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 '베르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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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 '베르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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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메르시우 광장에 햇살이 내리기 시작했다. 밤의 냉기가 가시자마자 일어서는 태양의 기세는 간단치 않았다. 초여름 지구 서쪽의 끝 이베리아 반도의 종착지 리스본은 하루의 긴 여정을 시작하는 중이다. 대항해 시대 포르투갈 세계경영의 전진기지였던 타구스 강변은 국부가 쌓아올려진 옛 영화가 묻힌 곳이다. 강가에서 리스본 구도심 루아 안제스타 거리로 연결된 오르막길 언덕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 '베르트랑(Livraria Bertrand)'을 만났다.

에펠의 제자가 만든 철탑타워 '산타 후스타(Santa justa) 에스컬레이터' 전망대(리스본의 명물)를 넘어 고풍스런 이곳은 포르투갈 지성사를 수놓은 유서 깊은 책방이다. 몇 번의 수리를 거쳤지만 처음 문을 열 때(1732) 그 건물 그대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7개의 포르테스()를 지나 안으로 동굴처럼 이어진 적선 공간구조는 고풍스런 후박나무 서재와 장식이 세월의 무게를 잘 이겨내고 있었다.

6층 건물의 외벽은 '아술레주(포르투갈 전통 문양이 새겨진 파란색과 흰색의 그림타일)' 로 시공되어 빈티지의 내공을 짐작하고도 남기에 충분했다. 프레스코화로 장식된 벽과 심플한 간판은 또 다른 반전이다. 역사의 고비마다 지식인들이 모여 미래를 논의하던 시대충전소였는데 마치 오래된 사원을 보는듯한 느낌이다. 남미로 아프리카로 세력을 확장하며 중세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이들의 자존심이 묻어있는 문화유산이다.

▲ 포르투칼 리스본의 오래된 서점 베르트랑 입구

베르트랑은 아직도 포르투갈 전국에 54개 체인을 갖고 있다. 최고의 문학작품만 엄선하기로 정평이 나있다. 요즘은 웹 사이트 북 큐레이션 프로그램으로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높다. 두 번째 포르테스() 안에 반가운 책이 진열되어 있었다. 맨부커상을 받은 우리 소설가 한강(1970-)의 '채식주의자'가 현지어 '베지타리아나(Vegetariana)' 로 번역되어 아시아 소설코너에서 독자들을 만나고 있었다.

시미즈 레이나(일본 여성 저널리스트)가 전 세계 100여개 서점을 여행하고 쓴 책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이 나를 오래전부터 이곳으로 유혹했다. 리스본까지 15시간의 비행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포르투갈의 영광을 안겨준 지성과 원대한 비전의 원천이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그들의 후세대는 왜 '베르트랑'을 자랑스러운 지식보물로 여기는지 그 현장을 보고 싶었다.

세 번째 방의 작은 액자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300년 가까운 세월동안 베르트랑이 목격한 역사를 주제별로 기록해놓았다. 리스본 시내를 쓸어버린 대지진(1755)과 한국전쟁 같던 슬픈 내전, 알폰소 5세를 비롯한 9명의 국왕, 한 번의 국왕시해사건, 17명의 대통령, 3번의 공화국, 6번의 쿠데타, 1,2차 세계대전, 유럽통합까지 베르트랑은 역사의 생생한 목격자이자 관찰자였다. 아퀴리노 리베이로(Aquilino Ribeiro.1885-1933)가 근대 서점으로 내부를 확장할 때까지 지난한 역사는 이베리아 반도의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었다.

▲ 7개 공간으로 연결되는 베르트랑 서점 내부

늘 그렀듯이 서점은 장대한 우주를 연상하게 한다. 아담한 서점은 우주이자 동시에 차가운 속세다. 사람들의 마음과 취향, 욕망이 공명하며 하나의 공간을 이루고 생명을 불어 넣는 곳이다. 불멸을 만든다는 엄숙함과 시대를 직조해내는 공작소 역할이 소명처럼 이어져 온다. 책이 진열된 곳은 쾌락의 바다 같다. 그사이로 몸을 숨기고 눈으로 한껏 세상의 모든 이치를 거둬들인다. 책 더미 속에서 헤엄치거나 달아나거나 빠지거나 잠들어 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깨어나서도 절대 끝나지 않을 무한 세계의 멈춤이 존재한다.

눈앞에 펼쳐진 세상의 대강을 그려내고 그것을 몸으로 느끼면서 심오한 현실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감각이 살아온다. 인류사의 모든 결정이 이 공간에서 아카데미를 기초로 만들어지고 꿈꿔져 왔던 이유다. 고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해변서점이나 그리스 에게해 산토리니섬의 아트란티스 서점들도 베르트랑처럼 문명을 이끌어 온 견인차들이다.

우아한 디자인으로 눈길을 사로잡는 '렐루(Lello)' 서점은 포르투갈의 또 다른 자존심이다. 리스본 북쪽 도시 포르투의 명소로 수많은 방문객이 다녀가는 곳이다. 장인의 정교한 솜씨로 빚어낸 성당 같은 네오고딕 양식의 건물내부는 여행자들의 버킷리스트다. 지구상에서 입장료(4유로)를 내고 들어가야 하는 유일한 서점이다.

렐루는 멕시코시티의 '엘 펜두로(진자처럼 고객이 다시 돌아오기를)'서점과 함께 책과 어울리는 테마의 두터운 의미로 국제적인 지성들의 관심지다. 오랫동안 기차역이었던 '바터북스(영국 안위크)' 서점과 나란히 유명세를 타고 있다.

▲ 포르투갈 2대도시 포르투의 명소 렐루서점

리스본의 또 다른 서점 '레르 데바가르(Livraria Ler Devagar)'는 이름이 독특하다. 포르투어로 '천천히 읽기', 책의 근본과 독자의 지적욕망을 함축해 놓은 문화언어다. 리스본 시내 인쇄소를 개조한 높은 천정 건물로 문화계 인사들이 공동 투자해서 현재도 경영되는 곳이다.

알고 보면 15세기 포르투갈은 엔리크 왕자의 지휘아래 인도 항로발견(1498)과 브라질도착(1500), 말라카 해협 개척과 일본 중국 진출(1511)등의 국운상승기에 세상을 석권했던 나라다. 고대 로마시대부터 아폰수 국왕의 국가설립(1138)까지 이들의 정신적 토대는 방대한 지성에서 출발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유럽문화를 주도한 포르투갈의 넓이와 깊이가 오래된 서점에 신화처럼 새겨져 있다.

언어와 문자는 신이 지상의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다. 모든 문명은 이 두 가지 통로를 거쳤다. 디지털로 빠르게 진화해나가는 세상에서 서가에 책이 가득 꽂힌 웅장한 서점들은 우리들의 단순한 노스탤지어가 아니다. 깊이 있는 대안을 만드는 지적 도구들이 숨겨져 있는 보물창고다. 읽고 사색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힘은 호모사피엔스의 조건이다. 그 샘물은 서가에서 솟아난다.

맑은 공기와 그림 같은 푸른 하늘아래 리스본은 오늘도 여행객들로 초만원이다. 구식 트램전차와 차량들로 뒤섞인 거리는 중세와 첨단문명이 공존하는 드문 풍경이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분출해내는 문화는 본능적이고 휘발성이 매우 강하다. 그 뒤안길을 '베르트랑', '렐루' '레르 데바가르'가 지성의 파수꾼처럼 묵묵히 버티고 있었다. "인간은 항상 무엇인가를 하기위한 무엇이어야 한다(괴테)"는 명제를 시대 앞에 던져주면서.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대표기자 justin-7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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