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카트만두의 동전 한 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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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카트만두의 동전 한 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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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인들은 죽은 자의 입에도 동전을 물려서 보냈다. 이승에서의 고단한 삶을 마감하고 저승의 하데스(Hades) 궁전으로 가는 길은 돈이 필요 했다. 그곳에 가려면 몇 개의 강을 건너야 한다. 첫 번째 강을 건너려면 나루터에서 늙은 뱃사공 카론(Charon)에게 반드시 동전 한 닢을 주어야 한다. 바닥이 없는 조각배에 올라타는 뱃삯이다. 아무도 공짜는 없다. 돈이 없는 혼령들은 저승으로 가지 못한 채 구천을 떠돈다.

초등학교 때 치매를 앓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동네 어른들이 몸을 씻기고 광목옷으로 갈아입힌 뒤 동전을 쪼개 입에 넣어주는 모습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죽은 자들의 혼령이 떠나는 순간까지 돈은 필수품인 셈이다. 오래 전에 잊었던 그 의식을 카트만두에서 다시 목격했다. 인도 갠지스 강변의 바라나시는 화장터이면서 성지다. 네팔은 카트만두 시내를 흐르는 바그마티(Bagmati) 강변의 파슈파티나트사원(Pashupatinath Temple)이 그런 곳이다.

멀리서부터 연기가 일었다. 시신 한구가 태워지는 순간이다. 아리아 가트(Arya Ghat) 화장터는 오늘도 생명을 다한 육신들이 불태워지고 있었다. 유족들은 시신의 이마를 강물로 씻기고 저승으로 가는 노자돈으로 동전을 물렸다. 장작더미위에 올려진 육신은 준비가 다 끝났다. 장작살 돈이 모자라면 태워지다 만 그대로 강물에 던져진다. 다 탄 재를 뿌려야 하지만 죽음의 길에서도 빈부차이는 현실이다.

파슈파티나트가 죽어서라도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으로 각인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화장을 하면 그 지긋지긋한 윤회를 벗어나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강 아래쪽에서는 떠내려 오는 망자(亡者)의 유품가운데 쓸 만한 것을 건지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아이들은 물속에 머리를 박고 시신에 물려진 동전을 찾아내 기쁜 표정이다. 삶은 죽음이고 죽음은 곧 삶이다. 떨어져 있으되 하나이고 함께 공존하되 영원히 하나이지 않다.

▲ 바그마티 강변의 파슈파티나트 사원 모습

바그마티 강변의 하늘로 파미르 고원을 넘어온 햇빛이 지나갔다. 네팔의 늦가을 날씨는 최고다. 때맞춰 세계 곳곳에서 히말라야 원정대가 몰려오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시내는 떠들썩했다. 차와 오토바이, 릭사, 자전거가 엉켜져 풀리지 않고 한 덩어리로 움직였다. 몇 개 되지 않는 주유소는 차들로 장사진이었다. 아렌족(아리안계. 네팔인구의 30%)이 많은 인도 접경의 송유관이 닫힌 까닭이다.

네팔이 쿠데타 이후 중국의 지원유혹에 눈길을 줬다는 이유로 인도가 석유공급을 중단시켜버렸다. 덕분에 평소 한 시간 거리인 박타푸르(Bhathapur)는 20분 만에 도착했다. 목조 사원들은 대부분 지진의 직격탄을 맞았다. 군데군데 무너져 내리고 길가에는 건축파편들이 쌓여 있었다. 폐허 속에서도 네팔 왕조의 천년 고도 자취는 여전했다. 돌아오는 길에도 기름을 기다리는 차량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살아있는 처녀신 쿠마리(Kumari)를 만나기 위해 더르바르(Durbar Square) 광장을 가로질렀다. 목조 사원 앞에서 두 개의 문을 열고 들어가 3층 창문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탈레주(힌두의 고대 여신)신이 순결한 여아의 몸을 빌려 내려올거라는 믿음으로 모두가 엄숙했다. 쿠마리의 눈길을 받으면 행운이 온다는 전통 때문이다. 하루 두 번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어 방문객들에게 천상의 기를 뿌려준다. 석양녘까지 여신은 끝내 미소를 보여주지 않았다. 행운은 나를 비껴갔다.

오랫동안 신격화되어온 쿠마리는 까다로운 선발 조건을 거쳐야 한다. 우선 부계 혈통은 불교, 모계는 반드시 힌두여야 한다. 지명되면 외출이나 접촉이 일체 금지된다. 국왕도 쿠마리 여신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그러나 초경이 시작되면 자격을 잃고 평범한 처녀로 돌아간다. 쿠마리는 결국 두 종교간 화합의 상징이다. 라마불교와 힌두교의 갈등 대립을 잠재우는 그들의 화해방법이다.

▲ 카트만두 시내 더르바르 광장에서

비둘기떼가 가득한 광장에서 인연에 얽힌 티벳 승려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방이 십 킬로미터가 넘는 넓은 돌이 있어. 그 돌을 백년에 한 번씩 빗자루로 쓸지. 그렇게 해서 그 돌이 다 닳아 없어지면 그게 '겁' 이야. 근데 이승에서 옷깃이 한 번 스치는 것도 전생에 오백겁의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이나 가능하거든"

그렇다면 우리가 이승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뭘까. "천겁의 인연은 다음 생에 한나라에서 태어나게 되고 이천겁의 인연은 다음 생에서 단 하루 동안 같은 길을 가게 되지. 네팔에 들어오는 모든 이는 아파야 하고 그러면 열반과 인연의 겁을 기억하게 되는 거야". 알듯 말듯한 이야기들은 광장 곳곳에 몇 명씩 둘러앉아 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고단한 땅 티벳을 넘어온 라마 승려의 '인연론' 은 나의 눈을 반짝이게 만들었다.

지진으로 구겨진 사원의 3층에는 아직도 찻집이 문을 열고 있었다. 다즐링 한잔에 마음속 동굴 벽을 타고 흐르던 점액이 씻겨 내려가는 것 같다. 내가 진정으로 내안에서 해방되리라는 카타르시스의 기대로 또 한 모금을 넘겼다. 밖은 햇빛이 쏟아지는데 사원은 그림자 속에 가려져 싸늘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그 순간 카일라스 성자의 오도송이 망각속에서 인사하며 기억의 가장자리로 올라왔다.

신발 끈을 느슨하게 매야 하리라

말소리를 낮추어야 하리라

바람보다 빨라서는 안 되리라

눈을 감더라도 마음을 감아선 안 되리라

전생에 혹은 그 전생에 살았던 땅의 냄새를 맡게 되더라도

그 냄새에 흔들려서는 안 되리라

순간을 포착하되 거리는 두어야 하리라

그래야 모든 것들이 매혹적이리라

아무것도 없을지 모르리라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전부가 있을지도 모르리라

내가 버렸던 전부가 내가 만나야 할 전부가

큰 숲가에 버려져 있을지도 모르리라

흰옷을 입지 않는다면 맨몸이어도 좋으리라

몸의 얼룩쯤이야 씻으면 그만이리라

마음이 내키면 숲속 나무에 올라가 생명의 연습을 하고

무슨 큰 일이 일어난 것처럼 소리쳐도 보리라

혹시 아무도 듣지 않는다 하여 홀로 통곡하게 되더라도

그 울음은 흉도 죄도 되지 않으리라

그리고 문득 생각난 듯이 물어보리라

강도 풀리고 마음도 풀리면 나룻배에 나와 당신을 실어

먼 곳까지 잠들며 가자던 약속을 왜 잊었느냐고

아직도 오지 않는 당신에게 물어야 하리라.

네팔사람들은 평화롭다. 욕심이 적고 낙천적이다. 다음 세상에 신분이 바뀌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종교 때문이다. 가난하지만 (1인당 소득 1500달러) 따뜻하고 순수하다. 때 묻지 않은 이들을 보려고 이곳을 찾는 여행중독자들도 많다. 인간은 본래의 자아를 간직한 순수한 분신을 찾게끔 되어있다. 본능이다. 인간성이 상실된 세상에 던져지는 그 순간부터 어쩌면 숙명일지도 모른다.

먼지 속으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더르바르 광장을 나와 숙소로 돌아왔다. 야크 앤 예티 호텔. 히말라야의 신비한 동물 야크(Yak)가 거친 숨소리를 내는 계곡에서 전설의 설인(雪人) 예티(Yeti)를 부르는 듯한 하루의 모래시계는 이렇게 막을 내리고 있었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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