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더블린에서 고도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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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의 세상이야기] 더블린에서 고도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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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의 초원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무성한 푸르름이 그랬고 텅 빈 쓸쓸함이 그랬다. 그 들판은 천하에 얽매이지 않고 거침도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는 비바람을 견디며 풀들은 이리 눕고 저리 누웠다. 초원은 마치 바다물결 같았다. 나를 태운 자동차는 푸른 지평선을 가로지르듯 나아갔다. 한 자락도 대지의 맨살이 드러난 곳은 없었다. 경이로운 녹색의 향연이다. 풍경이 흘러와 마음에 스며든 한 나절, 낯선 자연은 그렇게 내 몸속에 가두어졌다. 길은 본래 주인이 없는 것, 내가 그 길의 주인이 되고자 했다. 지나온 모든 위치가 무효인 듯 황홀했다.

사무엘 베케트(1906-1989)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내 인생에서 오래토록 가슴에 남는 연극이었다. 이 작품이 노벨상을 받던 해(1969년) 연출가 임영웅(극단 산울림)은 국내 공연을 시작했다. 무려 40년 동안 2천회를 넘겼으니 베케트의 고향 아일랜드 초청공연이 그리 낯선 일은 아니다. 연극은 지금도 멈추지 않고 진행 중이다. 30년 전 대학로에서 봤던 기억이 아스라한 데 최근에는 홍대 앞에서 다시 만났다. 임영웅. 그도 어느덧 80대를 넘겼다. 베케트가 그랬던 것처럼 고도를 기다리며 오늘도 달리고 있다. 두 사람은 더블린에서 내내 나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어느 한적한 시골길 앙상한 나무 한그루만이 서있는 언덕 밑에서 늙은 두 방랑자(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가 '고도(godo))' 라는 인물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그들의 기다림은 어제 오늘 시작된 게 아니다. 그들도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지금은 고도가 누구인지, 어디로 온다는 것인지, 왜 기다리는 것인지도 잊었다. 그저 습관처럼 지루한 기다림으로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다.

지독한 무료함을 견디기 위해 서로에게 욕하고 질문하고, 회상하고, 싸우고, 장난하고, 춤추고, 운동하고. 그렇지만 고도가 오면 이 지루함이 끝난다는 희망 속에 둘은 끓임 없이 말을 이어간다. 그들의 상황이 한계에 이르렀을 때 나타나는 것은 고도가 아니라 그가 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갖고 오는 소년이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같은 상황이 되풀이된다.

▲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늙은 두 방랑자

▲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늙은 두 방랑자

연극이 끝났을 때 3시간은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일어난 게 없었고 아무도 오지 않았고 아무도 가지 않았다. 기나긴 공연만이 막을 내렸다. 그런데 나는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다른 이들처럼 얼른 일어설 수도 없었다.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 순간 다만 내 마음이 심하게 흔들렸다는 것은 확실하다. 고도라는 낯설지 않은 한 인간이 오랫동안 자신의 절망을 고백하는 모습을 골똘히 지켜본 묘한 경험이었다. 그래서 인간의 내면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가진 시간이었다.

고도는 오지 않는다. 이미 수없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영원히 지켜지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이미 와있는 고도를 알아보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앞으로 영원히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늙고 가난한 두 광대는 서로를 껴안다가 이내 밀치며 상대의 악몽을 깨워주면서도 그 꿈 이야기만은 듣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처연하다. 이제 모든 것이 지긋지긋하니 그만 헤어지자고 돌아서지만 서로가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며 늙어가고 있다. 시간처럼 무겁고 시간처럼 손쓸 수 없이 흩어지고 마는 모래를 가방가득 들고서 황량한 언덕을 헤맨다.

잉글랜드의 오랜 압제에 대항하며 꿈을 키웠던 더블린 시내 리피 강변을 돌아 600년의 역사를 가진 트리니티 대학으로 들어섰다. 베케트가 고뇌하며 학창시절을 보냈던 현장이다. '롱 룸(도서관의 인류문화유산)' 은 영어도 아니고 프랑스어도 아닌 아일랜드 모국어(게일릭) 저작들을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었다. 제임스 조이스와 나란히 사람들을 맞이하는 더블린 문학관과 베케트 다리를 오가며 석양을 보냈다.

▲ 더블린 리피강, 사무엘 베케트 다리에서

▲ 더블린 리피강, 사무엘 베케트 다리에서

"고도는 누구인가?" 수없는 사람들이 살아생전 베케트에게 질문했다. "그걸 내가 알면 작품에서 밝혔겠지" 그는 끝내 함구했다. 이승을 떠나기 전 만년에 그는 이야기했다. "좀 모자랄 때 나는 만족한다. 충분히 이해는 안 되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나는 모른다. 등장인물이 왜 고도를 기다리는지 그들에게 물어보라" 그래서 나 자신에게 되물었다. "고도를 왜 기다리는가" 나에게 대답했다. "인간은 갈 곳이 없다. 그래서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기다리는 것 아닐까". 다음날 새벽 다시 가본 베케트 다리 아래는 어제처럼 강물이 흐르고 같은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1930년대는 전쟁의 시대였다. 베케트는 청년시절 고국을 떠나 파리에서 살았고 레지스탕스에도 참여했다. 프랑스어로 작품을 집필하면서도 게일릭(아일랜드어)을 잊지 않았다. 고도를 통해 인간의 고통을 아름답게 들여다보고자 했다. 은둔, 죽음, 부활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종착역의 사람들을 그렸다. 되는 게 없는 주인공(Noting to be done)들을 사랑했다. 인생에서 고도는 누구인가. 보통 신이라든가 희망, 자유, 미래, 죽음 등으로 해석하기는 하지만 정답은 없다. 삶을 견디게 해주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 도 될 수 있다고 막연히 그려볼 뿐이다.

"내 인생이 낯선 곳을 향해 저물고 있구나. 잘못되어가고 있구나" 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우리의 영혼은 누더기를 걸치고 이 희곡의 텅 빈 무대 위로 던져진다. 고도가 오지 않는 대신 여름날 홍수처럼 어둠이 덮칠 것이다. 죽음 같은 침묵 속에 쌓여 움직이려 해도 떠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다시 내일을 맞을 것이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고, 줄거리도 없고, 해결할 것도 없는 일상을 위하여. 이것이 인생일진데. 미국 생퀸 교도소의 무기수들이 시간을 이겨내기 위해 이 공연을 했고 특사로 풀려난 뒤에도 그들은 전국을 유랑하며 공연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예술은 참으로 신기한 것이다.

▲ 사색을 좋아했던 생전의 베케트, 그의 책

▲ 사색을 좋아했던 생전의 베케트, 그의 책

베케트를 만날 때마다 나는 처절한 논리의 실종을 맛보아야 했다. '고도를 기다리며' 는 부조리 연극이다. 허무, 절망, 결여, 부정, 실패, 상실, 망명, 추방과 같은 언어의 뒷마당에 던져진 술병 같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 그런 인간들을 그린 그림이다. 예술은 인간의 결핍을 노래하는 것이다. 못 보는 것을 꺼내어 듣고 보고 소통하게 한다. "이 작품은 빈곤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기쁨을 준다. 기다림이라는 미학으로(노벨상 결정이유)". 정신적 빈곤시대에 겉만 번지르르한 사람들에게 베케트는 위대한 선물 '고도'를 주고 떠났다.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게 되면 내 삶에 소홀해질 수가 없다.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를 때 내가 당황하게 되며 끓임 없이 생각하게 된다. 예술을 알고 나니 이 작은 세계가 감옥이란 것을 알았다" 베케트의 고백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좋아하고 이 연극을 가슴에 품고 다닌다. "다시 시도하고 다시 실패하고 더 나은 실패를 하라" 는 사무엘 베케트의 유언을 사랑한다. 더블린 뒷골목 '템플바' 에서 스코틀랜드 위스키 한잔을 걸치고 호텔로 돌아왔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영화처럼 잠깐 동안 반짝거리다 사라지지 않고 오래 된 연극처럼 내일도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계속 새롭게 재해석하면서 그치지 않고 가는 것이 아니던가.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대표기자 justin-7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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