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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09

 

 

카트만두, 내 안의 쿠마리를 찾아서

 

시작도 없고 끝도 없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본디 아무것도 없었는데 있다고 믿었다. 부귀가 있고 영화가 있을 것으로 믿고 지금껏 살아왔다. 시간이라는 것도 없었고 존재도 없었고 오고 가는 계절도 없었다. 애초에 카오스를 지나 무(無)에서 시작되었으니 세상 모든 일은 그저 인간이 만든 허상이거나 어떤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인도 뱅골만 쪽에서 밀려 올라오는 서남풍이 부드러웠다. 더르바르 광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영혼이 지쳐 숨을 몰아쉴 때 한번 쯤 찾고 싶은 곳, 네팔 카트만두 시내의 마음대피소 ‘심출가(心出家)’ 다. 이곳은 확실히 인연법의 열혈 공부방이다. 히말라야에 미쳐 해마다 두 어 번 씩 오가는 지인들을 보면 인간보다 자연과 맺은 인연이 더 진하다는 것을 확인한다. 몸을 누이는 대피소가 집이고 속세라면 마음을 내려놓을만한 안식처는 더르바르 넓은 마당 바로 이곳이다.

겨울인데 가지고 온 오리털 방한복이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온화했다. 낡은 사원들은 오래된 문패의 글씨 같았다. 서있을 기력조차 다했다는 듯이 무너져가는 옛 자취로 고대 왕국의 기나긴 사연들만 짐작할 뿐이다. 허공을 차고 오르는 비둘기 떼 사이로 걸음을 옮기며 나는 나의 내면을 훑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쫓기며 게을리해왔던 ‘나 들여다보기’. 그러면서 무(無)를 생각했다. 육체는 그대로이되 영혼이 미처 따라오지 못하는 나를.

그냥 일상에 머물러 있었다면 나는 여전히 탐욕스럽고 이기적이며 세속적인 가치로 무장한 채 영원히 죽지 않을 사람처럼 질주하고 있었을 시간이다. 떠나고 나서야 존재와 근원의 강가를 서성이며 내안을 들여다보는 다른 나를 만날 수 있었다. 무성했던 시절만을 꿈꾸며 앞만 보고 달려온 날들. 이내 시들어버리는 때가 오면 잠깐 깜박이다가 사그라드는 인생은 허무한 불꽃이라고 몸부림칠 것이다.

마음에 녹이 낀 것 같아 이곳을 찾았다는 이의 고백을 들었다. “사막을 건너고 빙산 위를 떠다니고 밀림을 가로질렀음에도 그들의 영혼 속에서 그들이 본 것의 증거를 찾으려 할 때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알랭 드 보통).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죽음이 임박해서야 비로소 준비를 시작한다. 죽음이 닥치면 그들은 회한으로 날뛴다. 이미 때는 늦었는데 말이다. 그 어리석음을 흔들어 깨우기 위해서 나는 광장을 돌고 또 돌았다.

   
▲쿠마리 여신이 기거하는 목조사원 정문
 

목조 사원에서 기다리던 ‘쿠마리’ 는 끝내 보지 못했다. 하루에 한번 대중들에게 얼굴을 내민다는 행운의 여신이다. 초경이 오기전의 소녀. 선발되면 이곳에 살면서 신과 동급으로 예우 받는 현신(現神)이다. 사진기를 치켜들고 잔뜩 기다리던 사람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긴 인간의 영원한 우상이나 구루는 애초부터 없는 것이다. 내안에서 잠자고 있는 자신의 구루를 찾다가 죽는 것이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면의 이상적인 모습을 찾아 나서는 일이 구도일진데 여태껏 그것도 모르고 이 먼 곳까지 돌아왔다. 현실적으로 얼마나 많은 허상에 기대고 있었는지 이 광대한 삶을 바꿀 수 있는 힘에 대하여 고민하면서 쿠마리의 미소를 기다린 시간은 지루하지 않았다.

신적 존재가 다른 몸을 빌려 이 세계에 나타난 ‘아바타’ 처럼 광장에서 쿠마리를 찾아 한 나절을 보낸 다음 깨달았다. 목적을 위해 인내하는 수단은 허무로 남는다는 것을.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했던가. 속세의 끈에 묶이지 않고 내 자신의 길을 찾아 이곳까지 흘러왔는데 역시 답은 없었다. 모든 것이 담담하고 고요하게 흐를 뿐.

“존재는 무상이다. 이것이 생멸의 우주법칙이다. 생멸까지 없애고 넘어선다면 그것은 열반이다.” 라또 마첸드라 사원 벽에 새겨진 글이다. 어려운 이야기다. 단어 하나라도 풀어보려고 온 생을 바쳐 면벽정진하는 구도자들 앞에 내가 그것을 모른다고 슬퍼할 일은 아니지만. 다만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끈에 묶여 끌려 다니던 어두운 방에서 해방되는 일. 인간의 무지한 집착을 묶어놓은 그 끈으로부터 풀려나고 싶었을 뿐이다.
 


   
▲카트만두 시내 더르바르(왕궁) 광장
 

온몸의 피로가 바위의 무게로 덮쳐 온다. 지나간 히말라야의 며칠 때문이다. 지도 밖으로 나가는듯한 거친 길. 때로는 흔적도 없는 통로를 찾아 신화처럼 정처 없이 걷고 또 걸었다. 음식과 잠자리 모든 게 불편했다. 바람, 추위 눈비가 기다리는 거친 산길에서 발이 부르트도록 걸었다. 길에서 만난 나그네며 수행자, 거지, 상인들과 미소를 섞으며 랄리구라스 붉은 꽃잎이 피처럼 떨어지는 땅에 땀을 뿌렸다.

누더기를 걸치고 오가는 걸인들이 많아도 현란한 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네보다 행복한 이들이 많은 곳. 생각 속에 극락과 지옥이 있는 곳이다. 정신은 유전적으로 어느 순간이 되면 나를 깨달음으로 데려 간다는데 그것이 어떤 것인지. 히말라야는 모든 것을 초월한 듯 언어조차 끓긴 순수한 모습으로 인간세상에서 비켜나 있었다. 아흔 아홉 개의 산을 넘고, 아흔 아홉 개의 계곡을 지나고, 아흔 아홉 개의 강을 건너서야 볼 수 있다는 쿰부 히말라야를 밟은 기억은 벅찬 일이었다.

반드시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방황해야 한다. 광대하고 쓸모없고 어딘지 알 수 없는 곳. 보헤미안의 삶처럼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는 땅이면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라도 따라가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니 온몸이 쑤신다. 바람이 실어다주는 광장의 온기에 지친 몸을 맡기고 벤치에 누워 기울어져가는 석양을 바라보았다. 짧은 해는 져버리고 이내 어둠이 내렸다. 이른 별들이 서성거리는 하늘. 어둠속에서 이성선의 시를 몇 번이나 되 뇌였다.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이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바라보아
하늘이 더렵혀지지 않았을까

별아
어찌하랴
이 세상 무었을 쳐다보리.

흔들리며 흔들리며
걸어가던 거리
엉망으로 술에 취해
쓰러지던 골목에서

바라보면 너 눈물 같은 빛남
가슴 어지러움
황홀히 헹구어 비치는

이 찬란함마저 가질 수 없다면
나는 무엇으로 가난하랴.

떠난다는 것을 정하기까지가 어려웠다. 작심하니 쉬웠다. 그냥 훌쩍 가면 된다. 내가 약속처럼 이 세상에 오지 않았고 정해져서 떠날 수 없는 것처럼. 어디든 자주 가면 고향이다. 마음의 영토가 넓어지니 좋은 일이다. “경험이란 나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나에게 일어나는 일과 나와의 관계”임을 반복적으로 느끼며 광장을 나섰다. 낡은 집들, 가난에 찌든 시가지, 사람과 차가 뒤엉킨 미로를 돌아 허름한 찻집에 들렀다. 햇빛, 바람, 우주를 모두 담아낸 차. 이파리 하나하나의 의미가 생명 같은. 네팔 국경 아쌈 산등성이에서 길러진 다즐링 한 모금으로 마른 입안을 적시고 다시 기운을 차렸다. 돌아보니 떠나온 곳은 너무나 멀고 아득하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