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지식의 제국, 다케오 도서관
상태바
[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지식의 제국, 다케오 도서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슬로건2.jpg
인류문명의 줄기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기원전 일만 년에 해저 속으로 사라졌다는 '아틀란티스' 는 플라톤이 평생 동안 증명해내려고 했던 지식의 도시였다.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의 두께다. 신비의 제국이 있었다는 기억만으로도 인류는 즐겁고 뿌듯하다. 문명의 지식과 경주하며 차근차근 쌓아올린 벽돌 탑이 현재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 이름을 못 잊어 후세인들은 아름다운 그리스 산토리니 해변에 세상에서 가장 멋진 서점 '아틀란티스 북스'를 열고 집요하게 '지식' 의 열망을 유혹하는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어느 시대에나 그랬다. 당대 최고의 역사와 문화, 인재는 도서관에서 탄생했다. 인류사의 가장 오래된 바티칸 도서관은 물론 세계 최대 규모의 보스톤 시립도서관, 아일랜드 더블린의 트리티니 대학 장서관, 이집트의 영광을 가져다 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같은 명소들은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렌다. 인류는 언제나 하늘의 원리와 땅의 진실을 알고자 했다.

다케오 도서관의 첫 인상은 거대한 콘서트 홀 같았다. 고대 원형 극장에 지붕을 덮은 구조물 같은 느낌이었다. 외형만 보자면 잘 디자인된 미술관 분위기였다. 트러스 공법으로 연결된 처마 밑 4층 높이의 모든 공간이 한 시선으로 모아지도록 설계되었다. 인구 5만의 작은 도시. 이 읍내 변두리에 세계인이 주목하는 시립도서관이 문을 연 것은 불과 몇 년 전(2013년)이다. 민선 다케오시 시장과 일본 최대의 서점 츠타야가 손을 잡고 일을 저질렀다.

츠타야 주인 마스다 무네아키(1951-)는 설명이 필요 없는 '지식 수퍼스타' 다. 생활독서를 지향하며 일본의 낡은 서점과 도서관 문화를 확 바꿔버린 장본인이다. 1400개의 연결서점으로 츠타야 왕국을 만들어냈다. 서점이나 도서관은 단순히 지식만을 습득하는 곳이 아니라 이제 개개인이 '취향을 설계하는 곳'으로 개념을 전환시켰다. 츠타야는 그래서 주식회사가 아니라 '문화 인프라 창조 기획회사' 다. 이 작은 도시에 이 큰 도서관이라니, 그런데 이곳을 보려고 연간 100만 명이나 찾아온다니, 두 번 놀라지 않으면 이상하다.

▲ 일본 규슈의 사가현 다케오 도서관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도서관들이 있다. 하지만 다케오는 터치부터 달랐다. 벽돌 외벽의 멋스러움 안으로 낮게 배치된 서가의 모든 선들이 시원하고 유쾌했다. 층간 높이를 통합한 복층 구조에 잘 정돈된 수 만권의 책들이 시선을 압도했다. 기둥을 뺀 전 공간이 한 눈에 집약되면서도 거슬리지 않는 디테일이다. 어른 키 높이에 맞게 정리된 장서는 이용객들을 최대한 배려하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소비자 시대의 산물이다. 사람들은 적당히 워킹하면서 인문, 여행, 요리, 풍물, 디자인, 건축, 모든 소설, 모든 메거진과 만날 수 있다.

역사자료관은 다케오 도서관의 백미였다. 발코니 형태로 매달려 있는 2층 서관에 일본 각 지역의 자료들이 정밀하게 수집되어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카모토 료마(메이지유신의 선구자)의 고향 시코쿠 도사번의 '향촌집' 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들판에서 일을 막 끝내고 휴식하러온 주민 몇 명이 열람실에서 신문을 탐독하는 모습은 정겨웠다. 이곳에서 책은 젊은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중장년층 모두의 기호품이었다. 인생살이에 지쳐 영혼이 말라갈 때 쯤 한 번씩 단비처럼 적셔주는 향신료다.

도서관 내부는 스타박스와 함께 운영되고 있었다. 카페처럼 대화하며 책을 볼 수 있게 만든 이스라엘 도서관 예시바 스타일과 닮았다. 어린이 독서공간을 별도의 건물에 푸드코트와 함께 배치한 점도 인상적이다.도서관의 전통적인 고요는 없었다. 작은 대화, 낮은 음악이 자연스럽게 편안한 21세기형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사색이 필요하면 규슈 올레길이 바로 뒷산으로 연결된다. 3천년 된 녹나무가 굽어보고 있었다.울창한 대나무 숲 가운데 성스러운 역사를 지탱해주는 지혜의 수호신처럼.

더 올라가면 사방은 첩첩 산중이다. 내려다보니 다케오 지붕은 원형 유리로 하늘빛을 가감 없이 열람실 안으로 초대하고 있었다. 꽉 채워진 유리벽들이 낮지만 낮지 않게, 높지만 높지 않은 산들과 부드러운 곡선으로 연결되는 구조다. 온화한 능선들은 다시 도서관 지붕을 타고 석양으로 이어져 마침내 하나의 인연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규슈는 이전부터 평화롭고 풍요한 땅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사가현의 농산물은 최고품질로 정평이 나있다. 사가니쿠(소고기)는 일본전국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다. 이 도서관 15분 거리에 일본 5대 온천장 우레시노가 기다리고 있다. 후쿠오카나 나가사키 도회지 사람들의 '에너지 충전소' 로 오래 사랑을 받아온 고을이다.

▲ 자연광이 유입되는 도서관 내부의 모습

지식사업은 돈만 있다고 되는 일은 아니다. 감각과 철학, 고집, 디자인,주민들과의 교감, 그곳을 이용하는 이들이 필요충분조건이다. 이 모두가 하나로 모아져야 가능한 일이다. 옛사람들은 만물의 분열과 성장,변화의 원리를 그림으로 표현한 하도(河圖)를 숭상했다. 인류지식의 총합이라고 여겼던 고대(주나라)의 낙서(落書)에는 우주관, 상제관,인간관, 신관이 망라되어 있다. 하도와 낙서에서 한자씩 가져다가 '도서(圖書)' 관이 유래했으니 도서관이 지금도 문명의 출발점이라는 가설은 유력하다. 천문, 지리, 인문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알고자 했던 몸부림이 현재의 문사철(文士哲) 아니겠는가.

독서광 정조가 남긴 글이다. "눈 내리는 밤에 글을 읽거나 맑은 새벽에 책을 펼칠 때 조금이라도 나태한 생각이 일어나면 문득 달빛 아래서 입김을 불며 언 손을 녹이는 선비가 떠올라 정신이 번쩍 뜨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역사 속에서 모든 중흥기는 그냥 이뤄지지 않았다. 치열한 선비정신과 문화감각이 함께 만들어낸 선물이었다.

오늘날 도서관은 '지혜의 숲' 이거나, '종이무덤' 이거나 둘 중 하나다.지혜의 숲이려면 그 도서관은 살아있어야 한다.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격조 높은 독서의 두터움이 함께 해야 가능하다. 관청주도로 만들어지는 적지 않은 공공도서관들이 형식적으로 존재하다가 시간이 가면 왜 종이무덤으로 전락하는지를 돌아 볼 때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대표기자 justin-747@hanmail.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투데이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