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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의 세상이야기] 키나발루의 시간과 인생의 시간

김경한 justin747@cstimes.com 기사 출고: 2019년 01월 14일 오전 10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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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네오는 원시의 모습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섬이면서 작은 대륙(한반도 3배 면적)이다. 곳곳에 아직 화산이 살아 움직이는 중이지만 거주지역은 평화로웠다.키나발루는 보르네오의 좌측 돌기를 형성하는 준봉이다. 거대함, 웅장함, 장엄함아 살아있는 태초의 무대다. 세계의 허파는 아마존 밀림, 아시아의 생명줄은 보르네오다. 여기서 만들어지는 산소는 동남아시아 오세아니아 일대의 생태를 책임진다.

17년 만에 다시 찾은 코타키나발루는 활기가 넘쳤다. 영혼의 안식처(키나발루)와 항구도시(코타)가 합쳐진 모습이다. 말레이시아의 경제성장과 더불어 조금 더 번잡해졌을 뿐 사방은 그대로인 듯싶다. 천체물리학자 닐 디그래스 타이슨(칼 세이건의 후계자)의 설명대로 지구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산도 땅도 수목도 여전한데 짧은 수명을 마치고 떠나는 나 같은 인간들이 ‘산천의구’를 외친다. 맞는 이야기다. 지각변동으로 천지가 뒤바뀌는 건 대개 천만년 이상이 주기다. 인류문명의 탄생 이래 아직까지 이런 경험은 없었다. 생이 너무 짧아 자연이 변하지 않는다고 느끼며 사라질 뿐이다.

세계 3대 석양명소로 꼽히는 탄중아루나 수트라 하버 베이의 감미로운 산책길도 뒤로 미루고 내친김에 아침 일찍 키나발루로 달렸다. 코타에서 3시간 만에 메실라우 네이처 캠프(2000미터)에 도착했다. 포개져 회색으로 보이던 산맥의 줄기들이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져가기를 수십 번, 내 시선과 봉우리의 숨바꼭질은 끝나질 않았다. 기대했던 것 보다 산길은 잘 포장되어 있었다. 문명(자동차)은 밀림 속으로 한없이 나를 끌고 들어갔다.

키나발루 꼭대기 로우피크(4095m)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흐린 날은 구름에 가리고 맑은 날은 운해에 덮이고 밤에는 어둠에 감춰지니 한눈에 사로잡기가 쉽지 않다. 잠깐 모습을 드러내는가 싶으면 이내 자연의 조화 속으로 숨어버리곤 했다. 측면으로 보이는 평평한 정상은 누워있는 사람의 열굴 형상으로 비쳐졌다. 햇빛에 반사되는 눈부신 영지를 멀리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 구름이 오고가는 키나발루산 정상 로우 피크가 멀리 보인다
▲ 구름이 오고가는 키나발루산 정상 로우 피크가 멀리 보인다

키나발루의 동쪽은 직벽이고 서쪽은 완만했다. 쏟아지는 폭포의 가는 선들이 두 번 꺾이면서 발아래 낮은 사면으로 아득히 이어지고 있었다.산의 서쪽은 말레이 반도다. 아래로 브루나이 왕국이 있고 동쪽은 바다건너 인도네시아 술라웨시 지역이다. 키나발루가 동남아시아 최고봉이라지만 아시아의 히말라야(8850)나 북미의 맥킨리 (6194), 남미의 아콩카구아(6962),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5894), 유럽의 엘부르즈(5633), 남극대륙의 빈슨 메시브(4897)와 비교하기는 벅차다.

19세기 영국 식민지 시절 보르네오는 목재와 고무를 수탈하는 대상이었다. 항구 가깝고 자원이 넘쳐 개발된 전초기지였다. 2차 대전 말기 일본의 확장을 막기 위해 호주군이 전투에 참가하면서 코타키나발루는 격전지로 변했다. 전쟁은 폐허를 남기고 끝났다. 완전한 복구는 그 후 50년이 걸렸다. 인구(20만)의 30%인 중국인들은 그때부터 이 지역 상권을 장악하고 있다

케노피 워크의 흔들다리를 지나 정글속으로 진입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꽃 라플레시아는 볼 수가 없었다. 고산 깊숙이 신비로운 땅에서만 잠깐 피였다가(3-7일) 지고 마는 신화(神花)이기 때문이다. 양배추 모양의 주황색 자이언트 라플레시아는 활짝 피었을 때 지름 1미터가 넘는 지구상 최대의 거화로 알려져 있다. 키나발루가 아직 원시의 영토임을 증명해주는 상징이다.

험산 계곡마다 자리 잡은 마을들은 동화속의 그림 같았다. 정상이 올려다 보이는 산중턱에 아직도 카디잔 원주민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마을이 마주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빨간 지붕, 흰 구름, 파란 하늘이 파스텔 톤으로 정연하게 세월을 맞고 있었다.

고산에 안긴 ‘카디잔’ 촌의 평온은 속세에 어지럽혀진 마음을 가다듬기에 손색이 없었다. 키나발루를 찾은 이들이 끓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 키나발루 산의 석양녘
▲ 키나발루 산의 석양녘

일본의 국민작가 시바 료타료의 독백처럼 “산은 허물어지고 내는 흘러 길이 새롭고, 돌은 묻혀 흙에 덮이고, 나무는 늙어 새 나무로 대체되니 시간 흐르고 대가 바뀌건만 그 자취 찾기 어려울 뿐”인 것이 광대한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마음이 아니던가.

태어나면서 우리는 동시에 시간의 강물 속으로 던져진다. 허우적거리다 보면 성장기를 지나 세포가 죽어가는 사멸의 길로 들어선다. 젊었으나 세포는 계속 줄고 사변은 낡아져 빠르게 변해 버린다. 그 환경에 익숙해지면 어느 순간 지나치게 작아져버린 자기 세계를 떠나 여행자의 운명을 꿈꾼다. 키나발루 사람들이 가끔 반대편 산으로 순례를 떠나는 까닭이다. 죽은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죽은 뒤에 남는 것은 살아 오직 남은 자의 시간 속 기억뿐이다.

지난 날 나 같은 인간은 이런 경험 속에서 허둥지둥하였다. “힘은 너무 약했고 목표는 아득히 멀었다. 목표에 내가 도달할 수는 없고 목표가 시야에 들어왔다고 해도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그러나 너희들이 다음세상을 맞이하면 추억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생각해다오” (베르톨트 브레히트. 독일시인)

키나발루 산중의 하루해가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다시 도시로 돌아가야 하고 그렇게 인생이 흘러갈 것이다. 흐른다는 것은 무엇인가.의식은 인간의 삶을 견디기 위해 만든 가상현실에 불과한 장치인데. 시간도 나이도 나를 최면시키는 각성제일 뿐이다. 삶에 대한 진짜 이야기는 허공에 흩어진다. 허공에 이야기하다가 죽는 게 인생이지만 끝까지 자기이야기를 지껄이다가 가는 것이 인간의 한 평생이다.

그래서 나는 늘 이세상것이면서 이세상것이 아닌 것들에 열광했다. 영화를 비롯한 모든 예술이 그렇다. 꿈꾸는 식물과 다를 것이 없다. 현실을 생각하면 한순간도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었고 세상도 과거의 그곳이 아니었다. 키나발루에서 떨어지는 태양은 아득한 꿈같았다. 진정한 치유는 꿈에서 꿈으로 이어진다. 수많은 세월이 흐른 뒤 다시 이곳을 찾아도 지금 같은 느낌이 살아있으리라는 꿈.

“내가 당신의 꿈속에 들어갈 수 있다면 나도 당신을 내 꿈속에 초대하겠소(밥 딜런)”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대표기자 justin-7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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