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이 또한 지나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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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이 또한 지나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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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서늘해지고 무성했던 잎들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햇빛의 기세가 꺾이고 생명이 시들어가는 포쇄의 계절이다. 구름 높아지고 허공의 빛깔은 더욱 푸르게 짙어지고 있다. 정열의 시간이 여름과 함께 물러가면 어쩔 수 없이 인간은 사색의 침묵 속으로 빠져든다. 존재의 근원과 미지의 앞날이 궁금해지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살아온 날들의 체험으로 또 다른 계절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뿐이다.

중국 북경대에도 가을기운이 스며들고 있었다. 담장 하나 사이인 칭화대 앞을 지나 캠퍼스 호텔에서 차 한 잔을 마시고 대학원을 찾았다. 오래전부터 마음에 넣어 두었던 노학자 지셴린 선생(季羨林, 1911-2009)을 만나기 위해서다. 그는 98세의 나이로 이미 운명을 달리했다. 산동성에서 태어나 청나라 말기와 공산당 혁명을 거쳐 현대 중국까지 풍운의 시대를 살았다. 백년 가까운 인생을 통해 얻은 지혜가 마지막 저서 '다 지나간다'에 가득 담겨있다.

"국가를 찬양하는 것만이 애국이 아니라 국가에 불만을 나타내는 것도 애국이다" 는 말에 감동을 받아 존경을 아끼지 않았던 당시 원자바오 총리가 장례식에서 "나라의 스승이 가셨다" 며 눈물을 쏟았다. 생전에 그는 인도범어 등 14개국 말을 익히고 불교 어원과 아시아 문화연구로 북경대 동방학파를 이끌었다. 남겨진 500권의 저서는 지성의 역작들로 평가받고 있다. 대학원 벽 곳곳에 포스터로 제작된 선생의 책들이 장식되어 눈길을 끌었다.

▲ 북경대 어학원 2층, 지셴린 선생 흉상옆에서
▲ 북경대 어학원 2층, 지셴린 선생 흉상옆에서

커다란 조화의 물결 속에서

기뻐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게나

끝내야 할 곳에서 끝내버리고

다시는 혼자 깊이 생각 마시게. (도연명의 신석(神釋) 마지막 구절)

지셴린은 힘든 상황이 닥쳐오는 인생의 고비마다 도연명의 문장을 가슴에 품고 꺼내보았다. 60대에 부인을 잃고 혼자 노년의 30년 고독을 이겨내며 마지막까지 글쓰기와 독서를 지속했던 힘이었다. 독일 괴팅겐 대학 10년 유학 뒤 북경대 교수시절 문화혁명의 혹독한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중국 현대 인문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기까지 정열적인 세월을 보냈다.

살아보면 어느 세상이든 한순간이라도 편한 시간은 없는 법이다. 불안정한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수용하고 순간의 고통과 기쁨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혼자라는 외로움에서 벗어나 따뜻하고 평온한 일상을 느낄 수 있게 된다고 그는 믿었다. 평범하지만 쉽지 않은 내공이다.

노년을 어떻게 견뎌야 하는지 고민하는 이들에게 지셴린은 좋은 모델을 제시했다. 장수사회 슈퍼 시니어가 의미 있게 사는 최고의 방법은 역시 지성을 향한 여정임을 실천으로 보여줬다. 대학원 건물밖에 있던 흉상이 얼마 전 국제대학원 2층으로 옮겨졌다. 아시아 각국에서 찾아온 학생들에게 여전히 침묵의 강의를 하고 있는 셈이다.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용서도 사랑도 미음도 행복도 불행도 생명도 다 지나간다던 그 역시 그렇게 바람처럼 지나갔다.

"인생 백 년 사는 동안 하루하루가 작은 문제들의 연속이었네.

제일 중요한 방법은 내버려 두는 것.

그저 가을바람 불어 귓가를 스칠 때까지 기다리세"

평온하고 조화로운 세상을 희망했던 생전의 심성대로 그의 인생철학은 자연의 질서를 따르는 도교적 색채가 짙게 묻어난다. 갈등과 탐욕의 고리를 잘라내고 순리대로 다 같이 어울려 사는 대동사회를 꿈꿨다. 그래서 '중국 인민들의 선생님' 으로 변치 않는 추앙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 세대의 소통을 이뤄낸 지셴린의 노년모습

▲ 세대의 소통을 이뤄낸 지셴린의 노년모습

지금이 어느 때쯤일까/ 술잔을 높이 들어 하늘에게 물어본다/ 바람타고 천상궁궐로 가고 싶구나/ 누각 위 밝은 달은 창가로 다가와/ 시름 속에 잠 못 드는 나를 비추는 구나/ 어이하여 달은 서로 헤어져 있을 때만/ 그렇게도 둥글게 떠오르는가/ 인간에게는 이별의 슬픔과 만남의 기쁨이 있고/ 달에게는 밝음과 어둠 이지러짐이 있으니/ 이는 예로부터 온전하기가 어려웠다/ 오래오래 부디 건강하여 /천리 먼 곳에 있더라도 함께 저 달을 바라 볼 수만 있다면.

(소동파의 시. 水調歌斗)

단위엔런장쥬(但願人長久)는 소동파의 시에 곡을 붙여 만든 노래다. 어느 중추절에 동파가 멀리 있는 동생을 그리워하며 남긴 애절한 운문이다. 언제 떠올려도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감정이 일렁인다. 지셴린 선생이 생전에 가장 좋아했던 곡이기도 하다. 고독이 밀려오면 언제부턴가 나 역시 덩리쥔(鄧麗君. 대만여가수 1954-1992)의 노래로 자주 들어왔다. 애절하면서도 휘어지고 다시 미끄러져 내려오는 청음이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천식으로 덩리쥔이 요절하고 나서 이 노래를 왕페이(대만 여가수) 목소리로 바꿔 듣고 흥얼거린다.

인간은 본래 고독한 존재다. 부모 형제, 자매, 친구. 모든 인연이 다 외롭게 흘러간다. 그저 오래 건강하게 살아서 어디에서든지 천리 먼 곳에서도 같은 밤에 밝은 달을 볼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 있겠는가. 소동파의 문장은 중국 지성사를 관통하면서 지셴린에게까지 따뜻한 불씨로 남겨졌다.

천지란 만물이 잠시 쉬었다 가는 곳이고 세월이란 끝없이 뒤를 이어 지나가는 나그네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인연을 믿는 사람은 성공해도 오만하지 않고 실패해도 실의에 빠지지 않으며 이겨도 승리감에 도취되지 않고 져도 하늘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저 진인사 대천명 할뿐이다

공자는 물을 보며 이렇게 적었다. "흘러가는 모든 것이 저와 같구나.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흐르는구나" 그런 허무를 딛고 소동파는 "일어나 춤추며 그림자와 놀아도 어찌 인간세상만 하리오" 라고 읊었다.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다. 이 가을의 고독을 잘 이겨낸다면 지셴린 선생의 말처럼 아무리 힘들고 괴로운 일상일지라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대표기자 justin-7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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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n 2017-09-25 23:23:01
그렇게 지나갈 한번 뿐인 인생~ 우리 쪼잔하게 살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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