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광원의 세상보기] 중용(中庸)의 세상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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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원의 세상보기] 중용(中庸)의 세상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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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슈머타임스 윤광원 기자] 조선의 명군(明君) 정조는 문무에 모두 통달한 군주였다. 그는 유교경전과 성리학의 이념에 대해 신하들과 토론하기를 즐겼는데 대부분 신하들이 당해내지 못했다. 또 틈나는 대로 활쏘기를 했는데 '백발백중' 수준이었다.

하지만 정조는 화살 10발 중 9발을 쏘아 모두 과녁을 맞추면, 나머지 1발은 쏘지 않고 활을 내려놓곤 했다.

이는 10발을 모두 맞추면 자신감이 넘쳐 자만으로 흐르지 않을까, 또 신하들이 임금을 너무 두려워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신하들과의 토론에서도 지나치게 자신의 논리를 내세우는 법이 없었다.

모든 것이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한 법이다. 바로 '중용(中庸)'의 미덕이다.

중용과 '중화(中和)'는 같은 의미다. 사서삼경의 하나인『중용』에 따르면, 만물은 중화에서 자란다고 한다.

여기에서 기인, 중국에선 매년 2월 초하루(음력)를 '중화절(中和節)'로 정하고 한 해 농사를 시작하는 날로 삼았다. 옛날 중국에선 1월 한 달 내내 술과 음식을 즐기면서 노는 풍습이 있었는데, 놀기만 하지 말고 이제 농사일을 시작하자는 의미로 중화절이 비롯됐다고 한다.

이날은 황제가 백관들에게 농서(農書)를 올리게 하고, 술과 음식을 베풀면서 '중화척(中和尺)'을 나눠줌으로써 농업이 국가의 근본임을 확인시켰다.

중화척은 바느질자보다 조금 짧은 자인데, 검은 반점이 있는 대나무나 이깔나무를 깎아 만든 것이다. 임금이 이 중화척을 나누어주는 것은 자로 재는 것처럼 모든 일을 하는 데 규칙에 어긋남이 없이 하고, 올바른 정치로 임금을 도우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정조는 이 중국의 풍습을 이어받아 해마다 중화절이 되면 신하들에게 중화척을 내려주었다. 그만큼 중용과 중화의 가치를 중시했다.

정조는 왜 이토록 중용에 충실했던 것일까. 이는 자신의 출생배경이 많이 작용했을 듯하다.

다들 알다시피 그는 뒤주에 갇혀 비참하게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사도세자는 일종의 정신병자였다. 걸핏하면 궁인들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였다. 이런 광기가 아버지 영조와의 갈등을 증폭시켰다.

정조 입장에선 영조가 너무 심했다고 생각하면 자신을 왕으로 세워준 할아버지에게 불효하는 것이요, 사도세자가 죽어도 싼 '살인마'라고 간주하면 아버지에게 불효자가 된다.

중용의 도리를 지키는 것이 자신의 정신 건강에도 좋은 것이다.

그래서 정조는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천명하면서도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한 신하 어느 한 사람에게도 보복을 하지 않았다. 반대파인 노론을 견제했지만 내치지는 않았다.

그렇다. 사람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덜기 위해서라도 중용을 지키면서 사는 게 좋다.

그런데 요즘은 우리나라나 지구촌이나 중용은커녕 증오와 대립, 정치적 반대파를 '적'으로 돌리는 일만 넘치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파리를 피비린내 진동하게 만든 테러범들, 국민 대부분이 반대하는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이는 여권, "배신의 정치를 심판해야 한다"는 대통령, '반대를 위한 반대'와 '국정 발목잡기'에 골몰하는 야당, 평화적 집회와 시위를 할 수 있는데도 폭력에 의존하는 시위대…

그런 와중에 모처럼 '가뭄의 단비' 같은 소식이 들렸다.

외환은행 노동조합이 올해 급여인상분 전액을 회사에 반납키로 했다. 산업은행은 팀장급 이상 전원이 이런 결단을 내렸고, 수출입은행 노사는 11~12월 시간외 수당을 받지 않기로 합의했다.

정부는 지금 노동개혁의 일환으로 성과주의 임금체계 도입을 금융권에 독려하고 있다. 그러나 '자율'이 아닌 강요된 '타율'에 의한 것이라면, 이 또한 중용과는 거리가 멀고 증오와 대립을 증폭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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