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오로라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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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오로라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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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은 내리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나서 한 잔하고 다시 하늘을 내다봐도 대낮이다. 호텔에 들어가 봐야 잠이 오지 않을 분위기다. 밤 10시가 넘어가는데 빛은 강하기만 하다. 스칸디나비아의 여름은 그렇게 살아있었다. 스톡홀름을 빠져 나와 500년 역사를 간직한 웁살라 대학을 돌아보고 나오는 발길에 걸린 백야는 늦은 밤까지 뜨겁게 대지를 달구고 있었다. 북구사람들은 이 여름을 노던 라이츠라고 한다. 오로라가 떠오르는 시기이기도 하다.

몇 년 전 여행의 기억을 반추하며 대관령을 생각했다. 스칸디나비아의 그 오로라가 대관령 하늘에 떠오르길 기원하면서 질주하는 영동고속도로변의 산들을 보았다. 굵은 근육을 자랑하는 강원도 봉우리들이 협연하듯 휴가철 행렬을 맞아들인다. 평창은 썸머 페스티벌로 이미 축제의 시간이다. 10년 만에 한국의 대표 행사로 발돋움한 대관령 음악제. 올해는 '노던 라이츠(Northern Lights)-오로라의 노래'라는 주제로 신선한 구성을 선보였다. 주제에 걸맞게 스웨덴과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출신 거장들의 레퍼토리로 채워져 한여름 밤 북유럽의 오로라를 만난듯하다.

3년 전 예술 감독으로 인연을 맺은 첼리스트 정명화와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자매의 역량에 국제적 인맥이 한껏 빛난 행사였다. 한국인이기 이전에 세계적인 두 거장의 세심한 준비와 노력은 이 음악제를 한 단계 점프시킨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알펜시아의 밤은 거장들의 연주로 가득했다.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를 시작으로 그리이그와 멘델스존, 포레, 슈베르트의 선율이 날마다 이어졌다. 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해마다 늘어날 정도로 대관령 음악제는 이제 여름 강원도의 명품코스가 되었다.

스위스의 루체른 콘서트나 보스톤의 탱글우드 음악제, 오스트리아의 짤츠부르크 페스티벌을 목표로 달리는 대관령 음악제에 오로라의 빛이 선명하게 내려주길 기원하는 마음이다. 동계올림픽이 기다리는 광활한 산지는 대자연의 풍광으로 소리미학의 무게를 더해준다. 초목들의 검푸른 광합성은 하늘을 찌를 듯한 기운으로 솟아올라 평창을 유혹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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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배출해 온 수많은 클래식 아티스트들을 돌아보면 우리나라도 이만한 깊이의 행사 하나쯤 가질만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늘 아쉬웠다. 관객들의 얼굴에는 자부심과 기대감이 역력한 것 같다. 알펜시아 홀에서 만난 정경화 연주회는 세계 어느 음악제 못지않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우리나라뿐인가. 전 세계가 아끼고 사랑하는 20세기 최고 바이올리스트의 무대는 홀 전체가 하나 된 보기 드문 하모니였다.

한국의 보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뛰어난 음악가는 모차르트 27번, 브람스 1번, 포레 1번을 2시간 반 동안이나 열정적으로 소화해냈다. 장신의 피아니스트 케빈 케너와 호흡을 맞춘 바이올린은 가늘게 혹은 격렬하게 음을 뿜었다. 청중들은 3번이나 계속된 커튼콜과 박수갈채로 거장을 그냥 놓아주지 않았다.

박수치기 힘드니 그냥 한 곡 더 하겠다는 정경화의 애교 멘트는 젊은 날의 카리스마와는 다른 깊이와 연륜을 엿보게 한다. 연주의 땀과 환호로 알펜시아의 밤은 정지해 있었다. 1971년 제네바 국제 콩쿠르 1위 이후 유럽무대를 시작으로 머리가 희끗해진 지금까지 진정한 첼로 거장으로 꼽히는 정명화. 브라가 라는 이름의 1731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사용하는 그녀와 나란히 앉아 동생 정경화의 명연주를 감상한 밤은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 알펜시아 콘서트 홀 앞에서 왼쪽부터 김동호 아시아영화제 위원장,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알펜시아 콘서트 홀 앞에서 왼쪽부터 김동호 아시아영화제 위원장,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강원도 출신 손열음이 정성스런 연주로 팬들을 대했고 대관령 음악제 출신의 주미강, 신지아, 이경선 크리스텔 리 등 차세대 바이올리니스트가 총출동했다, 김남윤 김의명 등 대선배들이 어린 후배들과 호흡을 맞춘 것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강릉, 춘천, 원주, 동해, 속초 등 영동의 주요도시를 순회한 것은 새로운 시도였다. 박혜선, 신수정, 에반 솔로몬 등 피아니스트와 로베르토 디아즈, 막심 리자노프, 이승원 등 비올라 주자들의 면면은 평론가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별히 첼로와 대금을 위한 이영조의 '모리' 연주는 정명화와 김진성의 대금, 설현주의 북이 한데 뭉친 종반의 하이라이트였다.

평창 뮤직 공연은 이제 10년 만에 전 세계 음악인들이 초청받고 싶어 하는 연주의 메카로 떠올랐다. 강효 감독이 주춧돌을 놓고 정명화 자매가 이어받아 판이 확 커졌다. 지난해까지 세계초연이 11개, 아시안 초연이 7개, 한국초연이 4개나 된다. 단순한 축제가 아니라 창작곡이 다수 선보이는 족보 있는 음악제로 이름을 올린 것이다.

매년 천 만 명이 찾는다는 짤츠부르크 봄 페스티벌을 돌아보고 받았던 부러움이 반쯤은 풀리는 것 같다. 국내 음악자산의 두께가 대관령의 자존심을 만들어 냈다. 한국인의 창조와 도전이 빚어낸 아름다운 결실이다. 세계적인 거장들과 음악계의 어린 심장들이 모여 두드리고 켜는 오로라의 빛은 대관령을 넘어 세계를 비추고 있었다. 이제는 문화 마케팅으로 국격을 높여 나가야 할 때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대표기자 justin747@cs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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