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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의 세상이야기] 폐허의 미학, 커크스톨 수도원

김경한 justin747@cstimes.com 기사 출고: 2018년 11월 03일 오후 7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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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벌판의 낡은 수도원은 황량한 시간의 역사속에 그대로 갇혀있었다. 바람에 날리는 낙엽과 아주 가끔 날아오르는 까마귀 몇 마리만이 오랜 적막을 휘젓고 지나갔다.런던으로 떠나는 기차는 서쪽에서 다가왔다가 동쪽으로 이내 멀어져 갔다. 자그마한 강물이 흐르고 반복되는 계절에 나이테만 두꺼워진 나무들은 쉬지 않고 마른 잎들을 지상으로 내려 보내고 있었다.

어느곳에서나 건물의 사체가 먼지를 머금고 아직 직립해 있을 때 나는 항상 깊은 수심 속으로 내려가는 죽음을 상상한다. 하지만 이곳은 그런 사색도 허락하지 않을 만큼 형해화된 자취로 남아 쓸쓸했다. 모든 폐허는 아름답다고 했던가. 이전에 그곳은 집이거나 수도원이거나 인간의 냄새로 가득한 영역이었을 테니까. 영국의 북부 요크와 맨체스터를 사이에 두고 트라이앵글을 이루는 도시 리즈는 낡은 수도원을 끌어안고 석양을 맞이하고 있었다.

결혼과 이혼으로 얼룩진 사생활의 주인공 헨리8세(튜더왕가의 강력한 군주)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카톨릭 수도원들을 모두 폐쇄시켜 버렸다. 시시콜콜 전통과 규범을 간섭하는 교황청의 끄나풀들이 눈의 가시였다. 여섯 번의 결혼으로 유명한 그는 엄격한 중세교회의 율령들에 숨이 막혔다. 문을 닫은 수도원대신 만들어진 성공회는 오늘날까지 영국의 정교회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커크스톨 애비 수도원은 한때 수 백 명의 수사들이 경건한 신앙의 깊이에 빠져들었던 성소다. 리즈가 도시로 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던 곳이다. 수도사들은 하루 8번 예배를 드리고 남는 시간은 명상을 하거나 서적을 읽으면서 신의 진리에 다가서고자 몸부림쳤다. 기도하는 이들의 생은 잔혹하리만큼 엄격했다. 인간의 본능을 헌납한 채 신의 영역에서 인간이기를 포기한 삶이었다. 평신도들은 수도원 앞으로 펼쳐지는 들판에서 농사를 짓거나 양떼를 돌보며 중세를 살았다.

▲ 리즈의 커크스톨애비 수도원 유적지 내부공간
▲ 리즈의 커크스톨애비 수도원 유적지 내부공간

지금은 마른 잎이 뒹굴고 새의 깃털만이 바람에 날리는 폐허지만 이 수도원은 고대(AD 657년)에 세워진 유럽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스칸디나비아의 무자비한 바이킹족 침략으로 성지는 무너지고 말았다(서기 873년). 오랜 세월 후 윌리엄 드 퍼시의 재건(1078)으로 빛을 보았지만 헨리 8세의 도그마에 무릎을 꿇고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1540).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전역에서 가장 유서 깊은 남자 수도원은 그렇게 역사의 그림자만이 남게 되었다.

“가을이 오면 어디론가 떠나야 할 것 같은, 중심을 잃고 떨어져 나갈 적색, 황색의 낙엽을 찾아 먼 사원의 뒤뜰을 거닐고 싶다. 잊어버린 고전 속의 이름들. 내 다정한 숨소리를 나누며 오랜 해후를 하고 싶은 계절이여” (박이도). 상념은 또 다른 상념의 늪에 나를 빠지게 했다. 마른 잎이 지듯이 까닭 없이 숱하게 떠나버린 목숨들과 엷은 썰매소리 같은 회한을 반추하며 석양의 끝자락까지 하염없이 수도원 들판을 바라보았다.

1300년을 버텨온 돌기둥 들, 파르테논의 열주처럼 서있지만 이끼에 견디다 못해 검은색으로 변해버린 돌의 형체들, 폐허의 황량함, 그 쓸쓸함의 언어들 사이로 불어오는 수도원의 바람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무너져 내리고 반쯤 남은 수도원 벽 사이로 푸른 바다가 보였다. 언덕으로 올라서보니 해변 마을이 아늑했다. 붉은 지붕과 흰 벽들로 채워진 건물들이 방파제를 사이에 두고 평행으로 배치되어 바다와 하늘의 원색을 받아내고 있었다.

고대와 중세를 가르는 역사유산. 요크셔의 커크스톨 대수도원은 추억-폐허-망각-역사. 의 윤회를 밟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오자 돌기둥들은 성당의 오르간처럼 각기 다른 소리를 내면서 진동했다. 이 고장 출신의 화가 윌리엄 터너나 조각가 헨리 무어는 가끔 커크스톨을 산책하며 창작의 에너지를 얻어가곤 했다.

▲ 반쯤 무너진 커크스톨 수도원은 시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 반쯤 무너진 커크스톨 수도원은 시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바람 불고 비라도 뿌리는 음산한 날에는 괴이한 광기가 퍼져 오를 것 같아 으스스한 느낌이다. 브람 스토커(영국의 극작가)의 소설 ‘드라큘라’의 모델이 되었던 이유를 알만하다. 하지만 모든 폐허는 의미 있고 위대하다. 한때 엄청난 역사를 만든 현장이었으니까.

리즈에 머물면서 나는 이곳을 몇 번 서성거렸다. 인생에서 현재보다 지나가버린 과거는 언제나 변치 않는 아름다움이다. 수도원 앞쪽의 육중한 떡갈나무 산책로가 발길을 붙잡는다. 폐허의 내부공간에 남아있는 돌멩이들은 한때 이곳이 분주한 일상의 성터였음을 침묵으로 증언하고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가고 오는 시간과 근원의 목마름만이 가득했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사람들.어딘가 몇 군데는 무너진 채, 모두가 떠났다. 그래서 아무도 사랑할 수 없었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 지나가면서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았던 시간. 그래서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이 없는 나의 폐허.” (황지우)

붉게 물들어 천천히 떨어지는 석양 속으로 조용히 침잠해가는 커크스톨 수도원. 그 자취는 늦가을 낙엽과 함께 이내 어둠속으로 또 한 번 묻히고 있었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대표기자 justin-7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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