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봉(三峰)과 포은(圃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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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三峰)과 포은(圃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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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2

 

삼봉(三峰)과 포은(圃隱)

 

 

오늘도 역삼동 네거리 삼봉빌딩(봉화정씨 종친회 건물)을 지나 출근한다. 하루를 열고 세상 밖으로 나가는 통로다. 몇 년째 오간 길이지만 정도전(鄭道傳)에 깊게 다가서면서 더 유심히 바라보게 되었다. 혁명의 시대를 살다간 삼봉을 잊지 않으려는 후손들의 정성이 가득한 물결 같다. 적지않은 세월을 이겨냈음 직한 건물이 테헤란로 빌딩숲 사이에 우뚝하다.
 
그는 정몽주(鄭夢周)와의 인연을 생의 선물로 생각했다. 억울한 귀양길에 달려와 봇짐 속에 눈물 젖은 맹자(孟子)를 넣어준 친구. 사서(四書)를 바탕으로 정도전은 사지(死地)에서 살아있는 민초 맹자들을 여럿 만난다. 이것이 역성혁명을 꿈꾸게 된 아이러니가 되었지만. 육신의 마지막까지 함께 하자던 청년 맹세는 지켜지지 못했다. 둘이 힘을 합하면 나라도 바꿀 수 있다던 포부가 선죽교의 바람으로 엇갈렸다.
 
한 스승아래 일사종학(一師從學) 하지 못하고 엇갈려 버린 두 사내의 운명너머로 역사는 포개졌다. 옅어지는 고려의 석양과 뚜렷해지는 조선의 새벽이 한 그물에 올려졌다. 패망과 건국의 간극. 비운의 지란지교는 후세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애처로운 서사시다.
 
백성들의 눈높이에 맞춰 개혁을 꿈꾸는 삼봉에 맞서 왕권을 지키려는 포은에게는 원망과 회한이 넘쳤을 것이다. 겉으로는 사선위에서 허망하게 깨져 나가는 우정만 보였다. 두 사람이 본질적으로 추구했던 행복한 국가는 가슴 밑바닥에 온전한 흔적으로 남았다. 아직도 이어지는 양날의 줄기다. 육신을 버리고 추구했던 위대한 정신을 나약한 인간의 힘과 바꾸었다.
 
1300년대 말. 대업(大業)에 내던져진 절개와 목숨들이 허망하게 나뒹굴던 시대였다. 죽고 죽이는 유생들의 숨 막히는 사투가 600년의 시간을 넘어 드라마로 살아왔다. 힘의 논리와 패권의 눈빛들로 치열했던 조정의 모습. 정치가 과연 생을 걸만한 도박인지를 처절하게 질문해본다.
 
임금이로되 임금일 수 없었던 공양왕과 애제자(愛弟子) 포은의 죽음 앞에 통곡하는 대석학 이색(李穡)이 애처로워 잠을 뒤척였다. 선죽교의 비보를 접하고 승자라 해서 오만하지 않았던 이성계의 리얼한 고뇌도 백미다. 명분과 주도권 경쟁에서 살아남고자 했던 그 행적들이 쏟아내는 처연함은 포은의 흰 두루마기에 얼룩진 피와 같다.
 
정치란 본시 목숨을 뺏는 싸움이지 공존을 위한 게임은 아니다. 지금 선택을 해야 한다면 누가 이 시대의 아이콘일까. 군주만을 바라보는 재상인지 백성을 함께 바라보는 재상인지 답은 어렵지 않다. 떠나는 총리와 떠오르는 총리감 사이 느낌으로 가름할 뿐이다. 패도와 민본의 차이는 예나 지금이나 같다. 한 사람을 섬길 것인가 모두를 안을 것인가.
 
시대가 어지러웠으니 어떻게 살았느냐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이들도 있다. 안대희 후보자를 향한 수사다. 재물을 내 던지고 진심을 보여주면 받아야 한다는 논리다. 그렇다고 해서 될 것 같으면 이 세상에 재상감 아닌 사람이 없다는 주장도 날이 서 있다. 대통령보다 새로운 총리가 이 나라의 적폐(積弊)를 혁파하리라는 기대로 가득하다.
 
충성심만 넘치고 무능했던 백비는 춘추전국시대 가장 강성했던 오나라의 부차를 패망의 길로 인도했다. 환관의 무리를 좇지 말고 밖에서 쓸 만한 중신들을 골랐다면 역사는 완전히 뒤 바뀌었을 것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는 존재다. 그 상식을 깨부수고 자신의 이너써클 밖에서 들리는 소리를 경청하는 것이 리더의 첫 번째 덕목이다. 삼봉의 민본정신에 포은의 기개와 강건함이 수평적 무게로 실린 재상이라면 나라가 행복해질 텐데.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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