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천왕은 백제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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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천왕은 백제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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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메워 만든 간사이(關西)국제공항을 빠져나와 뭍으로 이어진 대교를 건넜다. 오사카와 다른 방향으로 달리니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사카이시가 모습을 드러낸다.span>
2010.06.28

 

일본천왕은 백제왕자

 

 

 

바다를 메워 만든 간사이(關西)국제공항을 빠져나와 뭍으로 이어진 대교를 건넜다. 오사카와 다른 방향으로 달리니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사카이시가 모습을 드러낸다. 수없이 와본 오사카지만 한번도 사카이를 밟아 본적이 없었다. 사카이(堺)란 땅과 땅의 경계라는 말로 지명이 뜻하고 있듯이 이즈미, 가와치, 세츠 지방을 경계로 하는 중심도시다. 인구 80만의 사카이시를 자유도시로 칭하고 있다. 일본에서 가장 막강한 막부들이 지배하던 전국시대(戰國時代)에도 이들은 독자적인 국제 무역을 통해 부를 쌓고 있었고 철포 같은 강력한 무기를 갖춤으로서 자치권을 보장받던 그야말로 역사에 없던 자유도시였다. 새가 울지 않으면 죽여 버린다던 절대 권력자 오다 노부나가도 감히 정복할 수 없었던 자유의 땅, 사카이. 사람들은 사카이시를 황금도시라고 했고 시민들은 스스로를 자유인이라고 여겼다. 

무엇이 이들을 강력하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가야의 철기문화가 바다를 건너 맨 먼저 당도한 곳이 사카이 근처였고 백제 개로왕의 아들 곤지왕자(昆支王子)가 일본 정복왕조의 시초였다는 한일 고대사의 내용대로 한반도의 선진문화가 가장 먼저 전해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무기와 선진문화를 향유하면서 현대까지도 명맥을 이어오는 자유시가 탄생한 것이다.


1500년 전 오사카 일대의 혼란을 극복하고 이 지역에서 고대(古代)국가를 완성한 불세출의 영웅은 오진천왕(應神天王)이다. 오진천왕과 아들 닌토쿠(仁德)는 한반도에서 건너와 일본 정복왕조를 이뤘는데 그들은 백제왕족이며 천왕씨(천왕가문)자체가 한반도로부터 건너온 일본 이주자였다. 이들을 지칭하는 말이 도라이진(渡來人)이다. 즉 귀화자도 이민자도 아닌 그냥 물 건너 온 사람들, 지극히 일본적 표현이다. 서기 400년에서 600년에 걸친 일본고분시대와 아스카 시대의 주인공들은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라이진으로 설명된다. 일본 고대사의 거목으로 추앙받는 도쿄대 에가미 나미오 교수나 오노우에 미쓰사다 교수 등이 정리한 일본 고대사는 오진천왕이 곧 곤지라는데 무게를 두고 있다.


사카이 시에서 다누끼 우동으로 점심허기를 때우고 곤지왕의 신사가 있다는 공고산(金剛山)으로 향했다. 와카야마와 태평양으로 이어지는 드넓은 남쪽을 아우르면서 나라와 고베, 오사카 일대를 떠받치고 있는 듯한 공고산은 해발 1200미터로 걸어서 오르기가 만만치 않은 명산이다. 삼나무와 편백이 하늘을 찌를 듯이 울창한 공고산 자락의 유서 깊은 산장에서 밤을 맞았다. 별밖에 보이지 않는 깊은 산속에서 나 자신이 문명과 시간을 거슬러 고대로 날아가 보고자 했다. 가방에 넣어온 최인호의 가야국소설 "제4의 제국"을 꺼내들고 온천과 다다미방을 오가며 고대로의 시간여행 속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아침 간밤에 느낀 피톤치드와 반딧불들을 그리워하며 여름의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길을 나섰다. 한여름 포도밭 언저리에 작고 초라한 곤지왕의 신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마쯔리도 열고 규모가 제법 컸지만 지금은 유지가 어려울 정도로 작아져 지역 주민들이 번갈아가며 신사방문객들에게 안내 서비스를 제공하는 정도란다. 그래도 현지인들이 백제사람이라고 알려진 곤지를 위해서 이렇게 따뜻한 후대를 해주는 것은 목적으로 왜곡을 일삼던 정치가와 역사가의 범주가 아니기 때문이리라.


"역사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는 신의 역사도 아니요, 자연의 역사도 아니요, 오직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제3의 세계이므로 역사 속에는 인간의 음성이 숨어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서는 그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20세기 최고의 무용수였던 니진스키가 왜 자기와 상관없는 역사학에 대해 그런 평가를 내렸는지를 고민하면서 부지런히 여정을 재촉해 대선고분릉(인덕천왕릉)에 도착했다. 거대한 종모양의 인덕천황릉은 일본의 16대 왕으로 광개토대왕의 고구려군에게 금관가야가 명망한지 30년 후 건립된   가와치 왕조의 실질적인 영주다. 107기가 넘는 수수께끼의 백설조 고분군 가운데 가장 큰 전방후원분이다. 이집트 피라미드, 중국의 진시황릉과 더불어 세계 3대 대형고분으로 꼽히는데 이능의 축조를 맡은 토목기술자들은 누구였을까. 가야인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다.


치카츠 아스카 박물관에 들어섰다. 일본의 세계적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고대사 박물관에는 수없이 많은 가야인의 솜씨들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의자손수대경과 보스톤 박물관에 소장된 수대경의 모습을 꼭 빼다 닮은 가야유물들이 사카이 지역에서 쏟아져 한반도 문화 전래품들이 아스카 박물관을 메우고 있다.

 

2002년에 타계한 일본고대사의 석학 에가미 나미오 교수는 "역사는 침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 반드시 입을 열어 웅변 한다"며 이 박물관을 수차례나 돌았다고 한다. 그는 김해 대성동 고분과 낙동강유역의 가야유적지를 수없이 다녀간 일본최고의 가야역사 석학이었다.


이렇게 엄연한 고대사의 역사적 사실을 묻어둔 채 일본인들은 오히려 일본왕국이 한반도 남쪽의 가야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들고 나와 오랜 세월 황국사관으로 한일고대사를 덧칠하려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있었을까. 일본 침략으로 그들이 전하려는 역사적 메시지를 피지배 민족의 입장에서 수용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한없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교차한다. 가야와 백제는 일본 건국에 빼놓을 수 없는 주인이고 그 때문에 일본이 근세문명에 눈을 떴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식민주의 학자들이 이를 전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것이 그대로 우리학계를 이끌면서 한반도의 사국시대가 삼국시대로 현재까지 우리지식을 지배하고 있다.


며칠동안의 피곤이 쌓인 고대사 여행의 마지막 날, 재일교포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오사카 시내의 쓰루하시로 향했다. 다닥다닥 붙은 불고기 집들이 철길 밑으로 길게 늘어서 있다. 70만에 육박하는 재일동포들의 부와 삶의 터전이다. 백제와 가야시대부터 내려온 고대와 단절된 채 이들은 불행으로 점철된 한일현대사의 주인공들로 차별과 가난을 딛고 오늘날의 교포사회를 이뤄냈다. 그들의 애환이 이 동네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이들의 성공은 어두운 기억들로 가득한 한일 양국의 현대사에 희망을 던져주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진다.


일본인은 한국역사가 중국인들의 후손이 만들어낸 것으로 보고 싶고 한국인은 일본역사를 한국인이 건너가 만든 것으로 인정받고 싶어 한다. 아직도 결정적 역사의 증거나 카드를 찾아 많은 학자들이 머리를 싸매는 이유다.  그러나 한일 양국이 월드컵 16강을 동시에 이뤄내고 세계10대 무역국가로, 글로벌 무대에서 G20의 중심 국가로 아시아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동반자적 보폭을 맞춰가는 현시점에서 편협한 고대사에 집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史實)을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세상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상대를 공격하기 위한 역사공부가 아니라 바람직한 미래관계를 위한 역사탐구는 그래서 유효하다. "삼천년 전의 역사에서 배울 것을 찾지 못하는 사람은 현재를 살면서도 아는 것 하나 없이 암흑 속에 누워  있는 것과 같다"고 지적한 괴테의 말을 되새겨 본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han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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