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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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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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5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저 그런 소설인 것 같은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은 서울에서도 항상 대성공이다. 100만부 이상 팔려나간 '1Q84' 은 주인공 아오마메가 택시에서 무심코 심포니에타를 듣는 것으로 시작된다. 현악기와 관악기의 현란한 울림이 묘한 조화를 이루는 장엄한 서사시. 체코의 국민음악가 레오시 야나체크(1854-1928)의 대작이다.

 

지난해 체코의 15세기 중세마을 체스키 크롬노프에서 프라하로 이어지는 평원을 횡단했던 기억이 다시 차오른다. 보헤미안의 정체성과 우수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던 여정이었다. 몰다우 강줄기를 돌아 나오는 동안 심포니에타는 귀한 동반자였다. 무라카미 역시 비슷한 경로를 돌면서 야나체크를 알게 되었고 심포니에타를 가슴속에 묻고 다닌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머리가 희미해질 때마다 망치로 나의 의식을 때려놓고 가는 육중한 리듬이다.

야나체크의 명성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프라하 음악원에서 클래식을 공부하던 학생 밀란 쿤데라(1929- )는 당초 꿈꿨던 작곡가와는 전혀 다른 소설가의 삶으로 세상과 접속했다. 소련의 압제를 부수고 체코의 주권을 되찾고자 했던 '프라하의 봄'이 무산된 뒤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는 사람들의 일상을 외면할 수 없어 인생항로를 수정한 것이다. 소설로 현실참여를 준비해 발표한 명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유럽과 체코를 놀라게 했다. 30년 전의 일이다.

토마시와 테레자, 사비나, 프란츠. 네 사람의 청춘남녀가 벌이는 삶을 통해 쿤데라는 그 시대 유럽과 체코의 숨 막힐 듯한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소련의 무력에 짓밟힌 1960년대 동유럽을 교차하는 젊은이들의 인생을 그렸지만 사실 숨겨진 주제는 조국 체코의 자랑스런 역사에 대한 짙은 갈망과 뜨거운 질문이다.

사랑과 성, 철학, 정치와 역사가 총체적으로 녹아 있어 지금도 가끔 꺼내보는 명작이다. 등장인물 프란츠는 말한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단 하나의 삶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이전의 삶과 비교할 수도 없거니와 이후의 삶에서 교정할 수도 없다". 개인의 일그러진 삶이 그 시대의 역사성과 무관할 수 없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번만 있는 것이며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영원성이 무거움이라면 이 일회성은 가벼움이다. 그러나 이 대립이 옳고 그름이나 나쁨의 가치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야만 한다. 즉 필연과 우연도 마찬가지다. 특정한 시점에서 특정한 사건과 직면하여 과연 그래야 하는가라고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모든 사건이 전부 단 한번뿐인 까닭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다. 한 개인의 삶과 한 국가의 역사가 그렇게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복종을 먹고 살려 했고 자본주의는 인간의 광기를 먹고 살고 있다. 이 세상을 완벽하게 만들라고 신이 만든 존재가 인간이라면 인간에 의해 쓰여지는 역사는 최소한 그 시대의 과제를 헤쳐나가는 데 충실해야 할 것이라는 게 쿤데라의 절규다. 그러나 인간의 어리석음은 어느 한 시대에 국한되지 않는다. 보헤미아의 찬란한 세월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스토리에서 오늘날 참을 수 없는 생의 무거움과 존재의 가벼움 사이를 분주히 오가며 방황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목격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의 소설은 시대를 넘어 역사를 보는 시선을 잡아주고 있다.

침묵으로 말해야 할 국정원이 정쟁의 한 복판으로 돌진하는가 하면 정권에 따라 평가가 오락가락하는 철새 감사원, 이전에도 그랬지만 권세가 기울자마자 정보수장에게 오랏줄을 던지는 검찰, 국민행복 시대의 척후병을 자임해놓고 지금껏 창조도 비전도 보여주지 못하는 미래부, 식물인간처럼 아무런 존재감이 없는 경제부총리. 막말경쟁으로 그들만의 리그에 열중인 정치.

우리를 참을 수 없게 만드는 존재의 가벼움들은 쉽게 걷히지 않을 것 같다. 때문에 기대했던 호랑이 그림이 고양이로 망가져 가는 모습을 봐야 하고 지켜지지 못할 약속들이 어떻게 사라져 가는지를 일상처럼 견뎌내야 한다. 역사는 다양한 존재감이 잘 공존할 때 르네상스를 맞곤 했다. 국가를 이끌어가는 리더들이 항상 정신차려 좋은 시대를 만들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월이 바뀌어도 우리가 기다리던 이데아는 오지 않는 것 같다. 아니 그것을 기다리는 인간들이 어리석다는 사실을 먼저 깨달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2천 년도 전에 플라톤은 진정한 이데아 세계를 꿈꾸었건만 그가 바라던 이상정치와 보편적이고도 광범위한 행복은 영원히 오지 않을 신기루일지도 모를 일이다.

밀란 쿤데라는 다시 말한다. "역사는 인류의 치명적 체험부재에서 만들어진 밑그림이다.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아직은 펄펄 살아있어야 할 존재감이 이렇게 빨리 희미해져 가는 지금의 권력이 또한 그렇지 아니한가.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cs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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