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도쿠가와의 세 마리 원숭이
상태바
[김경한의 세상이야기] 도쿠가와의 세 마리 원숭이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opinion_top_01.jpg

전쟁과 혁명의 시대는 인간의 고통을 바닥에 깔고 있다. 삶이 티끌이고 죽음은 가볍다. 지략과 전략, 권모술수, 최후에는 힘을 바탕으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후세의 평가를 받는다. 단순한 용맹과 결기는 당대를 적시지만 패하고 사라지면 그만이다.비굴할 정도로 교활하게 또는 음흉할 정도로 기다리며 치밀하게 작전을 짜고 살아남아야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 낸다. 일본의 찬란한 에도 막부시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가 그런 사람이다.

닛꼬의 가을은 제법 깊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도쿄 부근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으로 일본인들이 귀하게 여기는 장소다.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에도시대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주인공의 사당 도쇼구(東照宮)가 있기 때문이다. 피비린내 나는 전국시대 100년의 혼란을 끝내고 내부 통일을 이뤄낸 쇼군의 정기를 가까이서 느끼려는 사람들로 늦가을 오후 도부철도 닛꼬역은 붐비고 있었다.

도쿄에서 140킬로미터 떨어진 도치기현 고요한 산 중턱에 영웅의 사당은 자리 잡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손자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대역사를 일으켜 세운 곳이다. 2만 명의 기술자들과 450만 명의 인원을 동원해 역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만들었다. "죽어서 이곳 닛꼬에 묻히고 싶다" 는 도쿠가와의 유언에 따라 시즈오카에서 유해가 옮겨졌다. 380년 전(1636년)의 일이다.

▲ 불필요한것은 보지도 듣지도 말라는 원숭이 목각앞에서
▲ 불필요한것은 보지도 듣지도 말라는 원숭이 목각앞에서

도쇼구 정문에는 후쿠오카에서 끌고 온 거대한 화강암 표지석(길이 9미터 지름 3미터)이 사람들을 압도했다. 나의 목적은 이 돌이 아니라 요메이(陽明)문 안쪽의 200개 동물 부조를 보기 위함이었는데 에도에서 닛꼬까지 천인무자행렬(千人武者行列)의 장엄한 세리머니 때 세운 유물들이 위엄을 보태고 있었다. 울창한 스기(삼나무)숲 사이로 이어지는 돌계단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섰다. 산 너머 주젠지 호수에서 번져 내려오는 단풍은 이미 볼이 붙어 있었다.

말(馬)은 도쿠가와 시대의 최대전력이었다. 수많은 전투에서 중요한 이동수단이었으므로. 그 만큼 보병보다 중요한 군대의 한 편제로 존중되었다. 원숭이는 일본 고대로부터 말들의 병을 막아준다고 믿어온 영험한 동물이었다. 이끼가 두껍게 내려앉은 석등 사이로 장식된 동물조각 가운데 원숭이는 단연 시선을 사로잡았다. 무지개 색으로 칠해진 정교한 조각들은 12개의 둥근 기둥이 떠받치고 있었다.

▲ 닛꼬(日光)의 도쇼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당 석등
▲ 닛꼬(日光)의 도쇼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당 석등

"인생에서 가장 강력하고 남자다운 사람이란 인내력이라는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이다" 도쿠가와 어록가운데 으뜸으로 치는 대목이다. '도쿠가와식 평화시대' 가 달성될 때까지 그는 3마리의 원숭이를 잊지 않고 살았다.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는 것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않는다는 신조를 마음속에 새기며 전쟁의 시대를 지나왔다. 눈 가리고 귀 막고 입을 손으로 덮은 세 마리의 원숭이 조각이 나의 발길을 오래 붙들었다.

일본의 국보이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 이전에, 리처드 카벤디쉬(영국의 유적전문 탐사가)가 죽기 전에 곡 가봐야 할 순례코스로 콜로세움이나 노트르담, 자금성과 함께 도쇼구를 꼽은 이유 때문이 아니라 풍운의 시대에 살아남은 그의 인생철학이 알고 싶었고 끝까지 목표를 이뤄낸 지혜의 원천이 궁금했다.

원숭이의 일생은 8개의 거대한 목판에 조각되어 있었다. 시기와 질투,갈등, 배신을 넘어서 인간의 평화시대를 염원했던 혁명가는 자신의 소망을 원숭이에서 찾고자 했다. 물감이 나무에 젖어들어 바래어가는 작은 목각 안에 전란의 처세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의 뜻대로 에도는 250년간 평화롭고 문화가 꽃피워져 근대일본의 초석이 되었다. 도쿠가와의 유해는 도쇼구 가장 안쪽 5미터 두께의 청동탑에 안치되어 있었다.

▲ 도쇼구, 원숭이의 지혜를 새긴 목판

▲ 도쇼구, 원숭이의 지혜를 새긴 목판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서두르지 말라.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음을 알면 불만을 가질 이유도 없다. 마음에 욕심이 차오르면 곤궁했던 시절을 떠올려라. 인내는 무사장구(無事長久)의 근본이요 분노의 적이라고 생각해라. 이기는 것만 알고 정녕 지는 것을 모르면 반드시 해가 미친다. 오로지 자신만을 탓해야 한다. 남을 탓하지 말라. 모자라는 것이 넘치는 것보다 낫다. 자기 분수를 알아라. 풀잎위의 이슬도 무거우면 떨어진다"

이러한 삶의 자세를 '도쿠가와류' 로 해석하는 이들도 많다. 그의 인생은 고단했다. 두 살 때 어머니를 잃었고 여섯 살 때 적진 이마가와 가문의 인질로 잡혀갔다. 간신히 살아남아 패가 풀리는가 싶었던 장년에는 오다 노부나가와의 갈등으로 자신의 아들을 죽여야 하는 형극을 맛보기도 했다. 세끼가하라 전투에서 천하를 재패할 때까지 지난한 인생의 연속이었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수많은 위기를 뚫고 마침내 최후의 승자가 된 그의 처세가 삼원(三猿) 으로 연결되어 있음은 우연이 아니다. 도움 되지 않는 것들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않는다는 인고의 세월이 농축되어 만들어진 선물이었던 셈이다. 인내는 겸손을 동반한다. 아집과 교만,편견의 유혹을 수없이 견뎌내야 가능한 업이다.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라 천하의 천하여야 한다"는 정신을 잃지 않았기에 막부는 성공했는지도 모른다. 천하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단 2년 만에 아들에게 대권을 물려주고 쇼군자리에서 내려올 줄 알았던 선택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겸손과 인내가 도쿠가와 막부의 성공을 이끈 정신이었다. 그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늘로 이어지는 시대의 언어가 되기에 충분하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대표기자 justin-747@hanmail.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jesun 2017-11-06 22:39:55
저는 요새 충무공의 명량해전을 앞둔 마음을 헤아려보고 있었는데요, 참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는 글입니다. 이시기에 고작 도쿠가와 따위의 글이라..

jesun 2017-11-06 22:38:36
도쿠가와의 인색함을 닮고 싶으신가 보네요. 딱히 이걸 주제삼아 안쓰셔도 밑에 있으면서 인색함 많이 느꼈습니다.

투데이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