은 우리와의 협력으로 새로운 길을 가고 있다.

호치민 박물관을 나와 사이공 강변에 섰다. () 주석은 영웅을 넘어 신격화된 위치에서 넘치는 존경을 받는데 이()박사는 아직도 대다수 국민들에게 잊혀져가는 독재자다. 한쪽은 넘쳐서 거슬리고 한쪽은 모라자서 아쉽다. 아시아의 두 민족주의자를 보면서 우리는 어떤 벽을 더 넘어서야 하는지 생각이 혼란스러워진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대표기자 justin-7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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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20-01-20 16:07:15
한국인은 행정법상 모두가 유교도임. 주민등록에 조선성명인 한문성씨와 본관을 의무적으로 등록해야 하는 나라. 중요한것은 동아시아 유교국가(중국,한국,베트남,몽고. 그리고 2차대전이후의 대만.싱가포르 및 전세계 화교들)에는 하느님(天),계절의 신,산천의 신,조상신,공맹숭배,한문성씨.본관, 한자,삼강오륜,인의예지신,충효,관혼상제,한자,명절이 수천년 체화된것.




한국은 수천년 세계종교 유교나라.불교는 한국 전통 조계종 천민 승려와 주권없는 일본 불교로 나뉘어짐.1915년 조선총독부 포교규칙은 후발 국지적 신앙인 일본신도(새로 만든 일본 불교의 하나).불교.기독교만 종교로 인정하였는데,일본항복으로 강점기 포교종교는 종교주권 없음.

부처는 브라만교에 대항해 창조주를 밑에 두는 무신론적 Monkey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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