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자이니찌, 두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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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자이니찌, 두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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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때때로 차별이 된다. 미디어학자 허버트 맥루한의 이야기다. 다른 언어는 감정의 벽을 세우고 공동체의 바깥에 서야 하는 불편함을 만든다. 세상을 살아오면서 이민을 떠난 모든 민족들이 받았던 공통의 애환이다. 일본에서 '자이니찌(在日)'는 차별이다. 재일한국인을 그들끼리 그렇게 부른다. 주류에 끼어들 수 없는 형극이다. 그러나 정동주(鄭東珠. 1948-. 재일교포 화가)는 달랐다. 어릴 때부터 모국어를 쓰고 이름도 바꾸지 않았다. 겨울날 진눈깨비처럼 뼛속까지 스며드는 차별의 한기를 이겨내려고 그림을 그렸다. 나이 들어서는 모든 미움이 예술로 녹아내렸다.

규슈(九州)의 깊은 산중 유후인(由布院) 맑은 공기 속의 '정동주 묵상전(墨象展)'은 청정했다. 때마침 온산을 물들이기 시작한 단풍은 미술관 앞마당까지 차고 내려앉았다. 가끔 일렁이는 가벼운 바람에도 낙엽은 지상으로 쏟아져 내렸다. 두터운 안경을 낀 60대 후반의 화가는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만나자 마자 자신을 동래정씨 28대손, 대구 현풍 사람 재일교포 2세라고 또박또박 소개했다. 전시실 벽 포스터에도 인쇄해놓은 내용이다. 현지 사람들에게 그렇게까지 커밍아웃 할 필요가 있었느냐고 묻자 자신의 인생관이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의 그림은 생명이었다.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과 자연을 채화했다. 1994년 오이타와 뱃부에서 초대전을 연 것이 시작이었다. 오이타(大分)는 그가 태어난 고향이다. 2003년에는 재일한국인들을 모아 연합전을 열었다. 미술관 2층 입구에 걸린 노란 꽃밭은 평화 그 자체였다. 이처럼 초기에는 색이 짙은 서정적 유화였다. 파리와 해외 습작을 거치면서 서예를 형상화한 동양적 분위기로 바뀌었다. '宝'나 '生', '人'을 대붓으로 상형한 작품들은 오랫동안 나의 시선을 붙잡았다. 족자 그림들도 백미다. 지나온 생의 여정을 압축해서 작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일본 규슈의 명소 유후인의 정동주 미술관에서.

정동주는 어린 시절 제대로 그림공부를 하지 못했다. 나이가 들어서 독학으로 미술에 입문했다. 규슈와 오이타현에서 알려진 그의 솜씨는 도쿄에까지 소문이 났고 어느 날 유후인의 산소 무라타(山莊 無量塔)에서 연락이 왔다. 세계최고의 자연리조트를 만들었는데 미술관을 함께 운영해보지 않겠느냐고. 정동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직행했다. 무타타의 주인은 3년 전 세상을 떠났다. 전통료칸으로는 최고의 평가를 받는 무라타와 아르테지오(Artegio) 미술관 등을 남기고 백혈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인생은 그런 것 아니겠느냐며 쓸쓸한 표정을 짓는 화가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유후다케(由布岳. 1500미터)에 걸린 구름을 보면서 산장을 내려와 후쿠오카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규슈의 끝없는 히노키 숲을 달려 하카다(博多) 터미널에 도착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허기가 차올라 곧바로 다무라를 찾아 나섰다.

주인장 첫 인상이 몽골계 영화배우 율 브린너 닮은꼴이다. 스킨헤드에 훤칠한 키가 전혀 요리사 같지 않는 풍모다. 다무라(田村)는 자이니찌다. 대구에서 건너온 아버지의 피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3형제를 재일한국인으로 키워낸 부모님의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원래 변호사가 꿈이었다. 시애틀로 유학을 떠날 때 까지만 해도 모두가 부러워했다. 하지만 미국생활은 그의 몸에 맞지 않는 옷이었다. 영주권은 허용되지 않았고 법관이나 변호사의 꿈을 접게 했다. 이때부터 요리에 심취했다.

다무라(田無羅)는 한국요리다. 차별받던 재일교포들이 푸주간에서 버려진 내장(호리몬)을 가져다가 구워먹던 야끼니꾸 집이다. 그 천덕꾸러기 식당이 1년 전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미슐랭 원스타 등급을 받았다. 미슐랭 등급은 요리 좀 안다는 사람들의 로망이다. 후쿠오카에서는 최초였다. 텔레비전 출연이 이어졌다. 자이니찌가 천지개벽을 이뤄낸 것이다. 소고기의 부드러운 맛, 씹는 질감, 마블링이 어우러진 최고의 식감을 만들어냈다. 다무라(田村-田無羅)는 자신의 이름이다. 그의 명함에는 '한국요리 다무라' 를 적고 있다.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벌인 승부였다.

다무라는 불판 4개, 정원 8명인 레스토랑이다. 고급 스시집은 대개 카운터 스타일의 다이에 앉아 소수를 위한 음식을 쉐프가 직접 만들어 준다. 이를 야키니꾸에 그대로 응용한 것이다. 고베 와규보다 품질을 인정받고 있는 이웃 사가현의 최고급 소고기가운데 가장 귀한 부위만을 직접 골라온다. 한 점이나 두 점 정도씩 직접 구워준다. 그래서 더 특별하다. 육회, 제육보쌈, 꼬리구이, 혀구이, 갈비살, 등심, 양구이. 혀에서 녹는다는 표현은 이때 쓰는 말이다. 마지막 무샤베트는 잊을 수 없는 메뉴였다. 소화제로 여기고 먹었던 어린 시절의 무 기억을 되살려 빚어낸 명품 디저트다.

▲ 후쿠오카 하루요시 산초메 미슐랭 식당 '다무라'에서.

유창한 영어에 와인상식까지 곁들인 다무라는 이곳을 찾는 일본 주류사회의 단골손님들에게 오히려 명사대접을 받고 있다. 의미 있는 반전이다. 멀리 도쿄나 타이완 홍콩, 싱가포르에서 예약전화가 이어진다. 그래도 하루 8명이상의 손님은 사절이다. 시스템이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소수의 손님을 최상으로 모시려는 그의 전략이기도 하다. 다무라 요리는 예술이다. 먹는 것이 하늘처럼 전부였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음식은 세계인의 최고급 언어다.

차별은 고통이다. 100만 명에 가깝다는 재일교포들의 사회적 지위나 대접은 아직도 안타까운 수준이다. 한일양국의 애증은 좀처럼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 산을 넘어서야 길이 있다. 남들이 가지 않는 여정, 그 고통의 뒤안길에서 피어난 두남자의 당당한 모습은 나의 가슴을 뜨겁게 달궜다. 그들의 이름은 자랑스러운 '자이니찌' 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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