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 상사 안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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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 상사 안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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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저쪽이 제고향인데 이렇게 가까이 와보고도 못 건너가니 가슴이 미어집니다"중국과 북한의 접경지인 투먼(圖門)에서 두만강변을 따라 내려가다가 강폭이 비교적
2010.12.02

 

북한군 상사 안찬일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저쪽이 제 고향인데 이렇게 가까이 와보고도 못 건너가니 가슴이 미어집니다"

 

중국과 북한의 접경지인 투먼(圖門)에서 두만강변을 따라 내려가다가 강폭이 비교적 좁은 곳에 서서 북한 땅 신의주쪽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함께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불러주는 내 가슴에서도 이유 없는 슬픔이 주체할 수 없이 소용돌이 쳤다. 강변에 털썩 주저앉아 망연자실한 시선으로 북한 땅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시선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아픈 기억으로 내 가슴속에 남아 있다.

 

안찬일은 북한군 민경대대 부 소대장 상사였다. 서부전선을 넘어 귀순했던 1979년 그의 가족들은 요덕수용소로 보내졌다. 25살에 북한노동당원으로, 김일성대학 추천 우수학생으로, 서부전선 북한군 민경대대 상사로, 누가 봐도 북한 사회에서 탄탄대로를 걷던 그였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서울을 향했다. 안 상사가 귀순한 뒤 10여 년 만에 나는 그와 인연을 맺었다. 대학원 수업을 함께 들으면서 지나치게 순수하고 성실한 그에게 끌렸고 우정은 깊어졌다. 그때 이미 그는 당시 현대건설 이명박 사장의 배려로 취직이 되었고 학비보조를 받으면서 고려대를 마친 뒤 결혼까지 한 상태였다. 춘천 출신의 아리따운 신부는 안찬일의 서울 나침반이었다.

 

1991 9월 우리는 그의 고향 신의주 가까운 중국의 접경지역에라도 한번 가보기로 결심하고 짐을 꾸렸다. 한중 수교 이전이어서 중국비자는 홍콩의 신화사 분사를 찾아야 가능했다. 심천특구와 가까이 접해 있는 구룡반도에서 하루를 묵은 뒤 중국 행 붉은 비자도장을 받았다. 앳된 북한청년 안찬일이 북에서 남으로 사선을 넘은 뒤 처음 나서는 해외여행 길이여서인지 그는 잠시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다음날 비행기를 타고 북경으로 들어갔고 다시 국내선 항공기로 동북3성의 교통요충지 장춘에 내린 뒤, 그곳에서 길림성 연길 행 밤기차를 탔다. 야간열차의 차창으로 스치는 만주벌판의 가을밤을 대하는 그의 얼굴에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했다. 그날 밤 안찬일은 자신의 얘기를 참으로 많이 들려주었다. 연변과 백두산을 거쳐 두만강변 투먼까지 들어가는데 꼬박 나흘이 걸렸다.

 

강 너머로 보이는 고향 신의주를 눈앞에 두고 노래로 향수를 달래면서 돌아서야 했던 그는 서울까지 오는 동안 말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강변에서 유리병에 담아온 두만강의 흙모래를 품에 안고 간간히 어루만질 뿐이었다. 대학원을 마친 그는 건국대에서 박사학위를 따내고 국정원으로 직장을 옮겨 십여 년을 근무하다가 미국 유학까지 다녀왔다. "탈북 1호 박사"로 알려지면서 지금은 서강대 교수와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까지 맡게 되었고 귀순 주민들의 리더 역할을 해내고 있다.

 

연평도 폭격이 발생하고 나서 오랜만에 그를 다시 만났다. 세월을 이길 수 없는지라 중년의 무게감이 물씬 느껴진다. 자신의 귀순 이후 30여 년 만에 탈북주민이 2만 명을 넘었고 중국과 베트남, 미국 등 세계 10여 개국에 흩어져 있는 3천여 명까지 합하면 곧 '탈북주민 3만 명 시대'를 돌파할 것이라고 한다.

 

"어차피 종착역은 정해져 있는데 저들의 도발로 시간만 자꾸 더디어 지는 것 같습니다"

"종착역이 어디인데요?"

"북한은 무너지게 돼 있고 불쌍한 인민들만 중국이나 남한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날이 멀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저들은 백성들을 굶기면서도 왜 천안함을 공격하고 연평도 사건을 일으키는지 모르겠군요"

"이것은 그들이 점점 궁지에 몰리고 있다는 증거이고 속이 다 보이는 수법입니다. 좀 더 단단히 대비하는 것은 좋지만 그렇다고 지금 흥분하고 전쟁준비를 하듯이 분위기를 몰고 가는 것은 안됩니다. 저들은 이미 남한의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북한의 두 얼굴에 국민들이 넌더리를 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내해야 합니다. 시간은 남한편입니다. 감정이 좀 가라앉으면 김정일 정권을 다양하게 압박하되 북한 주민들은 따뜻하게 끌어안는 이중전략이 지속돼야 합니다. 우리정부가 좀 더 유연해져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32년 전 군사분계선을 넘으면서 안찬일은 '김일성 총 비서님께' 쓴 종이편지를 철조망에 끼워뒀다고 한다.

 

 "총 비서님.

  능력에 따라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당의 정책이 잘 실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인민들이 당의 정신을 믿고 따를 수 있도록 부디 시정해 주십시오".

 

혈기왕성하고 순수했던 청년 안찬일은 모순투성이인 북한 사회를 이해하지 못했다.

남한으로 넘어온 뒤 살만해진 이제 그는 통일보다 남북이 그저 그렇게 공존하는 방식을 선호하는 듯한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털어놨다.

 

남북관계의 미래대안이 전쟁이 아닌 평화적 해결방법이라는 것을 다 알면서도 양측모두 치열한 대결구도의 가면을 벗어 던지지 못하고 있으며 그것이 한계라는 것이다.

 

성균관대 입학을 원했던 자신을 모교인 고려대에 보내준 현대건설 이명박 사장은 지금 대통령으로 국가를 통수하고 있다. 잊지 못할 남한의 은인, 이 대통령에게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단다.

 

"대통령님. 저는 망가져 가는 김정일 정권보다 점점 더 불어나는 탈북주민들이 더 걱정입니다. 다른 나라 수뇌들이 다 만나주는 탈북주민들을 대통령님은 언제까지 외면하실 작정이신지요. 끌어안아야 더 큰 미래가 있습니다. 대통령님. 새벽이 오기 직전의 어둠이 가장 짙습니다. 이 고비를 잘 견디어 내면 곧 동이 트는 현장을 보게 되실 것입니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consumertime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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