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승환 성신여대 융합문화예술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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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승환 성신여대 융합문화예술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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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뮤지컬 구상 中-日 공략 준비"

공연불모지인 한국에서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1999년 영국 에딘버러 음악축제에 첫 출전한 '난타' 팀이 129개 참가팀 가운데 '베스트 10'에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다. 에딘버러 페스티벌은 세계가 인정하는 권위 있는 음악축제. 난타는 이 수상을 계기로 이후 37개국 232개 도시에서 공연하는 한국의 대표문화상품으로 자리매김했다. 해마다 늘어나는 관객들을 위해 한국최초의 전용극장도 지었다. 미국을 가면 브로드웨이에 들러 뮤지컬을 보는 것처럼 중국과 일본 관광객들에게 난타관람은 이제 한국여행의 필수코스로 자리 잡았다. 유명한 공연은 외국의 전유물인줄 알았는데 우리공연의 우수성과 가능성을 당당하게 확인해낸 것이다. 난타를 만든 주인공, 송승환 성신여대 융합문화예술대학장을 만나본다.

 

 

Q. 난타하면 송승환, 송승환 하면 난타로 각인돼 있습니다. 난타의 출발은 어떻게 이뤄진 것인가요.


==1997년에 국내 최초의 넌 버벌(Non-verbal) 퍼포먼스로 난타를 기획했습니다. 대사가 없어야 국제적으로도 공연이 가능하다는 장점 때문에 주방에서 무지막지하게 난타하는 신나는 내용으로 만들었는데 이게 통했습니다. 말이 없고 액션이 넘치고 관객들도 호응할 수 있는 기획물을 찾다가 고심 끝에 내놓은 작품이었죠. 그런데 당시는 외환위기 상황이어서 우선 기획제작비를 대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돈 꾸러 다니는 게 제 일이었고 관객모집은 두 번째였습니다. 실험적으로 내놨는데 조금씩 사람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차츰 알려지게 되었던것 같습니다.


Q. 그 난타가 결정적으로 성공할 것 같다는 감을 잡은 것은 언제였나요?


==1999년 영국 에딘버러 페스티발 출전부터였습니다. 이 음악제 참가를 위해 국내 최초로 공연작품 캐릭터를 개발했죠. 난타의 등장인물에 대한 캐릭터를 설정해서 배우를 선발하고 훈련한 겁니다. 그리고 현지에 가서 팀원들이 준비기간 동안 매일 포스터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왕래가 잦을만한 거리와 골목 곳곳을 누비며 각 지역에 모조리 붙였습니다. 여비는 쪼들리고 공연은 성공시키고 싶고 그래서 정말 필사적으로 붙이고 다녔습니다. 그런 정성이 통했는지 난타가 언론의 시연회에 나와 달라는 초청을 받았고 1260개 참가팀 가운데 주목을 받는 계기가 됐습니다. 또 이 대회에서 '베스트10'에 선정돼 도약의 출발점이 된거지요. 에딘버러 축제 53년 만에 한국 공연물이 처음으로 참가했고 참가 첫 대회에서 우수작품으로 인정받았으니까 운도 많이 따랐다고 봅니다.

 

Q. 에딘버러 이후 난타의 운명이 달라졌는데 지금까지도 대단한 성공을 거두고 있지요.


==유명한 음악제에서 인정받는것이 그렇게 큰 것인줄 몰랐습니다. 우선 국내에서 싸늘했던 관객들의 반응이 정반대로 바뀌었음은 물론이고 해외공연요청이 쇄도해서 저 자신도 놀랄 지경이었습니다. 자신감을 얻은 난타는 국내 공연이 늘어나게 되고 점차 인기가 올라가면서 부채에 허덕였던 오랜 시간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해외 공연문의가 늘어나 40여개국을 순회하며 수백회의 공연으로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데도 크게 기여했다고 봅니다.

말하자면 난타가 미국의 '브로드웨이 아시아' 라는 회사를 만나면서 세계적인 공연기획사와 보조를 함께 할 수 있었다는걸 성공의 한 요인으로 보는거지요. 이를 통해 난타의 해외배급계약을 채결하고 각국의 공연기획 제작사들과 네트워크를 통한 활동이 펼쳐져 전 세계 프로모터들에게 자연스럽게 난타를 알리는 기회가 됐습니다. 디즈니 월드가 저희를 초청해주고 일본 프로맥스사와 계약을 맺어 도쿄 오사카 등 주요도시 공연도 성사 되었습니다. 미국과 일본시장에서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Q. 난타를 통해 성공을 거두시고 전용극장을 만든 것이 우리나라 공연문화의 또 하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것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사실 공연하나를 무대에 올리기 위해 전용극장을 만든다는 것이 그 이전까지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2000년 7월 서울 정동에 국내최초로 난타 전용극장을 개관시켰습니다. 목표는 이런 거였죠. 효율적인 극장 인력운영과 마켓팅 비용절감, 또 연중 같은 장소에서 연중무휴로 공연할 수 있다는 점, 여기에다 작품의 완성도가 점점 높아진다는 장점 등이 매력이었습니다. 라스베가스 벨라지오 호텔의 '오 쇼'가 세계적인 공연물입니다. 지하1층 전용극장을 지어 벌써 20여년 가까이 같은 공연을 해오는데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런 트랜드를 고려한것이지요. 이같은 고정수익과 함께 틈새시장도 눈여겨 봤습니다. '한해 800만명의 관광객이 한국을 방문하는데 이들이 재미있게 보고 갈 공연으로 난타를 만들자. 성공가능성이 보인다.' 뭐 그런 생각으로 전용극장을 추진했는데 어려움도 많았었습니다. 일본과 중국 관광객을 상대로 치열한 홍보전을 펼쳐서 지금은 방문객 80%정도가 저희공연을 보고 떠나는 것으로 집계하고 있습니다.

 

Q. 난타만 가지고는 앞으로 더 다양한 공연을 펼쳐나가는데 한계가 있어보이는데 구체적인 기획들을 하고 계시는지요?


==당연합니다. 난타로만 버티기에는 이미 한계에 와있고 또 인기가 있다하더라도 다음공연을 준비해야 합니다. 캐릭터 변화나 식음료 재료를 통해 아니면 게임 등의 창구 다양화로 영역을 확대해 볼까 합니다. 일본과 중국 동남아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창작뮤지컬도 구상중입니다. 어차피 아시아시장에서 리더역할을 하는 것이 곧 세계화의 지름길이니까요. 이밖에 비언어극, 말하자면 대사가 없는 기획물로 미주나 유럽 시장을 대상으로 한 새로운 미래공연물도 준비중입니다. 난타의 성공이 영어대사가 거의 없는 동작으로 보여주는 비언어극입니다. 관광시장의 흐름이나 그들의 취향도 면밀히 관찰해서 어떤 공연으로 지속성 있게 난타 이후를 끌고 나갈까를 고민하는 작업들을 하고 있습니다.

 

Q. 미국이 세계의 문화상품을 장악하고 있는데 영화나 뮤지컬, 미술, 재즈 등 너무나 많은 분야에서 대단한 파워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자극을 받을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엄청난 무역적자에 시달리는 미국이 먹고사는 비결은 국방과 문화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영화나 문화상품은 침투력이 빠르고 한번 맛을 들이면 중독성이 아주 강해서 바로 상품의 구매력과 연결됩니다. 지난 50여 년동안 미국영화가 전 세계시장을 좌우해왔는데 그 영화에 나오는 가구나 자동차 ,패션, 각종 장신구 등이 모두 상품 마케팅의 시작입니다. 미국의 첫 번째 홍보창구역할을 한다는 것이지요. 잭슨 폴락이라는 미국화가가 70년대에 추상미술을 만들어 세계의 유행을 뉴욕으로 집결시켰습니다. 이러한 흐름을 만들기 위해 미 CIA 까지 동원했다는 증언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미술시장의 대부분을 뉴욕의 브로커들이 좌우합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에 진입하고 있다고 국가적 선전이 요란한데 선진국은 소득숫자만 높아진다고 되는것이 아니라 이러한 문화산업의 수준이 함께 높아져야 진정한 대접을 받을수 있습니다. 디자인과 문화적 스토리 텔링이 가미된 상품개발이 미래의 경쟁력이라고 봅니다

  

Q. 그럴려면 각 분야의 전문가 육성이나 공연문화의 투자가 지금과 같이 낮아서는 어렵지 않습니까?


==대학로에서 하루 150개 정도의 각종 공연이 벌어집니다. 영화관, 오페라, 음악공연까지 다 합쳐도 우리나라 연간 공연시장 규모는 5천억 원을 넘지 못합니다. 중견기업 한곳의 연간 매출액 정도를 가지고 이렇게 법석을 떨고 있습니다. 이 한계를 넘어서려면 먼저 탁월한 작가들이 나와 줘야 합니다. 공연에 어느 정도 투자를 할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는데 스토리텔러가 없습니다. 또 관객들의 의식속에 퍼져있는 초대권과 공짜 티켓 전통이 사라져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투자와 수고를 거쳐서 만들어진 문화상품인데 그것을 공짜로 보려고 합니까. 친구가 식당 개업했다고 하면 가서 갈비탕 공짜로 먹습니까? 정당한 문화상품가격을 지불하는 풍토부터 이뤄져야 한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기업활동과 정부지원을 바탕으로 '코리아 프리미엄' 만들기를 지속적으로 펼쳐야 합니다. 한류붐을 타고 아시아 지역에서 한국문화상품은 이제 보편화되었습니다. 이들이 계속해서 한국에 매력을 갖도록 히트상품들이 따라줘야 합니다. 그런 선순환 구조가 성립되면 우리나라 문화상품의 세계화는 가능하다고 봅니다.


Q. 공연전문가에서 대학교수로 변신하셨는데 차이가 많나요.


==생활은 같습니다. 공연기획사 사장이나 대학교수나 저의 관심분야는 문화상품 쪽이니까요. 다만 대학교수를 해보니까 우리나라의 교육이 참 문제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제가 강의하는 학생들에게 창작품을 만들어 보라고 숙제를 주고 4~5명씩 팀작업을 시켜봤습니다. 일주일쯤 지나서 심사를 하려고 불러 모았더니 학생들이 오히려 교수인 제게 항의를 하는 거예요. 어떻게 만들지 방법도 안가르쳐주고 숙제만 내주면 우리가 뭘 해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참 기가 막히는 일 아닙니까. 암기위주로 입시공부만 하다 보니까 창작학습을 해본 경험이 없거든요. 창작 학습의 기본 태도부터가 안 돼있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교육을 미국이나 선진국처럼 창의적 방향으로 바꿔주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봅니다. 가르치면서 좋은 공연을 기획해서 세계적인 상품을 연달아 내놓겠다는 것이 우선 당면한 저의 목표입니다. 이제 경제도 좋지만 소득이 2만달러를 넘어가면서부터는 문화강국으로 가야 국가의 위상과 국격이 높아진다고 보아야 합니다.


◇ 송승환 약력


△보성중·휘문고등학교 졸업

한국외국어대 아랍어과 명예졸업

 

1965 KBS 아역배우 데뷔

1977년 극단 76극장 입단

1989년 극단 환퍼포먼스 창단

1996PMC 프로덕션 창립

 

성신여대 융합문화예술대학 학장

문화산업포럼 공동대표

한국뮤지컬협회 이사

메세나협의회 홍보대사

PMC 프로덕션 대표이사

 

대담-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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