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모토 료마. 유신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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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료마. 유신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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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5

 

사카모토 료마. 유신의 길

 

 

자작나무 사이로 흘러가는 하늘이 유난히 짙다. 파스텔 톤을 넘어 눈동자가 가늘어질 정도로 투명한 블루. 가을 교토는 역사와 계절에 안겨 평화롭고 두텁다. 몇 번의 발걸음 때마다 변치 않는 느낌, 전통이 온몸에 감기는 도시라는 점에서. 서기 794년 간무천황이 나라(奈良)에서 이곳으로 헤이안(平安) 신궁을 지어 도읍지를 옮긴 뒤 1868년 에도(도쿄)로 이전할 때까지 천년의 수도답게 기품이 여전하다.

도시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교토는 메이지 유신과 일본의 개국이 이뤄진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오늘날 존경 받는 유신의 인물들은 갔지만 그들이 남겨놓은 정신과 구국의 결단은 현대 일본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아직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내 관심의 대상인 사카모토 료마를 찾아 다시 중세의 교토 속으로 들어갔다. 나가사키, 고베, 에도, 오사카, 교토에 이르는 혁명의 길을 수없이 오가며 최후까지 인간의 열정을 다 태운 그의 마지막 길을 찾아보고 싶었음이다.

19세기 중반 서양 열강들의 개방 압력과 불길한 미래에 대해 사무라이 막부는 몹시 흔들렸다. 천황은 상징적인 존재감에 그쳤고 도쿠카와 요시노부가 세운 쇼군 정권이 260년 동안이나 철권통치를 이어온 피로감 때문에 사람들은 변화를 갈망하던 때였다. 료마는 시코쿠의 시골 도사번 출신이지만 에도에서 수학하고 일본을 바꿔야 산다는 일념으로 서남부의 세력을 묶어 메이지유신의 기초를 다졌다. 사쓰마(가고시마) 조슈(야마구치)를 혁명세력으로 끌어들이고 자신의 고향 도사(시코쿠)까지 연합시켜 개혁의 파워를 키워나갔다.

수많은 난관을 지나 사무라이 정권은 우리의 386세대 같았던 료마 세력에 밀려 천황에게 정권을 반납하는 이른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결정하고 쇄국의 방패를 거둬들였다. 은둔국가 일본이 세계를 향해 문호를 개방하는 순간이었다. 140년 전의 일이다. 이것이 세계 3대 혁명으로 꼽히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다. 이를 기점으로 일본은 선진의 길을 걸었고 조선은 쇄국을 고집하다 합방의 치욕을 당했다. 뒤바뀐 역사의 중심에 주인공 사카모토 료마가 자리하고 있다.

그가 구상한 개방과 선진 일본의 모습은 배를 타고 이동하면서 고민했다는 '선중팔책(船中八策)' 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상하양원제, 국제법 제정, 해군력 강화, 행정체계 전면개편, 조세개혁. 한 가지를 실천하기도 어렵던 시기에 국가 개조의 혁신을 선언하고 자신의 온몸을 던졌던 청년지사의 돌풍은 기울어가는 일본열도를 구출해낸 것으로 평가된다. 목숨을 건 혁명구상은 유신과 근대화로 이어졌고 일본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구열강과 자웅을 겨루는 제국의 대열에 올라섰다. 하지만 영웅 료마는 개방을 반대하는 일부 사무라이 세력의 습격으로 혁명의 끝을 보지 못하고 33살의 짧은 인생을 마감한다.

   
 

숨겨진 그의 인생 스토리는 20세기를 대표하는 탁월한 국민 작가 시바 료타로의 손끝에서 살아났다. '료마가 간다' 전 10권의 대하소설은 1968년 산케이 신문 연재당시 이미 수천만 부가 팔렸고 당시 메이지 유신 100년을 맞는 일본을 다시 한 번 뭉치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미국에 이어 세계 2강까지 밀고 올라간 도약은 사실 료마 전기가 일본 사회를 강타한 때와 무관하지 않다. 시바의 소설이 완성되던 1972년 박정희 정권은 '10월 유신'을 단행했다. 당시 다나카 수상은 한국의 산업화를 적극 지원했다. 료마 열풍과 한국의 유신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고인이 된 오부치 수상과 나카소네, 고이즈미를 비롯한 정계인물들, 경단련 맴버와 마사요시 손(손정의)을 비롯한 수많은 경제계 리더들이 오늘날까지 료마를 신(神)처럼 숭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는 엄중함과 목표를 위해 희생하는 헌신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지 않았을까. 비천한 하급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무던히 수줍어하던 소년이 큰 뜻을 품고 자신을 단련시키며 국가혁명의 꿈을 실현해가는 드라마에 누구나 존경의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다.

료마는 교토의 목조주택 2층에서 최후를 맞았다. 숨이 끓기는 순간, 선혈이 낭자한 다다미 방에서는 유신정부의 조직과 선진화 구상들이 적힌 두루마리 종이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3년 전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NHK 대하드라마 '료마전' 에서 이 마지막 장면을 본 시청자들은 눈물바다를 이뤘다고 한다. 한 인간의 결단이 공동체와 나라를 어떻게 뒤바꿀 수 있는지에 대한 감동이었으리라.

료마를 되살리며 다시 메이지 정신으로 뭉치자는 일본의 결의는 무척 단단해 보인다. 시바 료타로는 소설의 마지막을 이렇게 쓰고 있다. "기울어져 가는 일본을 구하기 위해 하늘이 이 청년을 보냈다가 그 소임이 끝나자 마자 지체하지 않고 하늘나라로 다시 그를 데려갔구나".

료마의 묘지는 교토 동쪽 '유신(維新)의 길' 언덕에 자리하고 있었다. 돌비석에 새겨진 그의 이름이 어느덧 풍화에 스러져 엷어지고 초라한 석등 앞에는 소박한 꽃다발만이 놓여 있었다. 남루한 사무라이 차림으로 대양을 응시하는 청동상이 시월의 햇살에 빛나고 있었다. 계단을 오르느라 가빠진 숨을 돌린 뒤 하카(墓) 앞에 조용히 두 손을 모았다. 일본을 일으킨 담대한 청년. 그의 호방함과 뜨거운 기개가 교토를 다 덮고도 남는 것 같다.

역사란 어차피 인간행위의 집합적 결과인데 대의와 헌신, 시대정신과 지도력, 운명을 거는 국가관이란 어떤 것일까를 상상해본다. 미운나라의 영웅이라고 깎아 내리지 말고 역사성이 담긴 그의 궤적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어떤 울림이 다가옴을 느낀다. 모두를 내려놓고 자신을 완전히 태우는 자세로 현재의 문제들을 풀어간다면 그런 리더들에 의해 우리나라는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를 그려보면서 말이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cs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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