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를 뒤덮은 한국제품들, 그 뿌듯함을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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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를 뒤덮은 한국제품들, 그 뿌듯함을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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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년에 호주 퀸스랜드 주도인 브리스베인으로 이주해서 정착한 후 10 년 만에 이곳 퀸스랜드 주정부의 초빙을 받았다. 1년을 주정부 개발성에서 대 한국 교역 및 투자담당 자문관으로 일하다 초대 퀸스랜드 주정부 한국대표부 대표로

 

2010.11.01

 

 

 

 

 호주를 뒤덮은 한국제품들, 그 뿌듯함을 아는가

 

 

 1989 년에 호주 퀸스랜드 주도인 브리스베인으로 이주해서 정착한 후 10 년 만에 이곳 퀸스랜드 주정부의 초빙을 받았다. 1년을 주정부 개발성에서 대 한국 교역 및 투자담당 자문관으로 일하다 초대 퀸스랜드 주정부 한국대표부 대표로 서울에 대표부를 개설하고 10년 동안 퀸스랜드주와 한국의 무역 및 투자, 교육, 지역간 자매 결연 등 상호 미미했던 관계를 급성장하는 세계경제의 흐름에 따라 높은 차원으로 끌어 올려 한국이 퀸스랜드주의 제2의 시장으로 부상하는데 나름 일조를 하고 10년 만 2009 4월에 브리스베인으로 돌아왔다.

 

 잠깐이라고 생각했는데 20년을 넘겨 버렸고 그 20년 동안 세상은 너무나 변해 버렸다. 브리스베인에 처음 도착했을 때, 한국국적기의 직항로가 없어서 싱가포르 항공으로 서울-싱가포르를 경유해  20시간이 넘어야 도착한 브리스베인 국제공항(Brisbane International Airport)은 한마디로 실망 그대로 였다. 당시 한국의 속초 공항 정도의 아주 소규모의 공항청사를 보면서 아주 시골에 요양차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죽하면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아들녀석이 서울로 다시 돌아가자고 공항에서 떼를 쓰기도 했었다. 제 딴에는 외국으로 처음 비행기라는 것을 타고 왔는데 뭔가 화려하고 요란할 것 같은 기대가 우리가 떠나온 김포공항 보다 훨씬 규모가 적은 것을 보니 터무니 없는 시골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호주대륙이 워낙 타 대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그 당시만 해도 외국과의 교역이 멜보른과 시드니를 중심으로 이루어 지고 있었기 때문에 국제선 항공기도 모두 시드니 공항을 이용했고 브리스베인으로 도착하는 항공은 겨우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었다.

 

그랬던 그 브리스베인 국제공항이 이제 시드니, 멜보른보다 더 현대적인 모습으로 규모면에서도 시드니 공항을 능가할 정도로 변모했다. 이는 호주가 그 주 교역상대국을 유럽과 북미대륙에서 아시아 권으로 옮겨오면서 이룬 변화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호주의 지구촌 6개 주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해변을 포함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산업의 재료인 제철용, 발전용 석탄등 엄청난 천연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그 주인공인 바로 퀸스랜드 주다. 특히 2차대전의 패배를 극복하고 세계의 경제대국으로 거듭난 일본은 이미 2차대전시의 침략 경험으로 호주가 얼마나 투자가치가 있는 곳 인가를 감지하고 있었고 자원의 보고 퀸스랜드주에 집중 투자하기 시작했다. 세계적 관광지로 알려져 매년 수백만 명의 관광객을 끌어 들이고 있는 골드 코스트(Gold Coast)를 비롯해, 6000여종의 생물이 서식하고 있는 세계최대의 해상 공원 '대 산호초 해안( the Great Barrier Reef)'을 끼고있는 케인즈(Cairnes)등 퀸스랜드 주의 유명 해변 도시들을 모두 일본 자본들이 개발,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관련 일본 산업들이 돈을 벌었고, 막대한 매장량을 자랑하는 퀸스랜드주의 각종 천연자원 광산을 개발하여 지금도 많은 광산의 지분을 소유하고 자원전쟁으로까지 불리는 이 시대에 일본은 그 혜택을 만끽하고 있다. 그랬으니 필자가 처음 도착했던 그 당시에는 도로위를 달리는 자동차의 절반이상이 일본차였다. 특히 토요타는 일반 소형차 및 호주 사람들이 많이 타고있는 전륜 구동 (4 wheel Drive)차 시장을 석권하고 있었고 고급차 부분에서는 극히 일부 독일의 벤츠 (Mercedes Benz) BMW를 제외하고는 혼다가 중,고급차 시장을 휩쓸고 있었다. 

 

반면 일본차와 유럽차 틈바구니에서 간혹 눈에 뜨이는 한국차는 소형 엑셀 (Excell)이 그 저렴한 가격 때문에 가끔씩 굴러다니곤 했다. 소형차는 단연 토요타의 코롤라(Corolla)가 압도적이었고 현대의 엑셀은 값이 싸 경력이 짭은 샐러리맨들이 선호할 뿐이었다. 소나타가 1989 6월에 처음으로 상륙했지만  일본차들의 기세에 눌려  싸구려 취급을 받았다. 전자제품은 SONY, PANASONIC 등 일본 제품들이 고급품으로  인기를 모았고 한국의 삼성과 LG제품은 그 저렴한 가격으로 중,하류 가정에 조금 팔리고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Made in Korea'는 90년대와 2000년대를 지나면서 판도를 바꿔 놓았다.  토요타와 혼다만 굴러다니던 도로 위를 현대차와 기아차가 당당히 달리고 있다. 현지인들도 토요타 만큼이나 성능 좋고 디자인이 좋은 것으로 인식돼 한국차는 이제 제 값을 받고 팔리고 있다(한국 국내 판매가 보다 비싸게 팔리고 있다).

 

지난 9월 호주 연방 선거가 있었다. 마침 필자가 사는 지역에 출마한 후보는 오랜 지인이었다.  필자가 퀸스랜드 주정부 대표로 서울에 주재할 때 한국을 방문해서 만난 사이이기도 하고 또 모친이 중국계이고 부인이 베트남 출신이라 동양계 정치인이 아직 극소수인 호주에서 동양계 의 진출에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선거운동을 도운 적이 있다.

 

여기서 선거 운동이라야 아침 저녁 출퇴근길에 목 좋은 자리에서 후보자의 사진이 든 피켓을 들고 손을 흔드는 정도이다. 그런데 이 선거운동 내내 필자의 마음을 뿌듯하게 했던 것이 있다. 바로 눈에 띄게 늘어난 'Made in Korea' 자동차 숫자다 2000년 초까지만 해도 보기 힘들었던 한국차들이 이제는 10대 중 최소 3대 정도는 현대나 기아차가 아닌가. 단순히 숫자뿐만 아니라 그 다양함에도 놀라움을 금치 못할 지경이다.

소나타, 그랜져, 앨란트라, i-20, i-30, 그리고 Tucson, Santafe, Carnival, Chairman까지 그의 모든 종류의 한국산 자동차들이 오히려 일본차종 보다 많이 눈에 띄었고 한국산차를 몰고 가는 사람들은 마치 필자가 한국에서 온 것을 아는 것처럼 마구 손을 흔들어 주었다. 참으로 가슴이 벅찬일이다. 기본적으로는 한국차들의 품질이 향상 되었기 때문이지만 현대 기아차의 뛰어난 마케팅 덕분이었다. 한국에서의 과감한 기술 투자와 더불어 해외시장 공략을 위한 적극적 마케팅으로 해외 바이어들에게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주기 시작 했던 것이다.

 

언제부턴가 전세계 테니스 동호인들이 시청하는 세계 4 대 테니스 그랜드 슬램 중의 하나인 호주오픈 테니스 대회에 기아차가 메인 스폰서가 되어 주 경기장의 모든 벽면에 기아차 광고가 등장했고 매년 호주 오픈 시상식에서 기아자동차 호주 법인장이 우승 시상을 하는 장면이 호주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방영되고 있다.호주인들이 가장 즐겨 보는 럭비를 비롯한 주요 경기에는 일본 제품들의 광고가 사라지고 한국 자동차와 전자 제품들이 주 광고주의 자리를 차지 한 것이다. 세계에서 호주인들 만큼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도 드물 것이다. 이는 자연이 준 천혜의 혜택인 아름다운 기후와 광대한 자연환경 탓이 아닌가 싶다. 이 스포츠광 들에게 스포츠 마케팅 만큼 효과적인 광고가 어디 있겠는가? 테니스, 골프, 각종 수상경기, 축구, 럭비, 크리켓등 호주에서 벌어지는 각종 스포츠 경기에 한국 자동차와 전자제품의 광고가 등장하지 않는 경기가 없다. 여기서 스포츠경기를 관람 할 때는 마치 한국 운동장에 외국 선수들을 불러놓고 경기를 하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한국 전자제품의 호주시장 점유율이 급상승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이 그 분기점이 되었다. 그때 쯤 아마도 오래 전에 시작됐던 뛰어난 삼성의 과감한 반도체 투자 덕분에 그 기술력과 규모면에서도 Sony를 비롯한 일본 제품들을 추월하기 시작 했을 테고 때 마침 시드니 올림픽을 계기로 IOC 위원이기도 한 삼성 이건희 회장의 결단으로 삼성 휴대폰이 시드니 올림픽의 주 스폰서로 등장 했다. 그 때까지 전자제품 기술력에서 일본에 뒤 떨어진 것으로만 알려져 있던 한국의 기술력이 호주인 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하고 자국에서 벌어지는 시드니 올림픽에 주 스폰서로서 삼성이 기여한 점등을 호주사람 들이 높이 평가하면서 순식간에 삼성의 시장 점유율이 소니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호주 각종 스포츠경기에 삼성전자가 주 스폰서로 등장하면서는 가격과 품질면에서도 당당히 전자제품 판매대의 최 상단에 자리잡게 되었다.

 

이 때쯤 한국 전자제품의 위상을 공고히 만드는 또 다른 계기가 된 것이 호주에서 처음 시작되어 전 세계로 전파된 LG 전자의 기업 이미지(CI) 광고였다.  그 때까지 LG 라고만 알려져 있긴 했으나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무엇의 약자인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던 LG라는 회사명칭에 획기적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세계인들의 뇌리에 각인되기 시작한 한 줄의 광고, "Life is Good" "인생은 멋진 것"이라는 LG CI가 마치 호주인들의 Life Style을 대신 말해 주듯 호주인들의 정서와 그대로 맞아 떨어져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LG의 전자제품 역시 삼성과 나란히 호주시장에서 일본제품을 추월하기 시작 했다. 오죽하면 사무실에 출근하면 장관들 까지도 나에게 "Good Morning" 이라는 아침인사 대신에 "Life's Good"이라고 아침 인사를 대신 할 정도 였으니까 과히 이 광고의 위력을 실감 할 수 있지 않겠는가.

 

10 년 만에 다시 이곳 브리스베인으로 돌아와 보니 그 동안 모든 것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어 버렸다. 해서 20년 전에 샀던 모든 전기,전자 제품을 디지털제품으로 바꾸기 위해  브리스베인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전자제품 매장을 몇 군데 찾아다녔다. 돈 주고 물건 사면서 이렇게 기분 좋고 가슴 뿌듯한 경험은 평생 처음이지 싶었다. 그렇게 SONY, PANASONIC, JVC 등 일본제품에 눌려 뒷전에 숨어있던 삼성과 LG LCD TV, DVD RECORDER 그리고 냉장고, 에어컨 등이 매장의 최중심에 자리잡고 있질 않은가. 그 뿐 아니라 가격도 SONY보다 비싸서 이제 최 상류층들이 사가는 최고급 품으로 당당히 그 위용(?)을 뽐내고 있으니 이 어찌 감회가 새롭지 않겠는가. 인구 6천만의 조그마한 한반도 Korea G-20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경제 규모면에서 세계 열 몇 번 째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국내에서 낙후된 정치인들의 공세에 시달리고 각종 정부 규제에 시달리고 그리고 철(?)없는 시민 단체들의 각종 위협과 협박에 시달리면서도 이렇게 한국의 기업들은 한국의 위상을 세계인들의 가슴에 각인 시켜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 기업의 총수나 최고 경영자들이 국내에서 그렇게도 매도 당하고 정권이 바뀔 때 마다 검찰청으로 재판정으로 불려 다니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이렇듯 한국인의 자부심을 해외에서 드높이고 있다는 사실, 국내에 거주하는 모든 이들이 좀 알아 주었으면 싶은 마음 간절하다. 해외에 거주하는 한민족들은 매일을 이들 한국의 기업인들에게 박수를 보내면서 살고 있다는 사실도 덧붙이고 싶다. 한국의 위상을 세계에 드높이고 있는 것은 정부도 아니요, 정치인들은 더더구나 아니며 바로 한국의 기업들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필자가 호주 정부에서 오래 일을 해왔고 일 때문에 정부고위 인사나 이곳 경제인들과의 교류가 비교적 많은 편이다. 이들과의 대화에서 한국의 POSCO 가 어떻게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면서 세계 철강산업에서 최고의 건실한 제철사로 자리 매김하게 되었는지 Daewoo International이 어떻게 변모했고 어떻게 현대.기아 자동차가 짧은 시간 동안에 세계적인 토요타의 경쟁상대가 되었는지, 삼성과 LG가 어떻게 'Korea 주식회사'를 끌고 가면서 일본을 압박하고 있는지, 그리고 효성이 어떻게 발전설비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우뚝 설 수 있었는지, 두산은 어떻게 중동의 담수화 플란트 건설을 독점하다시피 할 수 있는지, 또 한화 그룹은 또 다른 분야에서 호주인들과의 경제협력 분야에서 새 위상을 정립해 나가고 있는지 하는 것들이 대부분의 화두이다. 참으로 달라진 한국의 국가위상이요, 최소한 이제 Korean으로써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달라진 국력과 국가위상, 한국 기업들의 인지도 그리고 세계 최고의 품질로까지 인정 받게 된 삼성이나 LG의 브랜드 이미지와는 반비례로 아직도 60년대의 미개발국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이 한국인들의 국민성과 문화의식 그리고 교육이다. 해외에서 살다 보면 일본인들을 대하는 현지인들의 절대적인 호감에 질투를 느낄 정도이고 중국인들의 단결력과 자부심에 경의를 느끼고 한국인들의 무질서와 패거리 문화에 절망한다.

 

필자가 20년 이상을 호주에서 생활하면서 과거 제국시대의 온갖 만행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그리고 일본인을 평가 절하하는 얘기를 들어 본적이 없다. 필자가 아는 호주인들은 일본인은 항상 예의 바르고 신용 있고 (reliable) 또 도움을 받으면 언제까지나 고마움을 잊지않는 민족으로 평가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그 특유의 단결력으로 세계 어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듯이 가는 곳마다 차이나 타운을 스스로의 힘으로 건설하고 서로 도와가며 현지인들을 차이나 타운을 찾아 돈을 쓰게 만든다.

 

그러면 유구한 역사와 아름다운 금수강산의 정기를 타고난 우리의 배달민족은 어떠한가. 해외 어디를 가도 패거리 문화에 젖어있는 한민족은 몇 십 명만 되면 벌써 향우회, 동창회, 해병대 전우회 등등 각종 이름으로 모임을 만들어 끼리끼리만 몰려 다닌다. 멀리 타국에 살면서 서로 돕고 의지하며 오순도순 어울리는 것이 왜 아니 좋겠는가? 문제는 자기 그룹에 속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적대시 하는데 있다.

 

한국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또 교회는 왜 그렇게 많은지? 몇 명만 모이면 교회가 하나씩 생겨난다. 참으로 유별난 신앙심이다. 깊은 신앙심을 누가 탓하겠는가? 문제는 교회마다 생겨나는 내분들이다. 담임목사와 부목사의 갈등, 그래서 누군가가 뛰쳐나가 또 새로운 교회를 새운다. 서로의 비방전이 입과 입을 통해 퍼져 나간다. 한국전래의 종교인 불교의 절은 또 어떠한가? 신도회라는 명목으로 주지스님을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밀어 내 버린다.

 

한인회는 또 어떠한가? 해외동포 참정권 문제가 국회에서 거론 되자 말자 무언가 이를 계기로 한 몫 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서인가? 한인회장 투표권이 없는 유학생들까지 차로 실어 나르고 한인 회비를 대납해 주고는 한국국회 그대로의 모습대로 여기서도 날치기 통과로 유학생 투표권 자격 부여를 가결한다. 이런 날치기 덕분에 당선된 회장과 낙선된 후보가 따로이 몇몇 지지자들의 서명을 받아 별도의 회장선거를 치루고 두 명의 한인회장이 탄생하고 소위 현지 한인 미디어를 통한 계속되는 비방전. 참으로 한국의 정치판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아 차마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사태가 필자가 아는 한 모든 재외 한인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건 아닌지. 피땀 흘려 부모님들이 보내준 돈으로 공부보다는 끼리끼리 몰려 다니며 마음껏 부모나 주위의 간섭 없는 자유를 만끽(?)하며 Ugly Korean의 대명사로 등장한 유학생들.

 

예를 들자면 같은 한민족으로 느껴야 하는 회의는 끝도 없다. 물론 모두가 그런 건 결코 아니다. 이 모든 것이 유아 때부터 잘못 길들여진 우리네 교육 탓이 아닌가 싶다. '엄친아'라는 말이 유행하고 언제나 과정보다는 결과만을 평가하는 가정과 사회풍토, 어떤 거짓말로도 일단 이기고 나면 비열함과 부도덕마저 정당화 되는 사회. 패자는 어떠한 훌륭한 심성과 정당한 노력을 기울였더라도 실패자로 낙인 되는 사회.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파지는 사회. 동료를 칭찬하기 보다는 깎아 내리는 그 심성, 사회의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TV 드라마는 부도덕과 비열한 복수극의 극치일 뿐 사회공기로서의 의무는 외면한 후안무치의 대명사가 된지 오래다.

 

G-20 정상회의 개최도 중요하고 세계 점유율 1위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렇게 높아진 'Made in Korea'의 위상에 걸맞게 더 늦기 전에 위대한 우리 배달민족의 차세대를 위하여 정부와 사회가 힘을 합쳐 경쟁자를 칭찬할 줄 알고 공동사회에 어떻게 기여하며 비록 실패하더라도 과정이 결과보다 얼마나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전인 교육에 온 역량을 쏟아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필자소개

 

 

1946년 경남 진주 출생. 성균관 대학교 영어 영문학과 졸업.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로 활동, 럭키화학과 럭키개발에서 근무했다. 1989년 호주 브리스베인으로 이주한 뒤 호주 퀸슬랜드 주 정부 개발성 해외투자담당 상임고문과 초대 퀸슬랜드 주정부 한국 무역및 투자대표부 대표(2000. 12- 2009. 4)를 거쳤다. 현재는 호주 East West Park Lines사 Project Direc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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