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윤동주, 얼음아래 한 마리 잉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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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윤동주, 얼음아래 한 마리 잉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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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디찬 돌 시비(詩碑)가 반가웠다. 고풍스런 벽돌건물의 명문사학 도시샤(同志社)대 캠퍼스 복판에 시인 윤동주는 그렇게 현세를 살고 있었다. 일본의 천년고도인 교토시내 헤이안 신궁과 교토대 사이 가모가와강 안쪽의 교정은 영국 풍 건물로 바뀌었고 흩어진 꽃다발과 종이학 몇 마리가 시비 제단을 지키고 있었다. 문학의 열망을 저버린 채 짧은 목숨을 마친 식민지 청년의 아픈 사연은 아직도 수용하기 힘든 역사의 현실이었다.

"죽은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자필로 쓴(1941.11) 필체 그대로의 '서시'는 검은 대리석에 새겨져 지나간 시간을 담고 있었다. 푸른 시의 파편들은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을 향해 구름을 손짓하고 현재를 접어 다가올 미래를 불러 모으고 있었다. 이승의 육신대신 남겨진 그의 노래들이 영혼의 숨결처럼 다가왔다. 한글과 일본어로 나란히 새겨진 검은 화강암은 오고가는 세월과 바람을 잘 견디고 있었다. 곁에 정지용의 시비가 나란히 있어 조금은 덜 외로워 보였다.

일제 강점기 북간도 명동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시인은 평양과 서울을 거쳐 도쿄까지 선진학문의 문을 두드렸다. 숭실학교, 연희전문, 도쿄 릿쿄대, 다시 교토의 도시샤대학 까지. 28살 짧은 생의 여정은 간단치 않았다. 도시샤의 선배 정지용을 흠모했다거나 함께 유학길 친구가 되어준 친구 송몽규(후일 옥사)와의 우정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정지용은 해방 후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학평론가가 되었다. 그는 무시무시한 고독 속에 죽어간 후배 동주를 "동지섣달 엄동설한에도 꽃과 같은 얼음아래 한 마리 잉어" 로 그려냈다.

▲ 일본교토 도시샤대학 캠퍼스의 윤동주 시비 앞에서.

윤동주가 태어난 1917년은 역사적 인물들이 줄줄이 세상 땅을 밟았다. 같은 북간도 명동촌의 친구 문익환 목사와 장준하 선생, 구미의 박정희,통영의 윤이상, 신학자 안병무 등이 동갑내기다. 각자의 무늬대로 다른 방향에서 한국현대사를 격렬하게 색칠한 이들이다. 어떤 사람은 날개를 폈고 그 때문에 날개가 부러지며 생을 마감한 이도 있었다. 동시대의 우연과 악연이 교차했던 아픈 시간들이었다.

윤동주는 한글사용이 금지된 식민지시대에 한글로 시를 썼다는 이유로 감옥에 갔다. 교토의 관할 재판소가 후쿠오카였던 이유로 그곳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옥사(1945.2)하였다. "외마디 소리를 높이 지르면서 갑자기 쓰러져 급사했다". 가족들에게 전해진 사인이다. 하지만 이를 믿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규슈제국대학 부속병원은 당시 조선인 수형자들에게 약물주사 실험을 여러 번 자행했고 그 때문에 피 끓는 젊은 청년이 절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윤동주의 글들은 세월이 한참 흐른 뒤 일본 고교 교과서에 실렸다. NHK는 훗날 윤동주 특집방송을 내보냈다. 후쿠오카에서는 윤동주 시 읽기 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오무라 마쓰오(와세다대 교수)는 윤동주 연구를 위해 20년 동안 만주와 제주도를 수없이 오갔다. 한중 수교전인 80년대까지 그는 연변대로 직장을 옮겨가면서 동주를 연구했다. 식민지 청년시인의 생애를 마음으로 들여다보고 실증적 연구로 '윤동주 문학' 을 세계적 수준으로 격상시켰다.

시인 이바라키 노리코(1926-2006)는 한글을 배우면서 윤동주의 시 세계로 깊은 탐험을 시작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이렇게 노래하고/ 당시 용감하게 한글로 글을 썼던/ 당신의 젊음이 눈부시고/ 그리고 애잔합니다"(이바라키 노리코의 시. '이웃나라 말의 숲') 그 마음들이 도시샤 교정에 차가운 비석으로 남았다. 국가의 폭력을 개인의 참회로 풀어내려는 일본의 모습에서 묘한 감정이 일렁인다.

▲ 해방후 발행된 시집과 도시샤 시절의 윤동주

도시샤를 돌아 나와 가모가와 강변을 걸었다. 윤동주가 하숙집에서 이 길을 따라 학교를 오가던 길이다. 나라(奈良)시대를 마치고 교토로 천왕이 옮겨오면서부터 천년 이상 도시를 지키고 있는 강이다. 말 그대로 오리(가모메)들이 놀던 강(가와)은 '압천(鴨川)' 이라는 정지용의 시로 남았고 윤동주의 '나그네' 속에도 그려져 있다. 이 물은 다시 이마데가와(今出川)로 나누어지고 시내를 흐르는 수로의 물줄기로 흩어지고 있었다.


잊기는 쉬워도 잊혀지기는 어렵다. 동주의 시비가 서있는 공간에서 나의 사고는 망각과 기억사이를 분주히 들락거렸다. 앞마당에는 벌써 홍매화가 만개해 있었다. 바람이 아직 차가운데 이렇게 모든 걸 다 내놓고 봄을 맞이하는 매화의 향기가 애처롭다. 어긋난 시대의 길목에서 오래 전 목숨을 떠나보낸 한 청년이 해마다 때 이른 홍매(紅梅)로 부활하는 것 아닐까. 그의 언어는 죽어서 명예를 지켰고 남겨진 사람들의 긍지로 부활했다.

올해는 윤동주 서거 74주 년이다. 그를 따라다니던 죽음의 십자가를 넘어서야 오랜 이 갈등이 풀려날 텐데. 아직은 두 나라 사이에 가파른 비탈길은 끝나지 않고 있다. 슬기롭게 지나쳐야 할 역사의 커튼 뒤에서 서로가 발목을 잡는 것은 아닌지 혼란스럽다. "우리가 기억을 소홀히 한다 해도 그 기억은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다" (알라이다 아스만 '기억의 공간') 그러나 아픈기억을 놓아야 서로에게 미래가 있지 않을까.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대표기자 justin-7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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