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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01

 

 
베이징의 열하일기, 그대 길을 아는가

 

자금성 해자를 끼고 왼편으로 펼쳐진 치엔먼(前門)과 리우리창(琉璃滄)에는 가을 서정이 역력했다. 햇살은 엷어지고 푸르던 나무는 조락을 준비하고 있었다. 243년 전 연경(燕京. 베이징)에 들러 벼루와 붓을 사고 선진문물에 놀라워했던 연암 박지원의 여로는 붐비는 인파와 문명속에서 길을 잃고 있었다. 아직도 성업 중인 수 백 개의 문방사우 상점들은 열하일기(熱河日記)의 ‘관내정사’ 풍광속으로 나를 안내하고 있었다. 당시 박지원(1737-1805)은 43세였다. 영조 때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 축하 사절단 자제군관 자격으로 먼 길을 떠났다. 이때 보고 들은 청나라 견문록을 ‘열하일기’로 남겼다. 압록강을 건너며 시작되는 ‘도강록’부터 연경과 열하를 다녀오는 ‘환연도중록’까지 길 위의 여정(26권 10책)은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중국선비들과 주고받은 이야기며 청나라의 문물에 대한 스토리는 독특하고 풍부한 해학으로 가득하다.

“정말 본받을 만한 것이 많다. 한 장은 엎고 한 장은 젖혀 암수를 서로 맞추었다. 틈 사이는 회반죽으로 붙여 때운다. 이러니 쥐나 새가 뚫거나 위가 무겁고 아래가 허한 폐단이 없다. 우리나라는 기와를 얹을 때 지붕에 진흙을 잔뜩 올리고 보니 위가 무거워 오래 못 견딘다” 청국의 기와공법에서 실용을 강조하고 있다. 크고 추상적인 논쟁보다는 실사구시가 사람과 세상을 바꾸는 중요한 요인으로 확신한 것이다.

압록강이 고비였다. 장마철 홍수로 아홉 차례 만에 강을 건너고 국경을 넘었다. 질병과 피로, 공포 속에 지친 사신단은 요양에서 짧은 휴식을 가졌다. 심양으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영원성과 산해관으로 길을 재촉할 때는 한양을 떠난 지 한 달 반이 지났다.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왕복 6개월 목표에 3백 여 명이 같이 움직이는 긴 여정이다. 연암은 45일 만에 연경에 도착했다. 1780년 8월7일의 일이다.
 


   
▲연암 박지원이 들러간 베이징 치엔먼가.

 

그러나 길은 끝나지 않았다. 황제는 열하로 떠나고 없었다. 건륭은 청나라의 4대 위협세력인 내몽고와 티벳, 위그루, 만주를 제압한 성군이다. 반드시 알현하고 사신의 예를 갖춰야 했던 것이다. 다시 닷새를 걸어 베이징 북쪽 승덕 외곽에 지어진 피서지 별궁까지 가서야 황제에 대한 삼두고구두례(세번 절하고 아홉 번 이마를 땅에 대는 예)를 올릴 수 있었다.

“길이란 알기 어려운 게 아닐세. 바로 저편 언덕에 있거든. 이 강은 바로 저들과 경계로서 언덕이 아니면 곧 물이지 사람의 운리와 만물의 법칙 또한 저 물가 언덕과 같다네. 그러므로 길이란 다른데서 찾을게 아니야 멀지 않은 언덕과 그 물 사이에 반드시 길이 있다네(열하일기 ‘도강록’)”

물건이 가득 쌓인 문방사우에 들러 갈색의 붓을 집어 들었다. 랑마오(狼毛)다. 양털 붓보다 힘이 있는 늑대 털은 최고로 쳐주는 명품이다. 만주 탱그리 늑대털이 귀해져 북한에서 구해왔다고 한다. 묘향산 늑대의 등털이 특품이다. 비싼 가격에 망설이다가 지갑을 열었다. 늑대털붓은 연암도 여인의 은장도처럼 아끼던 물건이다. 먹이 잘 스며드는 화선지에 대고 일필휘지를 꿈꾸는 순간이다.

유리창은 원래 자금성 건축당시 기와를 굽던 중인들의 거주지였다. 공사가 끝나고도 기나긴 세월을 같은 지명으로 남아 선비 문인들의 지식공방 역할을 해주고 있다. 연암은 유리창에 서서 탄식했다.

“이렇게 천하의 사람들이 나를 몰라보게 되었으니 나는 성인도 되고 부처도 되고 현인과 호걸도 된 셈이다” 관직도 없는 조선의 초라한 자신을 청국사람들이 어찌 알겠는가. “사람들이 나를 몰라준다 하여도 화내지 않고(공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드문 것은 나라는 존재가 귀하기 때문이요(노자의 도덕경), 혼자만이 미지의 세계를 갖는 것은 그 자체가 즐거움” 이라고 본 선비정신의 고독이었을 것이다. 천하에 자신을 알아주는 한사람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역사와 함께 해온 유리창 거리. 문방사우가 빽빽하다.

 

중국친구가 대접한 양고기 노린내로 고생했다는 그 골목에서 연암처럼 나도 유리창 대로에 나섰다. 건너편 치엔먼에서 빽빽하게 밀려오는 사람들의 어깨를 피하며 물결을 거스르는 잉어처럼 헤엄치듯 걸었다. 군중에 묻혀 나를 잠시 잊는 일은 나를 다시 찾아가기 위한 원점을 알아내는 순간이다. 연암의 세계나 나의 세계가 다르지 않았다. 수많은 인파가 오가는 이 거리에서 모든 이가 같은 길을 걷고 있음을 안다. 다만 생로병사가 다르고 인생의 짧음과 덧없음을 슬퍼할 뿐이다.

앞은 한 치도 볼 수 없고 좌우 어디에 와있는지도 모르는 어려운 여정에서 명문장으로 시간을 대변해준 연암. 자신은 그 길에 서서 비로소 도리가 무엇인지 깨달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눈과 귀로만 습득한 것에 대한 편견을 눈감고 잊고자 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조선도 청나라처럼 문물이 발달한 세상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북벌을 주장하는 아집에서 벗어나 북학(北學)의 눈으로 신세계를 관찰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입과 귀에만 의지하다가 눈으로 경험하는 세상은 벼락같은 것이었으리라.

어떤 사람도 자신이 처해있는 시공간적 상황을 벗어나 삶을 이룰수는 없다. 인간이란 사회적 존재고 타인의 인정이 필요한 독특한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폭풍 같은 시선을 벗어나기는 몹시 어렵다. 길을 떠나는 것이 해법이다. 연암은 길에서 그 답을 찾고자 했다. 삶과 여행은 분리되지 않는다. 길 위에서 생각하고 또 길을 가는 것이 인생이다. 언젠가는 연암의 유목일지를 거꾸로 더듬어 끝까지 완주해볼 것이다. 출발 전의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로 재탄생시키는 순간 어두운 편견의 그늘에서 비로소 걸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