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실체드러난 블랙리스트, '피해자'들의 반격이 시작됐다
상태바
[기자수첩] 실체드러난 블랙리스트, '피해자'들의 반격이 시작됐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_김종효 증명사진.jpg
[컨슈머타임스 김종효 기자]

"..집에 문을 열고 딱 들어가는 순간에 무릎이 꺾이면서 너무 무섭고, '그 얘기는 하지 말 걸 그랬나' 온갖 생각이 들면서 자괴감이 들고,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까 거의 공황장애 증세가 오고.."

방송인 김제동은 9월 13일 서울 상암동 MBC 사옥에서 열린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 총파업 결의대회에서 과거 이명박 정부 당시 국정원 직원을 만났던 당시를 이같이 회상했다. 마이크 하나만 잡으면 끝없이 떠들 수 있다던, 헌법을 줄줄 외우면서 정면으로 부당함에 맞섰던 김제동 역시 그 누구도 몰랐던 고충이 있었다.

이명박 정부에서 문화·예술인들의 블랙리스트가 작성됐다는 의혹이 제기돼 파문이 일고 있다. 소설가 조정래, 영화감독 이창동, 방송인 김제동, 김미화, 가수 윤도현을 비롯해 문화계 6명, 배우 8명, 영화계 52명, 방송인 8명, 가수 8명 등 총 82명이 이 명단에 포함된 것으로 나타났다. 국정원은 9월 14일 이명박 정부 시절 이뤄진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의혹 사건을 검찰에 수사 의뢰했다.

지난 박근혜 정부에 이어 이명박 정부에서도 블랙리스트에 올라 압박을 받았던 '방송하지 못하는 방송인'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폭발했다. 압박의 정도가 심했던만큼 터져나온 분노는 더 강했다.

방송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하차해야만 했던 김제동은 앞서 소개한대로 당시 자신이 겪었던 부당함을 토로하고, 국정원 직원이 자신의 활동에 직접적으로 개입했다고 밝혀 사실상 이명박 정부의 민간인 사찰 의혹을 본격적으로 수면 위에 띄웠다. 당시 김제동과 윤도현의 소속사인 디컴퍼니(=다음기획)는 세무조사까지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제동은 지난해 소속사를 떠나 홀로서기에 나섰다. 

라디오 프로그램 '이외수의 언중유쾌'를 진행하다 1년 만에 프로그램 폐지로 하차한 이외수 작가는 SNS에 "이명박근혜 치하에서 블랙리스트 만든 XX들아. 니들이 북한 김정은 꼬붕 XX들하고 무엇이 다르냐. 양심에서 썩은내가 진동하는 정치 쓰레기 XX들. 그런 악행을 저지르면서 국민들 세금까지 축내고 살았다니, 부끄럽지도 않냐. 부디 빵깐에서 오래 썩어라"며 분노를 표했다. 배우 김규리(개명 전 김민선)도 SNS에 "이 몇 자에 내 꽃다운 30대가 훌쩍 가버렸네. 10년이란 소중한 시간이.. 내가 그동안 낸 소중한 세금들이 나를 죽이는 데 사용됐다니"라고 허탈한 심경을 드러냈다. 

방송에서 퇴출 통보를 받은 김미화, 문성근은 각각 법적 대응 방침도 시사했다. 문성근은 이명박 전 대통령과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민·형사 소송을 진행하며 민변의 김용민 변호사가 법률 대리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구체적 계획까지 밝혔다. 김미화 역시 "블랙리스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 단죄를 해야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누구보다 비판의 날을 세웠지만 정작 지난 박근혜 정부 블랙리스트와 이번 이명박 정부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없어 팬들조차 당황케 했던 가수 이승환은 오히려 "나 좀 넣어라, 이놈들아!"라고 일갈했다. 이승환이 현재 진행 중인 2개의 거대 프로젝트를 꼽으라면 바로 '인디밴드와의 상생'과 '이명박 전 대통령 직접 저격'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비록 이름은 블랙리스트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이승환은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해 누구보다 거센 공격을 하고 있다. 

이승환은 최근 이명박 전 대통령을 직설적 풍자로 정조준한 곡 '돈의 신'을 발표해 큰 파장을 일으켰다. 'MB 전문기자'로 불리는 주진우 시사인 기자가 이명박 전 대통령 분장을 하고 뮤직비디오에 나서 더 화제가 됐고, 지상파에서 MBC만 '돈의 신'에 대해 방송불가 판정을 내려 이에 대한 기사가 쏟아지면서 뜻하지 않은 홍보가 됐다. 알 수 없는 이유로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2위에서 관련 검색어가 갑자기 사라지면서 '보이지 않는 손'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비자금 실체에 다가가는 모습을 담아낸 추적 스릴러 '저수지 게임' 영화 엔딩 크레딧에 사용된 곡이기도 하다. 이 정도면 이승환이 블랙리스트에 오르지 못한 것은 그가 '블랙리스트'가 아니라 좀 더 특별한 관리대상인 '골드리스트'이기 때문 아닐까 생각된다(는 위안을 그에게 보낸다).

지난 10년간 '관행', '관습'이란 이름으로 포장돼 비밀리에 진행됐던 '악행'을 비롯해 모든 것은 조금씩 바뀌고 있다.

사상 초유의 국정농단 사건은 박근혜 씨의 대통령직 탄핵으로 이어졌고, 소문만 무성했던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정권에 장악됐던 언론과 방송을 이제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곪고 곪은 고름을 터뜨리려 하고 있다.

9월 11일 열린 박상기 법무부 장관을 상대로 한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이종걸, 표창원 의원은 의혹이 제기됐던 농협 210억 대출, 즉 이명박 전 대통령 비자금에 대한 수사 촉구 발언을 했고, 박상기 장관은 "현재는 기소 준비 중인 상태다. 더 적극적으로 수사하도록 지휘・감독하겠다"는 답변을 했다. 국민적 의혹을 해결하는 한 걸음을 더 떼게 하는 데 있어 문화·예술계가 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 정도면 지난 10년간 받아온 공격에 대한 '카운터 펀치'라고 해도 되겠다.

비정상적인 것들이 점점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비상식적던 것들이 상식적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늘 '가만히 있으라'는 종용과 압박을 받았던(그것도 생계를 빌미로) 문화·예술인들은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는다. 그들의 반격이 시작됐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투데이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