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익중 설치미술가
상태바
강익중 설치미술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순수하고 당당한 '달항아리'…글로벌 아트리더로

뉴욕의 여름은 뜨겁다. 기록적인 더위로 아스팔트가 녹아내리고 거리의 관광객도 지쳐서 뜸한 맨하탄의 오후. 그래도 화가 강익중은 작업의 손을 놓지 않는다. 가장 한국적인 미에서 가장 세계적인 미를 찾아내는 그의 손끝은 부지런히 만들고 칠하고 움직이면서 조선시대 도자기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미술세계를 이끌어내고 있다. 도자기를 구워내 모자이크처럼 붙여낸 대형 설치물부터 한글의 자모를 형상화해 외벽에 설치하는 기법으로 주목받는 작품을 수차례 미국과 한국, 중국 등에서 전시해 화제를 모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 미국으로 떠났던 강익중은 이제 50대에 접어들었고 한국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알아주는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허드슨강 부두가 내려다보이는 건물 29층에 자리 잡은 작업실에서 강화백은 아이들 같은 순수하고 해맑은 모습으로 기자를 맞았다.

 

 

#문-미술을 좋아하는 DNA가 몸속에 녹아있는 겁니까? 이 작업실에만도 너무 좋은 달항아리 연작과 한글작품들이 전시돼 있는데 정말 독특합니다.


답=아버지와 식구들에게 들은 얘기입니다만 조선시대 뛰어난 문인화가였던 강세황과 강희안이 저희 몇 대 전의 조상들입니다. 조선후기 유학이 전성기를 이뤘던 때 문인들이 문장과 그림공부를 하고 지금까지 이름을 떨친 분들이 많은데 이 두 분은 특히 유명해서 강씨 문중에서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지요. 서양에서도 그랬지만 그시대에도 역시 지식인들은 문학과 사상, 철학이라고 하는 문.사.철의 인문학과 예술을 공부해야 평가를 받았지 않나 생각되구요. 그런 차원에서 강희안 등이 그림을 그렸을 것입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조선시대 도자기를 응용해 만들어내는 달항아리 연작은 그런 음덕이 아무래도 묻어있지 않을까요.


#문-오래 전부터 언론을 통해 많이 듣고 보았습니다. 어린이들에게 꿈을 주려고 했다는 병원 설치미술은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특별한 배경이 있었던가요?


답=동기는 간단합니다. 이 세상에는 아픈 어린이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누워있거나 불편한 어린이들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전 세계가 꿈으로 연결됐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어요. 서울 아산병원에 설치한 '희망의 벽'그런 저의 바람을 나타낸 거죠. 미국 신시내티 어린이 병원과 충남대 병원 등에도 그런 작업들을 했습니다. 앞으로는 북한 어린이를 위해서 그들의 꿈을 담아내는 작업도 시도중입니다. 김일성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12년에는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요. 어떤 권력이든 100년을 가기는 어려운 거니까. 북한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문-올해 상하이 엑스포 행사에서는 한국관 방문객들이 그곳에 전시된 산업제품보다 강화백의 설치미술을 더 인상 깊게 기억하는거 같습니다. 전시관을 만든 기업과 정부가 좀 섭섭해 하지 않을까요? (웃음)


답=저는 늘 한민족의 에너지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을 갖고 살아왔습니다. 오는 10월까지 전시가 되지만 상하이 엑스포 한국관은 역대 국제 전시관가운데는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6000 제곱미터의 한국관 전체를 우선 단청색으로 꾸미고 1층은 서울을 300분의 1로 축소해서 산과 강이 어우러진 동양의 미를 넣도록 제작진들이 노력했습니다. 밤이 되면 한국관 외벽이 4만2천개의 한글 픽셀에 부착된 친환경 LED 조명으로 마치 빛 속에 떠있는 듯한 느낌을 주도록 해봤습니다.  다녀오신 분들이 한국 픽셀을 보고 많이들 얘기하십니다.

저는 수많은 외국인들이 한국관을 돌아보고 우리가 갖고 있는 한글의 아름다움과 문화를 함께 이해해 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문-지금은 광화문 공사가 완공돼 철거됐습니다만 몇 년 동안 강화백의 작품이 광화문 광장벽에 장식돼 있었습니다. 올 봄에는 서울에서 모처럼 전시회도 가지셨지요?


답=광화문 가로 전시는 옛 건물을 허물고 새로 짓는 복원공사 가림막에 설치작품으로 만들었던 겁니다. 일부러 전시장을 찾지 못하는 행인이나 모든 시민들이 즐길 수 있는 기회가 되었지 않나 생각합니다.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지난 5월에 있었던 전시는 14년 만이었습니다. '바람으로 섞이고 땅으로 이어지는 우리네 삶'을 주제로 열렸는데 달항아리 1392개를 배열해 만든 작품을 비롯해서 저의 작품세계를 좀 더 심화시켜 전시했습니다. 1392라는 숫자는 제가 도자기를 바탕으로 작품을 만들고 있는데 조선의 건국연대가 바로 이 숫자입니다. 또 인왕산을 배경으로 한 작품 '산'이라든가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포착한 이미지들을 수백 개의 작은 화면에 그린 '행복한 세계'등은 그림을 통해 인종차별이나 민족분쟁같은 비극을 막고 서로간의 벽을 허물자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사는 것이 기차 여행 같은 것 아닌가요. 같은 기차에 타서 서로 같은 풍경을 바라보는 것, 모두가 인연입니다. 우리는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제각각이지만 모두 이어져 있습니다. 서울 전시회에 많은 분들이 와주시고 의미를 부여해 주셔서 행복했습니다.


#문-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씨와의 특별한 인연을 질문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어떤 계기로 만나게 되셨나요?


답=제가 백남준 선생님을 만난 것은 지난 90년 천안문 사태 모금 전시회가 뉴욕의 소호에서 있었는데 이때 처음 뵈었습니다. 그때 제 작품을 기증했는데 백남준 선생님도 기증하셨더라고요. 그래서 인연이 됐고 자주 뵈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의 만남을 눈여겨보던  휘트니  뮤지엄측에서 멀티플 다이얼로그라는 2인 전을 제의해왔습니다. 우리는 흔쾌히 받아들였지요.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당시 세계 거장이셨던 백 선생님과 공동 전시를 한다는 것은 저에게 영광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제가 뉴욕화단에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고 봅니다. '제2의 백남준 이다' 라는 얘기도 있었지요. 전시회 이름은 '비빔밥 전' 이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백 선생님의 작품은 파리 퐁피두 미술관에서 보았던 '팽이'라는 작품 이예요. 고향에서 팽이를 돌리던 어린시절의 순수함이 담겨있고 향수를 불러일으켰지요. 덧붙여 그분의 하이테크 노하우가 얹혀지고 엄청난 파워를 일으키는 느낌이 큰 감동으로 이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문-미국에서 공부하셨고 맨해튼 주민으로 오래 살고 계십니다. 여기서 결혼도 하시고 살아보니 뉴욕의 미술계를 들여다볼 기회가 많으셨던 것 같은데 어떻게 보시나요. 앞으로도 뉴욕이 세계의 예술을 리드할 것 같습니까?


답=미국의 미술계는 갖가지 꽃들이 만발한 정원 같다고나 할까요. 그 꽃들이 다들 자기 목소리를 가지고 있어요. 어떤 거대한 하나의 아이디어가 이끌고 가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수많은 아이디어가 공존하는 초현실적 복합시대가 이어질 겁니다. 누구나 예술성과 아이디어가 있다면 그것을 흡수하기에 충분한 환경이 뉴욕이라고 봅니다. 작품의 독창성과 그 세계가 주는 감동이 관건이겠지요. 당분간 뉴욕이 세계의 예술을 이끌어 갈 거라고 봅니다.

 


   ## 강익중이 뉴욕화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90년이다. 그를 지켜보던 평론가 알렌 레빈은 빌리지보이스에 강익중의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강익중이라는 낯선 동양인을 모르고 있던 뉴욕화단에서도 새로웠고 강익중 자신도 놀랐다. 알렌 레빈이 평가한 강익중의 작품은 7천개의 작은 그림을 한데 모은 또 다른 거대한 작품덩어리였다. 이 그림에는 4천개의 스피커가 설치되었고 사운드도 삽입되었다. 전혀 새로운 시도였다. 백남준이 영상 기기들을 뒤틀어 물감을 발라놓은 작품처럼 강익중의 작품도 상상하지 못한 아이디어가 가미되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시작된 강익중의 스포트라이트는 2000년 초에 그를 이미 중견작가로 끌어 올렸다.


강익중은 이제 한국을 대표하는 설치미술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상하이 엑스포 한국관 뿐만 아니라 미국 곳곳의 공공건물과 병원 등지에 걸려있다. 뉴욕 한인 거주지인 퀸즈의 주요거리나 뉴욕 지하철 역사건물, 샌프란시스코 공항 빌딩 등에서도 그의 작품을 볼 수 있다. 강익중은 이제 세계 100대 미술작가로 손꼽히면서 글로벌 아트를 이끌어가는 리더로 부각되고 있다.


그의 아내는 한국인 변호사로 금호종금이 사들여 화제가 된 뉴욕시 맨해튼 월가의 AIG 빌딩 매입 때 미국의 부동산 개발업체 영우어소시에이츠와 함께 법률분야를 총괄해 업계에 이름을 날렸다. 작품에만 몰두하는 그의 "모든 뒷바라지를 해 준다" 고 자랑이 대단하다. 


1930년대 유럽 이민자들이 허드슨강변에 지은 공장건물들이 지금은 갤러리로 모두 바뀌었다.  그가 사는 강변동네는 어느덧 예술인 마을로 변해버렸다. 29층 작업실에서 함께 내려다보는 거대한 허드슨 강과 건너편 뉴저지의 신도시가 시시각각으로 수많은 풍경을 자아낸다. 늘 겸손하고 순수한 강화백의 또 다른 작품을 기다려 본다.

 

---------------------------------------

 



대담-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consumertimes.net

정리-강윤지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투데이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